모바일 오유 바로가기
http://m.todayhumor.co.kr
분류 게시판
베스트
  • 베스트오브베스트
  • 베스트
  • 오늘의베스트
  • 유머
  • 유머자료
  • 유머글
  • 이야기
  • 자유
  • 고민
  • 연애
  • 결혼생활
  • 좋은글
  • 자랑
  • 공포
  • 멘붕
  • 사이다
  • 군대
  • 밀리터리
  • 미스터리
  • 술한잔
  • 오늘있잖아요
  • 투표인증
  • 새해
  • 이슈
  • 시사
  • 시사아카이브
  • 사회면
  • 사건사고
  • 생활
  • 패션
  • 패션착샷
  • 아동패션착샷
  • 뷰티
  • 인테리어
  • DIY
  • 요리
  • 커피&차
  • 육아
  • 법률
  • 동물
  • 지식
  • 취업정보
  • 식물
  • 다이어트
  • 의료
  • 영어
  • 맛집
  • 추천사이트
  • 해외직구
  • 취미
  • 사진
  • 사진강좌
  • 카메라
  • 만화
  • 애니메이션
  • 포니
  • 자전거
  • 자동차
  • 여행
  • 바이크
  • 민물낚시
  • 바다낚시
  • 장난감
  • 그림판
  • 학술
  • 경제
  • 역사
  • 예술
  • 과학
  • 철학
  • 심리학
  • 방송연예
  • 연예
  • 음악
  • 음악찾기
  • 악기
  • 음향기기
  • 영화
  • 다큐멘터리
  • 국내드라마
  • 해외드라마
  • 예능
  • 팟케스트
  • 방송프로그램
  • 무한도전
  • 더지니어스
  • 개그콘서트
  • 런닝맨
  • 나가수
  • 디지털
  • 컴퓨터
  • 프로그래머
  • IT
  • 안티바이러스
  • 애플
  • 안드로이드
  • 스마트폰
  • 윈도우폰
  • 심비안
  • 스포츠
  • 스포츠
  • 축구
  • 야구
  • 농구
  • 바둑
  • 야구팀
  • 삼성
  • 두산
  • NC
  • 넥센
  • 한화
  • SK
  • 기아
  • 롯데
  • LG
  • KT
  • 메이저리그
  • 일본프로야구리그
  • 게임1
  • 플래시게임
  • 게임토론방
  • 엑스박스
  • 플레이스테이션
  • 닌텐도
  • 모바일게임
  • 게임2
  • 던전앤파이터
  • 마비노기
  • 마비노기영웅전
  • 하스스톤
  • 히어로즈오브더스톰
  • gta5
  • 디아블로
  • 디아블로2
  • 피파온라인2
  • 피파온라인3
  • 워크래프트
  • 월드오브워크래프트
  • 밀리언아서
  • 월드오브탱크
  • 블레이드앤소울
  • 검은사막
  • 스타크래프트
  • 스타크래프트2
  • 베틀필드3
  • 마인크래프트
  • 데이즈
  • 문명
  • 서든어택
  • 테라
  • 아이온
  • 심시티5
  • 프리스타일풋볼
  • 스페셜포스
  • 사이퍼즈
  • 도타2
  • 메이플스토리1
  • 메이플스토리2
  • 오버워치
  • 오버워치그룹모집
  • 포켓몬고
  • 파이널판타지14
  • 배틀그라운드
  • 기타
  • 종교
  • 단어장
  • 자료창고
  • 운영
  • 공지사항
  • 오유운영
  • 게시판신청
  • 보류
  • 임시게시판
  • 메르스
  • 세월호
  • 원전사고
  • 2016리오올림픽
  • 2018평창올림픽
  • 코로나19
  • 2020도쿄올림픽
  • 게시판찾기
  • 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탈퇴한 회원입니다]
    가입 :
    방문 :
    닉네임변경 이력
    회원차단
    회원차단해제
    게시물ID : history_26676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
    조회수 : 1117
    IP : 125.138.***.85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6/08/21 14:22:01
    http://todayhumor.com/?history_26676 모바일
    가볍게 보는 구한말 교육이야기, 소학교를 중심으로

     

    갑오개혁 이후, 조선정부는 본격적으로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근대국가로 나아갈 밑거름인 근대교육을 위한 교육개혁을 시작하였다.

     

    갑오개혁에서 시작된 교육개혁은 여타의 개혁과 비슷하게 국가 주도하에서 근대교육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면은 있으나, 재정의 부족, 추진 의지의 박약,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 외세의 간섭 등으로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의도가 관철되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구한말 시작된 근대교육이 여전히 충군애국이라는 유교적, 봉건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었고

    개혁이 시작된 후, 국가 주도하에 관공립학교가 여러 곳 설립되었지만 재정과 의지의

    부족으로 시설이 매우 열악하거나 수요와 정부의 정책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였고,

    더욱이 사범학교가 활성화되지 않아 교사가 부족하여 제대로 돌아가는 소학교가 적었으며

    그런 이유로 교육을 받는 학생 수도 매우 적었다는 한계도 있다.

     

    (19008월 발표에 의하면 관립소학교 고등과 졸업생이 15, 심상과 졸업생이 55인이었다.

    관립 소학교 심상과 졸업생수를 당시 한성 인구의 비율과 비교하면 0.05%, 0.03%,0.03%이다.

    비록 중도 퇴학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졸업생의 숫자에서 짐작되듯이 취학률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학교 교육의 부진은 초등교육 단계의 국민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다만 이자료가 한성부의 졸업생만을 다루는 것인지, 한국 전체의 졸업생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구결과에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근대교육으로 나아갔다는 역할에

    의의를 두기도 한다.

     

    1876년 강제개항 이후, 파견된 수신사는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근대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일본의 학제, 여성교육, 실업교육 등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보고한 것이

    구한말 근대교육과 한국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1881년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되어 군사시설, 산업시설, 경찰제도, 세금제도, 관제 등을 시찰함과

    동시에 각종 학교, 도서관 등의 교육기관도 시찰하였다.

     

    이들, 수신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접촉하였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개화론의 대표적인 주장가로서

    새로운 서양의 지식과 문명이 일본을 부강하게하고 일본국민을 근대로 나아갈 수 있게 계몽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런 입장을 수용하여 1872년 의무교육제도를 채택하였다.

    이는 학제포고령에 여실히 나타나는데, 일본정부는 이제부터 모든 국민. 즉 화-사족, , , 상인 그리고 부녀자

    를 가리지 않고 마을에는 불학의 가호가 없고 집에는 불학의 사람이 없을 것을 기한다라고 선언하였고

    집중적인 재정투입과 사범학교의 확충, 사립학교 설립 장려 등의 조치로 단기간 내에 의무교육-국민교육제도를

    확립하였다. 1880년대 일본에는 약 28천여개의 소학교가 들어섰고 소학교에 재학하는

    학생 수는 2백만 명(학령기 아동의 40%)에 달했다. 이는 1895년에는 학령기 아동의 60%, 1900년에는 90%

    이를 정도로 일본정부는 국민교육 보급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접촉하면서, 일본의 근대국민교육의 확산과 그것이 불러오는 파급효과를 직접 관찰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일본의 문명개화론과 교육제도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에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1885년에 고종에게 널리 학교를 설치하고 인민의 지식을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888년에는 박영효가 국정개혁을 주장하면서 신분 차별이 철폐된 6세 이상의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교육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이런 개화파의 지속적인 요구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갑오개혁 당시 학무아문은 18948학무아문고시

    반포하면서 국민교육의 첫걸음을 떼었다. 학문아문고시에서 시국의 변화에 따라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소학교 입학을 장려하고 있고 교원양성을 위한 사범학교와 전문학교, 대학교등의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에 대한

    포부를 담고 있었다.

     

    학무아문의 고시에 이어 조선정부는 18957월 칙령 제145호 전문 29조로 구성된 소학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어 8월에는 이것을 구체화하여 교과내용 등을 담은 소학교교칙대강을 반포하여 구체적인 추진의지를 보였다.

     

    이렇게 해서 18958월 한성부 내에 관립소학교는 교동, 장동, 정동, 계동, 주동소학교등 5개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1905년까지 한성부 내의 소학교는 9곳으로 늘어난다.

     

    지방에는 관찰부 소재지인 수원, 공주, 충주, 광주, 전주, 진주, 대구, 춘천, 평양, 영변, 해주, 함흥, 경성에

    공립 심상소학교가 1개교씩 설립되었고 1896년에 학부가 추가로 개성, 강화, 인천, 부산, 원산, 경흥, 제주,

    양주, 파주, 순천, 남원, 의주, 강계, 원주 등지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했다.

     

    다만 소학교의 설립과 정부의 학생모집, 취학독려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학교 시설이 형편없었으며 자격이 있는 교사가 매우 부족하여 설립된 소학교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서울에 여남은 개의 소학교가 있으나 학생의 수는 줄잡아서 50여명 가량이다. 이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수준이

    매우 낮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H.B.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_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학생의 수가 적으니 졸업생의 수도 매우 적었다. 소학교 교육은 정부의 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매우 부진했으며 이는 갑오개혁 당시 정부재정이 매우 부족했던 이유도 있으나 갑오 개화파 정권이

    붕괴되면서 추진의지까지 꺽인 이유도 크다.

     

    그나마 한성부의 소학교는 재정지원이 충분하여 운영이 되고 있었지만, 지방의 공립소학교는 재정이 열악하여

    학교로 기능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대한제국 전체 예산에서 학부가 차지하는

    예산은 약 1% 중후반에서 2% 초반으로 매우 적었고 그나마 학부 예산에서 소학교와 관련된 예산은 10%내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나마 나오던 예산이 1899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감소하는데 이는 소학교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광무개혁의 결과로 중학교가 설립되었고

    각종 기술학교(의학교, 광업학교 등)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교육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요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예산을 늘리지 않고 아랫돌 빼내어 윗돌 괴는 식으로

    소학교 예산이 감축되었던 것이다.

     

    이후 소학교비는 1905년 이후 2.5배 이상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대한제국의

    의지가 아닌 식민지 교육 실시의 기반을 닦기 위한 일제의 투자였다.

     

    다만 정부의 소학교 설립과 운영이 지리멸렬하고 형편없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에 있는 한국인들은 소학교 설립과 운영을 보조 하는 등 교육에 열의를 보였다.

     

    이외에도 1894, 외국어학교관제가 반포됨에 따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영어학교와 일어학교가

    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이어 인천에 분교가 개교했다. 이어 1895년 프랑스어학교,

    1896년에는 러시아어학교, 1897년에는 중국어학교, 1898년에는 독일어학교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의학교가 1899년 의학교관제와 의학교규칙이 반포되면서 설립되었다.

    의학교는 1900년부터 모집되기 시작하여 1905년까지 3회에 걸쳐 35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다.

    교장 지석영을 필두로 하여 일본인 교사를 초빙하였고 질병 예방활동,

    여성들을 위한 출산, 육아 교육도 시행하였다. 의학교는 고종의 관심 속에 학부 내 다른 학교에 비해

    많은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시 소학교로 돌아와 소학교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규정에 따르면 독서, 작문, 외국어, 체조, 이과, 역사,

    지리, 산술 등을 배워야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근대적인 과목을 가르칠 교사가 매우 부족하였던 것과

    제대로 된 교과서가 편찬되지 않아 정해진 규정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곳은 한성부 내부에서도 드물었다.

     

    여기에 학식이 있다고 채용된 교사들 중에서도 뇌물을 바치고 교사가 된 자들이 있어

    질적 수준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심지어는 1901년에는 문맹자가 교사여서 학생들이 정부에 경질을

    요구하는 사례도 생겼다. 대한제국 정부는 원칙상, 최하급 관리부터 최상급 관리까지

    문맹자는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하급관리의 경우 문맹자가 상당수 존재했는데, 경찰 최하급 관리인 순검의 경우 일제가

    1907년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2/3이 문맹일 정도였다.)

     

    이런 실정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근대과목을 가르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학교가 천자문, 사략, 통감, 소학, 대학, 예기, 춘추, 자전, 한서, 주자서 등의 이전부터

    학습하던 것으로 돌아갔다. 1903년 일본 농상무성에서 파견된 기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소학교에서 근대과목을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졸업연한도 일정하지 않으며 교실에 시계가 없어 수업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교육령 등 여러 반포 자료에는 상당한 수준의 교과내용이나 교과과정을 정해

    놓았으나 여러 가지 한계로 말미암아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근대 교육제도 확립은 출발은 하였으나,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자주적 발전이 좌절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16/08/21 21:11:00  58.140.***.215  피터버크  645393
    푸르딩딩:추천수 3이상 댓글은 배경색이 바뀝니다.
    (단,비공감수가 추천수의 1/3 초과시 해당없음)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


    이 페이지는 이미 탈퇴하신 회원의 개인 페이지입니다.

    탈퇴한 회원의 게시물은 볼 수 없습니다.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