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옵션 |
|
▲ 고 박영심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시절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는 일본의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의 사진. | |
ⓒ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
▲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리지샹 위안소. 열일곱 살 어린 나이로 박영심 할머니가 여기 끌려온 것은 1939년이었다. | |
ⓒ 난징대학살기념관 전시사진 |
▲ 리지샹(利?港) 2호의 위안소의 현재 모습. 2014년에 장수성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유적은 수리 중이었다. | |
ⓒ 홍소연 |
▲ 난징의 화월루 위안소. 난징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40개에 이르는 위안소가 세워져 운영되었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뒤 설립한 위안소 일람표 | |
ⓒ 장호철 |
▲ 난징대학살 기념관 입구의 재난의 벽. 영어, 일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등 12개 국가의 문자로 '참사자 300,000'을 새겼다. | |
ⓒ 장호철 |
▲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 일본군의 학살은 아이, 어른을 가리지 않았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일본군의 난징 입성. 난징은 1937년 12월 13일 함락되었다. 그리고 6주간에 걸친 대살육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난징 외곽 양쯔강에서도 일본군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항복한 중국군은 물론'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난징안전지대를 통해 5만의 일본군에 맞서 난징시민을 구해낸 국제위원회의 구성원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욘 라베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으로 불린진링여자대학의 학장 미니 보트린은 대학교 안에 대피소를 제공하면서, 약 만 명의 여자와 어린이의 생명을 구해냈다. 왼쪽에서 네 번째가 보트린. | |
ⓒ 기념관 전시사진 |
▲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서 있는 1급 전범들. 난징대학살의 주요 책임자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각각 처형되었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악명 높은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인 노다 다케시·무카이 토시아키 중위는 비겁하게 범행을 부인했지만 총살형에 처해졌다. | |
ⓒ 기념관 전시사진 |
▲ 기념관 유적 지구 학살 참사자 유골진열실의 유골. | |
ⓒ 장호철 |
▲ 비둘기를 받쳐 든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거대한 조각 입상 ‘화평’은 평화와 인류의 미래를 갈망하는 중국인민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 |
ⓒ 장호철 |
▲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기록한 책. 원제는 <난징의 강간>. 원 안은 저자 아이리스 장. | |
ⓒ 미다스북스 |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15442 |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