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r /></div> <div>B.C 168년. 마케도니아 멸망.</div> <div><br /></div> <div>B.C 146년. 카르타고 멸망.</div> <div><br /></div> <div>로마는 동서 지중해의 강대국을 함몰시켰다.</div> <div><br /></div> <div>주위에 남은 곳 중 로마에 어느정도 대항할 힘이 있을만한, 그리고 문명이 있는 국가 다운 국가는</div> <div><br /></div> <div>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머나먼 파르티아뿐이었다.</div> <div><br /></div> <div>그나마 이집트와 시리아는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파르티아는 너무 멀었다.</div> <div><br /></div> <div>로마는 지중해를 통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div> <div><br /></div> <div>불과 60년만에 이탈리아 반도에 한정된 영토가 전 지중해로 늘어난 것이다.</div> <div><br /></div> <div>로마엔 막대한 부가 몰려들었다.</div> <div><br /></div> <div>풍요한 동방 속주에서 걷어들이는 세금, 전리품, 그리고 무역이익까지..</div> <div><br /></div> <div>그러나 이러한 이익을 독차지 한것은 상위 1%에 해당하는 원로원 계급과 무역에 종사하는 중산계층 기사계급이었다.</div> <div><br /></div> <div>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에겐 이익은 커녕 불이익만 가득 안겨주었다.</div> <div><br /></div> <div>중소 자영농이 대부분인 평민들은 막대한 돈으로 밀고 들어오는 원로원계급의 대농장과 경쟁할 수 없었다.</div> <div><br /></div> <div>그나마 중소 자영농이 싼값으로 빌릴 수 있던 국유지는 상위계급이 불법적으로 마구 빌려서 점유한 상태였다.</div> <div><br /></div> <div>결국 평민들은 빚더미에 허덕이다가 토지를 대지주에게 넘기고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로 흘러들어와 실업자가 되었다.</div> <div><br /></div> <div>오랜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div> <div><br /></div> <div>도시국가 시절의 군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도 때문에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직업을 잃었다. </div> <div><br /></div> <div>보상도 (전쟁이 끝나면 끊기는 봉급과 전쟁터에서 우연히 얻은 전리품뿐이었다.</div> <div><br /></div> <div>고향에 돌아온 그들을 반기는 것은 빚더미 가득한 고향의 조그만 농지뿐이었다.</div> <div><br /></div> <div>결국 이들도 실업자가 되었다.</div> <div><br /></div> <div>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 역시 불만이 많았다.</div> <div><br /></div> <div>100년에 걸쳐 로마의 군기아래 같은 희생을 했지만 로마 시민권은 주어지지 않았다.</div> <div><br /></div> <div>희생은 같은데 세금은 내야했고(로마 시민권자는 직접세 면제) 원로원과 민회에 진출은 막혀 있었다.</div> <div><br /></div> <div>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고자 일어난 것이 그라쿠스 형제였다.</div> <div><br /></div> <div>그라쿠스형제가 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div> <div><br /></div> <div>상위계급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국유지를 몰수하고 공정하게 재분배 하는 것.</div> <div><br /></div> <div>라틴 시민권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div> <div><br /></div> <div>두 가지였다. </div> <div><br /></div> <div>형이 먼저 호민관에 당선되어 활동하다가 불만을 품은 원로원 계급의 사주에 의해 살해되었다.</div> <div><br /></div> <div>지지자를 모으고 형과 같은 실패를 하지않기 위해 동생은 10년을 기다렸다.</div> <div><br /></div> <div>드디어 호민관에 당선된 동생은 형의 정책을 더 보완하여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div> <div><br /></div> <div>농지법 자체에 대한 상위계급의 불만은 대단했지만 평민들의 열망이 워낙에 컸기 때문에 꾹 참았다.</div> <div><br /></div> <div>약점은 시민권법에 있었다.</div> <div><br /></div> <div>상위계급에겐 농지법 만큼이나 좋은 일이 아니었다. 라틴시의 유력자들이 원로원에 들어온다는 의미였으니까.</div> <div><br /></div> <div>그런데 가진건 x알 밖에 없는 평민들도 시민권법은 결사 반대했다.</div> <div><br /></div> <div>라틴 시민권자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는다고 해도 평민들의 처지가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div> <div><br /></div> <div>평민에게 있어 로마 시민권이 주는 직접적인 이익은</div> <div><br /></div> <div>빈민이 공짜로 밀을 얻을 수 있는 권리, 민회 참석의 권리와 직접세 면제 뿐이었다.</div> <div><br /></div> <div>해외 여행시 신분 보장, 로마법에 의한 보호도 있지만 평민들이 그런 혜택을 누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div> <div><br /></div> <div>라틴 시민권자 평민들에게 밀을 배급하거나 민회에 첨석하는 것은</div> <div><br /></div> <div>지방에서 로마에 직접 와야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div> <div><br /></div> <div>직접세 면제의 혜택만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지만, 이것 역시 로마 평민들과는 상관 없는 문제였다.</div> <div><br /></div> <div>즉 이익에 있어 평민들끼리 충돌할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div> <div><br /></div> <div>그러나 평민들은 반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div> <div><br /></div> <div>족보도 없는 라틴인들이 로마인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자존심 문제였던 것이다.</div> <div><br /></div> <div>개혁법안이 진행될 수록 평민들의 그라쿠스에 대한 지지도는 하락하였고 원로원 계급은 기회를 잡았다.</div> <div><br /></div> <div>그라쿠스가 지지자 3000여명 앞에서 연설하는 틈을 노렸다.</div> <div><br /></div> <div>상위계급은 빈민들과 자기 입김이 닿는 평민들을 선동했다.</div> <div><br /></div> <div>곧 그들은 집회장에 난입하여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div> <div><br /></div> <div>"연단에서 내려와! 이 좌팔아!"</div> <div><br /></div> <div>"어디 라티니언 깽깽이들이 로마인과 맞먹을라꼬!!"</div> <div><br /></div> <div>"언제 망할지 모르는 자영농보단 지주나리 밑에서 확실히 떡고물이라도 챙겨먹는게 낫지!"</div> <div><br /></div> <div>"로마 공화국 만세! 원로원 만세!"</div> <div><br /></div> <div>"우리가 남이가! 로마는 로마인의 것이다!"</div> <div><br /></div> <div>"그래도 인물은 원로원!"</div> <div><br /></div> <div>지지자 3000여명도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그라쿠스는 자신이 권익을 지켜주려던 평민들 손에 맞아 죽었다.</div> <div><br /></div> <div>평민들은 환호를 지르며 국가를 구했다.</div> <div><br /></div> <div>에필로그</div> <div><br /></div> <div>라틴시들이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div> <div><br /></div> <div>이탈리아는 내전에 휘말렸고 전쟁은 2년간 계속되었다.</div> <div><br /></div> <div>남은것은 상처였고 누구도 이익을 얻지 못했다.</div> <div><br /></div> <div>로마의 국력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고 동부 속주는 내전을 틈타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손에 모두 넘어갔다. 그리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div> <div><br /></div> <div>전쟁이 끝나고 로마는 그제서야 라틴인들의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했다.</div> <div><br /></div> <div>이번엔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그라쿠스가 그토록 염원하던 농지법은 흐지부지 되었으나, 형제가 사망한 100년 뒤 칼을 앞세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손에 결실을 맺게 된다.</div> <div><br /></div> <div>그때도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div> <div><br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