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름 모를 어떤 할아버지와 꽤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br><br>이 할아버지와 처음 만난 것은 약 7년 전, 그러니까 제가 중학교 1학년 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까지 쭉 가평에서 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구리시로 이사를 오게 됐습니다.<br><br>당시 3월은 3월이 아니었습니다. 입학식 당일에는 눈이 발목 높이까지 쌓였고 그 후로도 몇 번 크게 눈이 왔었지요. 날씨는 당연히 추웠고요. 가뜩이나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감기까지 걸려 여러모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br><br>그 때 저희 집과 중학교 사이에 거리가 걸어서 약 20분 정도 됐습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때라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건 생각도 못해봤고, 때문에 늘 구리시 체육관 언덕길을 타고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br><br>언덕길은 짧기는 했으나 꽤 가파른 경사였습니다. 거기다 날은 영하에 바람까지 거세게 불었죠. 학교가 끝날 즈음에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한 저는 어지러움을 억지로 참으며 그 언덕길 앞까지 도착했습니다. 정말 죽을 맛이었지만 거기서 바람을 쐬고 있느니 차라리 빨리 집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br><br>아직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볼이 터질 것 같았죠. 눈알마저 시려워지자 저는 눈을 감고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로 빨리 집에 가자, 빨리, 빨리. 이런 생각을 하며 정신없이 걸었습니다.<br><br>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가 몹시 따뜻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제가 어떤 상가 안에 들어와 있더군요. 정말로 평범한 상가였습니다. 양 옆으로 자그마한 가게들이 나있고 사람들은 걸어 다니거나 가게에서 뭔가를 사는 그런 곳이었죠. 상가의 양 끝에는 유리문이 있었고 사람들은 거기를 통해 이 상가를 드나드는 듯 했습니다.<br><br>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구리시 사시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구리시 체육관 언덕길은 굉장히 황량합니다. 그 너머 꽃길은 술집이나 노래방이 즐비하지 큰 상가는 없죠. 더군다나 제가 보았던 그 상가는 구리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처음 보는 장소였습니다.<br><br>헌데도 저는 그 곳이나 그 곳에 있는 저 자신이 이상하단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열이 나서 괴롭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래서 저는 앞에 보이는 유리문을 향해 걸었습니다. 이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상가를 벗어나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요.<br><br>그 때 누군가 제 팔을 낚아챘습니다. 보니까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저를 잡아 질질 끌고 가시더군요. 할아버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약 70대 정도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셨는데 얼굴은 화가 난 듯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위에는 소위 말하는 깔깔이라는 누런 패딩 점퍼를 입고 계셨고요.<br><br>저는 무섭기보단 너무 당황스럽고 아팠습니다. 제 팔을 잡아당기는 할아버지의 팔 힘이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도저히 70대 노인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이 할아버지 뭐가 그리도 화가 나셨는지 온갖 쌍욕을 저에게 퍼부으시더군요. 정신 나간 년. 여기는 왜 왔냐. 등등.<br><br>할 수 있는 반항은 다 해보았지만 아무리해도 할아버지의 손에서 벗어 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사람하고 세게 부딪히게 됐습니다. 저 자신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만큼 세게 부딪혔죠. 할아버지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지만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해서 고개라도 꾸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br><br>거기엔 웬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보이는 얼굴에 검은 목폴라, 검은 코트. 무엇보다 섬뜩했던 건 그 남자가 저를 보며 히죽 웃던 모습입니다. 그 남자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 뒤를 쫓기 시작하더군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더 화가 난 것처럼 큰 소리로 욕을 지껄이면서 아예 뛰는 것처럼 빠르게 걷기 시작하셨습니다.<br><br>상가 끝에 다다르자 할아버지는 유리문을 벌컥 열었고 저를 바깥으로 밀치며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바닥에 바로 엎어졌고 너무 아프고 괴로운 나머지 잠깐 정신을 잃었습니다.<br><br>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제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중간에 쓰러졌다더군요. 오토바이 한대가 바로 제 앞을 지나치려했는데 제가 앞으로 엎어지면서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다고 하더군요.<br><br>그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br><br>저는 가위는 눌려도 꿈은 꾸지 않는데요. 그 날은 유난히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 앞에서 누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습니다. 바로 그 할아버지였습니다.<br><br>부모님이 차를 세우자 할아버지가 버럭버럭 화를 내며 차문을 열고 저를 포함한 가족들 모두를 차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헌데 아버지가 기어코 차를 타고 가야한다며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저한테 오늘 절대로 너희 아버지가 차를 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br><br>꿈에서 깼는데 기분이 정말 묘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말씀드리려 했지만 하필 그 날 아버지가 지각을 하시는 바람에 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고, 아버지는 급히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셨습니다.<br><br>학교에 있는데 전화가 오더군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다고. 앞차가 화물트럭인데 거기에 싣고 가던 물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8주를 입원해 계셨는데 의사 말로는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아버지한테 그 꿈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그런 걸 왜 이제 이야기 하냐며 혼 난 게 기억납니다.<br><br>마지막 일화는 최근의 것입니다.<br><br>작년 겨울 부모님이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떠나시면서 약 5일 정도 저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br><br>첫날밤은 친구들을 불러서 놀다가 밤을 세고 그 다음날 저 혼자서 잠에 들었죠. 지금은 꿈이라고 말하지만 당시엔 그게 꿈인지도 몰랐습니다. 무작정 목이 말라서 거실로 나갔는데 그 할아버지가 마루에 딱 버티고 계셨습니다.<br><br>할아버지는 저를 붙잡더니 물도 못 마시게 하고 다시 방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러더니 문을 잠그고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문을 열어선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시더군요. 저는 영문도 몰랐지만 그래야할 것 같은 불안함에 사로잡혀서 일단 문을 잠그고 구석에 앉았습니다.<br><br>이윽고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주 정중한 노크였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어머니 목소리가 났습니다. 그래도 문을 안 여니까 아버지 목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더군요. 정말로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노크소리와 문을 열라고 재촉하는 가족, 친구들의 목소리.<br><br>공포에 시달리던 저는 엉엉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날까지 쭉 이모네 집에서 머물렀고요. 만약 그 때 문을 열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저를 세 번씩이나 도와준 그 할아버지는 아직도 궁금합니다.<br><br> [투고] 여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