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막내는 음식 취향이 상당히 비슷하고
둘째는 고기만 좋아하고
아버지는 완연한 50대의 그 입맛이셔서
결국 이 지방에서 그나마 알아준다는 뷔페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항시 밤에 술을 자시고 들어오는 터라 대화다운 대화를 한 기억이 잘 없고,
나는 이미 7년의 연애가 괴롭기 짝이 없이 끝난 뒤라
생불 혹은 그 이상에 가까운 정신상태였고
이전에 아버지에게 했던, 아버지가 그래서 우리가 힘든거라느니
그렇게 해서 되겠냐는 독설등은 하등 도움이 안된다는 걸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깨우친, 철들은 늙은 영혼이었다.
동생들은 어리지만 바른 마음가짐으로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고
나는 문득, 아버지가 내 나이대에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했다.
" 아빠, 아빠는 내 나이에 뭐했어?
" 밴드하고 있었지.
" 응? 그러면 엔터테인먼트는 언제부터 한거야?
" 34살때. 그래도 좀 빠르게 했지
" 그래도 아빠, 기타도 드럼도 무지 잘쳤잖아. 왜 밴드로 계속 안하구?
" 이쪽으로 계속하면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빠르게 했지. 그래서 그쪽으로 방향을 튼거야.
처음듣는 이야기였다.
멋에 살고 죽는 아부지라고 생각했는데, 먹고살 걱정으로 한 결정이었다니
아버지는 사업을 하면서 집에 번듯이 돈을 가져다 준 기억이 잘 없었다.
집에선 항상 캐피탈에서 오는 독촉전화로 받자마자 끊는 건 이미 생활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사업이 먹고살 걱정으로 시작했던 거였다니..
뭔가 머리를 띵 하고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항상, 아버지는 멋에 살고 죽는 사람이라, 그래서 사업을 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겠거니 하고
아주 강하게 확신하고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말을 이어갔다.
" 그래도 한창 잘 나갈 때는 직원들한테 벤츠도 뽑아주고 그랬어. 그런 곳이 그땐 없었는데
" 아빠.. 우리 입장에선 아빠가 그렇게 얘기하면 괜히 속상해.. 집에 가져다 준 기억이 없는데 직원들한테는 그렇게 해줬다고 하면
" 사업의 일환이니까. 그래도 그 때 기억나? 너희 엄마 유방암 걸렸을 때, 그때 집 이사도 했었잖아. 집 인테리어 할 때 유해한 거 조금이라도 나오지 말라고 다 친환경으로 인테리어 했던 거야. 4천정도 들었는데도..
그제서야 떠올랐다.
몇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할머니도, 집에 오실적마다 꼭 나에게 만원이고 2만원이고 손에 꼭 꼭 쥐어주고 가셨다.
항시 친척들한테는 장난식으로 용돈달라 하시면서,
집에와서는 심부름만 시키시고 나랑 별 대화를 안하셔도
꼭 집에서 떠나실 때는 나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주셨다.
그걸 받을 땐, 한 때에는 당연하다는 듯, 한 때에는 이깟 돈이 뭐라고 자꾸 주시는 걸까 하고 세상에 찌든듯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그래 그랬다.
이 집안사람들은 다들 속정은 이따만큼 깊은데
다들 표현할 줄은 몰라서
다들 그렇게, 그나마 귀하다 생각하는 물질로
아껴주고 있었다는걸,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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