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잠시 경유한 후 로마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밤 여덟시 사십분,
이미 바깥은 어두웠고, 하늘에서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 부슬비는 앞으로 겪게 될 고생들의 복선이었던 셈이다.
숙소는 테르미니 역 근처의 호스텔 The Beehive.
역 근처 숙소들이 으레 그렇듯이 주변 환경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호스텔이나 민박들은 대부분 테르미니 역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테르미니 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로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라는 열차를 타는데,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티켓을 끊기 위해 부스로 가자 잘생긴 청년이 무어라 열심히 설명을 했다.
내가 알아들은 말이라고는 '늦었다', '셔틀', '12유로'밖에 없었지만, 나는 12유로를 주고 이상하게 생긴 티켓 하나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나처럼 영문을 모르는 일군의 여행객들과 함께 봉고 같은 승합차에 올라,
어디 마피아에 넘겨지는 게 아닐지 불안해하며 공항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승합차에 내리니, 나는 테르미니 역 앞에 있었다.
비하이브는 처음 묵어보는 호스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어라 평가할 수가 없었다.
처음 받은 인상은 '깔끔하네' 정도.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깔끔하고 무난하다' 정도.
다만 1박에 25유로라는 비용을 생각하면, 별 다섯개에 세개 반 정도를 주고 싶다.
6인실 도미토리에 남자 한 명, 친구로 보이는 여자 둘, 그리고 한국인 한 명이 있었다.
남자와 한국인은 다음날 떠나고, 여자 둘은 내가 떠날 때까지도 있었는데,
딱히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방 안에서는 대체로 조용했다(...) 최소한, 자야 할 시간에는 조용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토록 기다리던 유럽에서의 긴장되는 첫날 밤,
이층 침대를 기어올라 몸을 누이니
바로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2일차>
로마는 엄청 큰 도시는 아니다. 아니, 크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찾는 관광지는 비교적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다.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나의 기준으로) ① 바티칸이 위치한 북쪽, ② 판테온과 트레비 분수, 나보나 광장 등이 모여 있는 가운데,
③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등이 위치한 남쪽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로마에서의 사실상 첫날에는 포로 로마노를 가보기로 했다.
전날 호스텔에서 받은 지도를 보면서 "대충 이렇게 가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길을 나섰다.
테르미니 역에서 조금 올라가면 레퓌블리카 광장이 있다.
이탈리아의 웬만한 크기의 도시에는 '레퓌블리카(Repubblica)'라는 이름의 광장이 하나쯤은 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프랑스의 경우에는 레퓌블리크(Republique)), 철자를 보면 알겠지만 공화국 광장이라는 이름인데,
이런 이름의 광장이 하나씩 있다는 데 까닭 모를 인상을 받았다.
<레퓌블리카 광장>
레퓌블리카 광장을 둘러싼 건물과 가운데의 분수를 보면서, 뭔가 유럽에 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분수를 보며 정신 없이 셔터를 누르던 나를 신경쓰이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뒤쪽에 놓인, 정체를 알 수 없는 폐허 같은 낡은 건물 하나였다.
<너는 뭐하는 건물이니??>
입구에 바실리카라고 쓰여져 있는 걸 봐서는 무슨 성당,, 같기는 한데,
이런 다 쓰려져 가는 건물이 성당이라니.
들어가 볼까? 들어가도 되나? 궁금하긴 한데... 이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앞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들어가게 되었다.
<실내 사진 찍기는 정말 힘들다... ㅠ>
그리고 다가온 것은 문화컬쳐, 아니, 컬쳐쇼크이던가.
이렇게 허름해 보이는 건물 안에 이런 성당이 있다니.
물론 유럽 여행을 좀 다니신 분들은 거대한 성당이 지겹게 느껴지실 거라고 본다.
더군다나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 그것도 로마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처음으로 접한, 그것도 그렇게 수수한 외관에 숨어 있던 모습을 본 당시의 나로서는 굉장히 인상 깊은 건물이었다.
(인상 깊기는 했지만 사실 성당 이름도 몰랐다... 이제 와서 찾아보니 Santa Maria degil Angeli dei Martiri라는 성당이었다.)
이렇게 충격을 받은 후, 포로 로마노를 향해 via nazionalle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via nazionalle는 길 이름인데, '국가로(路)' 정도로 번역할 수 있으려나,
재밌는 건 이렇게 via nazionalle가, via torino, via milano, via napoli, via firenze 같이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붙은 길들을 가로지른 후
마지막에는 이탈리아를 통일한 왕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도 도시 국가로서의 역사가 워낙 깊다보니 남부와 북부 간의 갈등이 심하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이탈리아의 '통합'을 강조하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재미 없으시면 죄송... ㅎ,.ㅎ)
<지나가면서 이런 건물들도 보고.. 아마 무슨 전시관인가 보네?>
<마침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전에 배부터 채워야지 ㅎ>
그래서 골목에 있는 자그마한 피자리아에 들어갔다. pizzeria라고 쓰던데 피자리아라고 읽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상.
이탈리아에서 처음 먹은 음식인데, 맛은 썩 나쁘지 않았다.
유럽의 물가, 특히 음식값은 배낭여행자의 숨통을 조여 온다.
그나마 이탈리아에서 음식을 싸게 때울 수 있는 곳이 이런 피자리아인데, 일반적으로 5유로 안으로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준다.
(이래도 7500원이지만, 이정도면 정말 싼 거다.)
주로 이미 조리되어 있는 슬라이스 피자를 사진과 같이 잘라서 주는데,
피자리아에서는 저렴한 대신 원조의 맛을 느끼겠다! 이러면 안 된다... 뭐든지 돈만큼 값어치를 하는 법이니까.
피자를 먹던 중에 딱 봐도 조잡스러운 로마군 복장을 한 아저씨가 들어와서 맥주 한 캔을 사마시고 나갔다.
그걸 보고 아, 관광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자를 먹고 조금 걸어가자 보인 모습. 포로 로마노가 아니다. 이런 유적들이 그냥 건물들 사이로 곳곳에 놓여 있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유적인 셈.>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다가온다.
아까 피자리아에서 봤던 로마 병정 아저씨. 사진을 찍어 준댄다. 그러더니 내 카메라를 받고는,
근처에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서는 사진을 몇 컷 찍어준다. 약간 들떠있던 나는 로마 쫄병과 함께 별 생각 없이 기분 좋게 사진을 찍었는데,
이 아저씨, 갑자기 손을 튕긴다. 아, 당했다...
나는 결국 7유로를 주고야 말았다. 생각해보니 지나가던 사람도 이 아저씨 동업자인 것 같았다.
지금에서야 웃고 넘어가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충격이 제법 컸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에, 이런 일 안 당해야지 조심하고 있었는데,
피같은 7유로를 ( )같은 사진 몇 장 찍고 뺏기다니. 나는 바로 그 사진들을 지워 버렸다.
사실 이탈리아의 왠만한 주요 관광지 앞에는 이렇게 로마 병정 복장을 한 아저씨들이 많으니, 사진을 찍어 준다고 해도 찍지 말자.
아니면 돈을 줘야 한다는 걸 유념하도록 하자. ㅠㅠ
그렇게 약간의 억울함과, 서글픔과, 또 어떻게 돈을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모습들>
<이 곳에는 만든 황제의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투스 포럼, 네르바 포럼, 트라야누스 포럼으로 불리는 포럼 세 개가 붙어 있다.
포럼이란 일종의 광장으로서 로마 시민들의 정치 경제적... 역사 시간이 아니니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황제의 동상들이 길을 따라 몇 개 놓여있다. 이 동상의 주인은 트라야누스 황제. 뒤에 놓인 포럼을 만든 주인공들이 놓여 있는 듯하다.>
<이 으리으리한 건물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아까 말했듯이 사르데냐의 왕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이시다.>
세 황제의 포럼에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지나면,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캄피돌리오 언덕을 만나게 된다.
혹시 누군가는 언어영역 지문에서 '캄피돌리오 광장과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북극성'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마의 나머지 여섯개 언덕이 뭔지는 모르지만 캄피돌리오 언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하나는 저 언어영역 지문에서 봤던 캄피돌리오 광장에 관한 내용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에 여러 신들의 신전이 있던 굉장히 신성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로마인 이야기에서 봤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어쌔신크리드'에서 이곳을 말타고 올라가던 에지오의 모습이 기억나기 때문이었다.
(에필로그에서 이탈리아 여행의 가장 큰 동기가 게임 '어쌔신크리드' 시리즈였다는 걸 말했었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아는 곳이다!!!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가는 계단>
<'바로 그'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물론 이건 가품이고, 진품은 캄피돌리오 미술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바로 그'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캄피돌리오 광장의 북극성 모양 장식, 옴팔로스를 본떠서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관광객들이 캄피돌리오 언덕을 찾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언덕의 뒷편에서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보이기 때문.
<이렇게!>
개인적으로 포로 로마노를 정말 보고 싶었다.
요즘에는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중학생 때 그녀의 <로마인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던지라
언젠가 한번 포로 로마노에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을 때 든 생각은,
'아... 왔구나.'
실망도 흥분도 기쁨도 아니고, 마침내 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무언가 오래도록 고대하던 것을 봤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마침내 봤다'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그걸 몇 번이고 계속해서 보면서 점점 생각이 달라져서는,
마지막에는 그것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포로 로마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처음 봤을 때의 생각은 '왔구나' 뿐이었다.
이렇게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본 후, 나는 언덕을 내려가 포로 로마노에 들어가보고자 했다.
하지만 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응?>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위에 있었다...
<뭘 봐? 내가 지금 갈매기라고 X나 무시하냐?>
<저..절대 군인 형이 잘 생겨서 찍은 건 아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기념관을 내려와 포로 로마노의 입구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콜로세움 방향에 위치한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포로 로마노와 그 안에 위치한 팔렌티노 언덕만 가고 싶었는데,
포로 로마노+팔렌티노+콜로세움 티켓을 모두 묶어서 팔더라... 치사한 녀석들.
어쩔 수 없이 통합권을 샀다. 13유로였던가, 대충 그쯤했던 것 같다.
<포로 로마노>
안에서 봐도 별로 다른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아, 포로 로마노구나, 이게 로마의 폐허구나. 굳이 무언가 감정이 들었다고 하면, 신기함에 가까웠던 것 같다.
책에서만 듣고 보던 걸 실제로 이렇게 본 것에 대한 신비함, 그리고 이천 년 전의 폐허가 이런 규모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신기함.
<사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기둥이 정말 거대했다.>
포로 로마노는 오래 보지 않았다. 한 번 둘러본 후, 뒤편에 있는 팔렌티노 언덕으로 향했다.
황제들의 궁전과 고급 저택들이 있었다는 팔렌티노 언덕,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그곳.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이렇게 저택들의 폐허가 있는데, 그 큰 규모 말고는 이 저택들이 과거에 부유층들이 살던
고급 저택이었음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팔렌티노 언덕 위에서도 로마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다시 만난 갈매기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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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엄청 길어지네요, 설마 하루를 한 게시물에 다 실지 못할 정도라니.
뭔가 양이 어중간해지지만 더 이상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스크롤도 그렇지만 제가 지쳐서.. ㅠㅠ
로마에서 정말 열심히 돌아다닌 것 같아서 뭔가 뿌듯하면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게시물을 읽어주시는 분이 있다는 점에 보람을 느끼면서,
느리더라도 꾸준히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 _)
ps. 글이 두서가 없는 이유는... 제가 두서없이 돌아다녀서 그렇습니다 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