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옮기는 외다리 귀매, 독각귀(獨脚鬼) 개요 독각귀(獨脚鬼)는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외다리 귀매(鬼魅)이다. 독각귀는 넓적한 얼굴에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녔으며, 심한 비린내를 풍긴다. 독각귀는 사람에게 병을 옮기고 음탕한 짓거리를 하는 존재이다. 한자 표기로 보면 독각귀는 도깨비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한국 토종 귀신의 성격이 강한 도깨비는 아니다. 독각귀는 오히려 중국의 산소(山魈), 신치(神失鬼), 산정(山精), 이매망량(魑魅魍魎)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귀신으로 외다리이면서 산에 주로 거주하며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원텍스트 요약 재상 이유(李濡)는 종묘 근처를 지나다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은 외다리 요물을 만났다. 요물이 어떤 가마를 급하게 쫓아 달려가기에 이유가 그 뒤를 따라 가보니, 자신의 외가 친척 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유는 친척 집을 방문해 사정을 알아보니 이 집 며느리가 괴질을 얻어 치료를 위해 친정에 갔다가 병을 고치지 못하고 여러 달 고생만 하다가 결국 이날 시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가 사연을 접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잠깐 전에 집 밖에서 마주친 요물이 이 댁의 병든 며느리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유가 두려움 없이 노려보자 요물이 밖으로 도망 나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요물이 사라지자마자 며느리의 병이 모두 완쾌되었다. 이유가 자신의 이름을 적은 이 백여 장의 부적을 방안에 붙인 뒤, 다시는 요괴가 이 집에 출현하지 않았다. 출처 :《청구야담》권2 역신(疫神)의 또 다른 모습, 독각귀(獨脚鬼) 독각귀는 조선시대 재상 이유(李濡, 1645-1721)가 “어떤 부인에게 붙은 귀신을 물리치고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일화 속에 등장하는 귀신으로, 조선후기 한문 야담집인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실려 있다. 이 야담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독각귀의 외모이다. 독각귀는 횃불처럼 타오르는 두 눈을 지닌 외다리 귀신으로 삿갓과 도롱이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재상 이유가 순라골을 지나고 있는데 때마침 이슬비가 내렸다. 문득 한 사람이 다가 왔는데 삿갓과 도롱이를 쓰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삿갓과 도롱이 차림이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눈은 이글이글 타는 횃불과 같았고, 다리는 하나뿐인데도 바람처럼 내달린다. 이 순간 이유는 이 사람이 인간이 아니고 요물임을 직감한다. 그리고는 그 요물을 뒤쫓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도롱이와 삿갓을 갖춘 모습이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도롱이와 삿갓을 쓴 요물에 대한 기록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도 확인된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젊었을 때, 진주 남강(南江)에서 손님을 송별하고 돌아오던 길에 안개비를 만났다. 타고 가던 말이 거품을 물고 꼼짝도 하지 않기에 길 옆 동쪽 골짜기를 보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 있었는데 키가 수십 길이 되고 얼굴은 쟁반만하며 눈을 횃불 같아서 아주 괴상스러웠다. 만약 두려워한다면 그 괴이한 사람에게 말려들 것이라고 생각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더니 그 사람은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성현과 이유가 만난 두 요물의 생김새는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성현이 본 요물은 중국의 ≪포박자(抱朴子)≫에 등장하는 산정(山精)과 더 유사하다. 산정은 산에 사는 귀물로, 매우 큰 키에 갑옷에 삿갓을 착용하고 있으며 사람을 잘 해친다고 한다. 산정이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용재총화≫의 사례처럼 갑옷 대신 도롱이를 입은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용재총화≫의 독각귀는 사람을 병들게 하는 기능을 하기 보다는 그저 산에 사는 요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후대의 기록인 ≪청구야담≫을 보면 도롱이와 삿갓, 횃불 같은 눈이라는 외모 상의 차이는 없으나, 산에 살면서 인간을 해치는 대신에 인간 세상에 온갖 질병을 옮기는 전염병 귀신으로 등장함으로서 그 역할이 변화하게 된다. 이 야담에서 주목되는 두 번째 특징은 독각귀의 역신(疫神)적인 면모이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인 역신 때문에 병이 생긴다는 믿음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처용’ 설화이다. 처용이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동침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병을 옮기는 전염병 귀신으로 처용의 아내를 사모해 사람으로 변신한 뒤 몰래 그녀와 잠자리를 한 것이었다.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사모해서 사람으로 변신하여 동침했다는 것은 당대인들에게 병원균 또는 병이 사람의 형상을 갖춘 귀신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고, 이유가 만난 독각귀 역시 사람의 형상을 갖춘 역귀(疫鬼)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무속에서 천연두(天然痘)를 마마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병을 옮기는 귀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예는 ≪천예록(天倪錄)≫에 실린 다음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서울에 사는 김선비가 일이 있어서 영남 지방에 가던 길에 몇 년 전에 죽은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좋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많은 부하와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김생이 그 친구더러 어쩐 일이냐고 묻자 친구는 자신은 죽어서 두창신(痘瘡神)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 막 경기지방에 천연두를 내려 이처럼 많은 아이들을 거두었으며, 장차 영남지방에 천연두를 내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김생은 친구더러 살아생전에는 인정이 많았던 사람이었으니 은혜를 베풀어 아이들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여러 번 간청을 했고, 친구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친구와 헤어져 안동 고을에 오게 된 김생은 이미 그 지역에 두창이 내려 많은 아이들이 죽은 것을 알았다. 김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깨끗한 음식과 술을 준비시켜 제사를 지냈더니, 얼마 후 두창이 물러가서 그 때까지 죽지 않은 아이들이 모두 살게 되었다. 그날 밤, 김생의 꿈에 그 친구가 나타나더니 이 마을은 죄가 많아서 아이들이 모두 죽게 되어 있었으나 김생과의 약속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은 살려 준다고 하면서 사라졌다.” 이 야담에서 마지막으로 주목되는 점은 독각귀를 물리친 이유라는 인물이다. 이유(李濡, 1645~1721)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이다. 1668년(현종 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서 교리, 수찬 등의 관직을 거쳤고, 1680년(숙종 6년)에는 승지에 발탁되기도 했다.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1702년에 병조판서, 1704년에는 우의정에 제수 되었고, 좌의정과 영의정을 거치기도 했던 인물로 인품이 어질고 덕이 놓았던 인물이다. 독각귀와 마주쳤을 당시 이유는 홍문관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야담에서 본 바와 같이 사람에게 병을 옮기는 흉측한 요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리치는 담대함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이후 최고의 관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역귀는 이유의 서명이 있는 종이(手決)만 보고도 더 이상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유의 비범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역신이 처용의 형상이 그려진 그림이 대문에 붙어 있는 집에는 침범하지 않았다는 처용 설화와 동일한 발상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다만 신라시대에는 처용이 용의 아들이기에 남달랐을 처용의 얼굴을 그려 전염병 귀신을 물리쳤다면, 조선시대에는 재상인 이유가 그의 뛰어난 성품과 학문을 나타내는 자필 서명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유교적 이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야담은 신라시대 처용 설화의 전통에서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시에 중국에서 기원한 독각귀의 이미지를 빌어 역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야담이 주로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신의 형상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된다. 또 한편으로 이 이야기의 초점은 독각귀 그 자체가 아닌 독각귀를 물리친 비범한 인물로 재상 이유를 부각시키는데 맞추어져 있다. 참고문헌 《청구야담(靑邱野談)》 권2 김귀웅 〈민담을 통한 한국인의 종교심성 연구〉 가톨릭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1995. 김현룡 《한국문헌설화》5 건국대 출판부 1999. 임동권 〈귀신론〉 《어문논집》10 1975. 한병천 〈귀신설화연구〉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