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알려진 대로 ‘벌레 이야기’(표제작)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작품은 1985년 작) 이 소설을 ‘광주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놀라운 이야기의 정치적, 지적 자극을 견뎌낼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원작과 영화는 서로 빼어남을 다툰다. 영화의 내용은 약간 다른데 제목처럼(密陽, 시크릿 션샤인) 다소 밝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이 작품은 자식이 유괴 살해된 엄마의 고통, 가해자의 회개, 엄마를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교회 집사, 이를 지켜보는 작중 화자인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이를 죽인 남자는 옥중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받고 안식을 얻는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그는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피해자 가족에게 “…제 영혼은 이미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저는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42쪽)라고 간증하고, 이 말을 들은 아이 엄마는 자살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더 이상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는 인간(25쪽),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욱 힘차고 고마운 고통받는 인간을 견디게 하는 분노, 저주, 복수심(27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33쪽), 용서라는 피해자의 권한마저 빼앗아버린 신(39쪽). ‘벌레 이야기’는 다리가 불편한 4학년 소년의 유괴 살인이라는 현실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주제를 던진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나는 이 작품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관계로 본다. 더불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사법처리도 여론도 엄마 편이지만, 압도적인 권력의 차이는 두 사람의 마음에 있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도 피해자의 고통을 상쇄하지 못할 판에,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갈망했던 신의 구원을 받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측은지심과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다.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용서를 강요하는 상황은 낯선 일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인 예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분노, 고통, 복수에 비해 용서, 화해, 평화는 우월한 가치로 간주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이나 여성운동, 평화운동 세력도 후자를 좋아한다. 분노와 복수는 극복해야 할 비정상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탐욕이 아이를 죽였다면 용서와 화해라는 인간의 ‘고상한’ 욕망이 아이 엄마를 죽였다고 생각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고통의 감정은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는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초월(超越, dis/embodiment)은 득도가 아니다. 경험 없는 몸은 현실과 무관하므로 구원도 마음의 평화도 쉽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반면 피해자의 구원은 ‘고문하는 자’도 피해자도 지칠 만큼 고문의 노동이 지난 후, 잠시 들이마시는 숨 같은 것일지 모른다.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헤아림, 지성의 영역이다.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margin-top: 1em; margin-bottom: 1em; font-size: 16px; font-family: Gulim; text-align: justify;"></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이 작품에서 아이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용서와 치유라는 당위다. 사람들, 심지어 남편조차 피해자가 조용하기를 원한다.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옳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자기도취가 아니다. </span></p><p><span style="color: rgb(34, 34, 34); font-family: Gulim; font-size: 16px; line-height: 28px;"><br></span></p><h4 style="margin: 0px; padding: 0px 0px 17px; font-size: 18px; font-family: Gulim; color: rgb(34, 34, 34); line-height: 1.3;">정희진.<span style="font-size: 16px; line-height: 28px;">여성학 강사</span></h4><div><a target="_blank" h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999.html">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999.html</a></div><p><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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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서명운동이 시작 됐습니다 https://www.womenandwar.net/contents/general/general.nx?page_str_menu=0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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