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12/47c416f4c2169270224ada4dac496754.jpg" class="txc-image" style="FLOAT: none; CLEAR: none" /></P> <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12/e0904e4c8e0ee84a30e26e4e9f2e11b6.jpg" class="txc-image" style="FLOAT: none; CLEAR: none" /></P> <P style="TEXT-ALIGN: left">【대구=뉴시스】제갈수만 기자 = "6.25 전쟁 당시 적들과 싸워 승리했지만 군번도 없이 전사한 전우들에게 미안하다"<BR><BR>경북 영덕군 장사리에서 당시 펼쳐진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채종만(81)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비통한 모습을 보였다.<BR><BR>6.25 전쟁 당시 군번없는 학도병들이 국운을 살리는 단초를 제공한 '장사상륙작전'의 전공이 기념공원 조성을 통해 잊혀진 전투가 재평가를 받게 됐다.<BR><BR>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14일 새벽 4시30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앞바다 한 가운데 LST(상륙함) 한 척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닻을 내렸다.<BR><BR>이 배의 이름은 문산호. 전날 오후 2시께 대부분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722명의 유격대원을 싣고 부산항을 떠나 14시간여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BR><BR>이들은 지난 8월24일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된 학도병들로 27일 창설된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에 소속돼 2주간 밀양에서 기초훈련과 유격훈련을 받은 뒤 출동명령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다.<BR><BR>문산호는 얼마 뒤 배의 뒷문을 내려 이들을 바다 한 가운데 내려놓았다. 작은 구명정을 나눠 탄 유격대원들은 거센 파도를 뚫고 같은 날 오후 2시50분께 장사리 해안 상륙에 성공했다.<BR><BR>그러나 이들을 실어 나른 문산호는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좌초, 차가운 장사리 앞 바다에 수장됐다. <BR><BR>이에 유격부대는 곧바로 북한군의 주 보급로였던 포항·영천방면 7번 국도를 완전히 차단하고 후방활동을 마비시켜 북한군 정예부대를 영덕 방면으로 유인했다.<BR><BR>당시 이들이 도착한 영덕군을 포함해 낙동강 이북 지역 대부분은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상태였으며, 평양방송은 UN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도했다.<BR><BR>그 뒤 유격부대는 9월 16일~17일 이틀간 상륙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북한군 김무정 군단 예하 제5사단 정예부대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공격하며 북상해 격퇴했다.<BR><BR>이 전투로 아군도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BR><BR><BR><BR>특히 19일 오후 3시30분께 이들의 철수를 위해 장사리 앞 바다에 도착한 LST 조치원호에 미처 오르지 못한 39명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BR><BR>22일 당시 학도병으로 참가했던 채종만(81)씨는 "당시 태풍으로 인해 파도가 높아 접안이 힘든 상태였지만 문산호가 전속력으로 육지와 가까이 접안해 먼저 1중대가 상륙을 시도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난 3중대에 소속돼 상륙을 성공, 적들과 싸워 승리했지만 군번도 없이 전사한 전우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BR><BR>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 배수용(88) 회장은 "1950년 8월24일 대구역에서772명의 유격대원을 모집했으며 이중 80%는 학생, 20%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육군본부직할 독립 제1 유격대대 (일명, 명부대)로 창설돼 인천상륙작전 교란을 위해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으며 772명의 부대원 중 현재 38명이 생존해 있다"고 전했다.<BR><BR>이 같은 활약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장사상륙작전은 미국 군사전문가들조차 성공확률 5000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BR><BR>특히 인천상륙작전 개시 직전 적 후방지역에서 교란작전을 수행,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며 서울을 수복하고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BR><BR>전공을 인정받아 육군본부는 1952년 12월 전사자들을 '우국청년(의사)'이라고 칭했으며, 맥아더 장군은 1960년 10월31일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원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친필서를 보내왔다.<BR><BR>이 작전은 전술적인 측면보다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작전이었다는 점과 상륙작전의 경험 획득 및 적 후방지역에서 유격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군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BR><BR>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대한민국의 국운을 좌우하는 작전이었다면 장사상륙작전은 '대한민국 구국'에 결정적으로 일조한 작전이었다.<BR><BR>특히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나이 어린 학도들이 자원해 참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국민들의 애국심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보여준 역사적 사실로 평가되고 있다.<BR><BR>김병목 영덕군수는 "장사상륙작전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진 전투'가 아닌 '기억되는 전투'로 남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며 "스스로 참전한 학도병들의 충혼이 후세에 널리 기려지도록 역사의 그늘에서 나와 빛을 찾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BR></P> <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