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삼십년은 좀 안됐지.
이십 칠년 째니까.
이제 해수 세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삼십년이라고 하고 다녀.
형사가 좋아서,
허리춤에서 만져지는 수갑의 묵직하고도 그 싸늘한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살았지.
폼 나잖아.
형사는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
사실, 폼이 안 나면 안 해.
그런 걸 왜해.
나쁜 놈들 끝까지 쫒아가서 응징하고 눈물 흘리는 피해자들 마음으로 다독여주고,
그걸 보람으로 알고 살았어.
위험?
그런 거 몰랐어.
그냥 동료들, 팀원들이랑 같이 있으면 세상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았어.
사시미 들고 설치는 조폭들,
약한 사람 등쳐먹고 돈 좀 있다고 폼 재는 쓰레기들 보면 마음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지.
살인범 손에 죽어간 무고한 사람들 시신 수습하면서 코끝을 찌르는 그 부패한 살덩어리들이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반드시 뭔가 떠오른다.
나중에 말야 살인한 놈 잡고 보면,
그 부패한 시신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맞아 떨어지는 것을 느끼지.
그 때의 그 전율,
오열하는 가족들에게서 수고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그 기분.
그런 맛에 30년 가깝게 현장을 누비고 다녔어.
그런데 오늘,
나 그냥 수갑 반납할꺼야.
돌아보니 내가 참 바보 같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세월동안 고작 스물 네 평 아파트 한 채밖에 마련하지 못한 알량한 경제력 때문에?
이젠 내가 집에 있는 것을 오히려 어색하게 여기는 마누라와 애들 때문에?
아냐,
그냥 대한민국에서 형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나는 정치인이든 기자든 검사든 회장이든 사장이든.
나쁜 짓 한 사람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정의야.
왜?
힘없는 사람들은 몇 천 원 짜리 분유통 하나 훔쳐도 입건이 되는데 수억 원 수천 만 원씩 받아먹고도 대가성이 없어서 그냥 사표만 내면 끝이냐고?
게다가 그 사람들은 변호사 개업해서 전관예우로 더 큰돈을 만지지.
개가 웃을 일이지.
난 내가 퇴직할 때 쯤 되면,
막내 순경도 비리 저지른 검사를 보면 소환해서 수사하는 세상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그 당연한 장면을 못보고 나가겠네.
그건 상식 아냐?
검사는 특권층이야?
왜 뻔하게 잘못한 게 보이는데 그 사람들은 수사를 못하게 하냐고?
왜?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게 팔다리 다 묶어 놓고 하는 일은 또 전부다 보고하래.
보고하다가 수사 못할 지경이야.
보고를 하면 뭔가 정답을 주나?
수사에 대해서 뭘 알겠어.
사법시험 합격해서 이제 고작 몇 년 근무한 젊은 검사가 삼십년 가까이 현장을 쓸고 다닌 나를 지휘한다고?
지휘? 내가 어제 신문 읽다보니 이번에 신임순경이 천 칠백 명인가 합격 했더라구.
아무튼.
그 중에 수석한 사람 인터뷰를 보니까.
시험 준비하면서 경찰차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그랬대.
그 친구 형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싶다고 그랬다더만..
진짜 기특한 후배지.
그런데 그런 마음 가지고 경찰 들어와서 마주치는 현실은 완전히 달라.
다를 거야.
그 정의감,
그 열정이면 반드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어.
그게 지금 우리 경찰의 현실이야.
삼십년 일한 내가 느끼는 거대한 벽인데,
이제 곧 제복을 입게 될 친구가 그 벽앞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 들겠냐고?
난 그 친구들에게 형사 하라는 말 차마 못하겠다.
형사만은 하지 마라.
그냥 차라리 그렇게 말하고 싶어.
아,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눈물나네.
사건 현장에서 퇴임식 하고 싶었거든,
마지막으로 해결한 사건 현장에서 땀냄새 밴 그 옷 그대로 입고,
막내 형사랑 진하게 포옹하면서 그렇게 멋지게 퇴임식 하고 싶었는데,
이제 그냥 꿈으로 남게 됐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수갑 반납하러 가야겠다.
이녀석 너무 차가워,
더 이상 못가지고 다니겠다.
제길.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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