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 그들은 부엌 바닥에서 잤다.</b></div> <div><br></div> <div><br></div> <div>집주인은 그들에게 당신들이 잘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div> <div>거기서 레슬리가 물러섰다면, 그와 타냐는 밝은 거라곤 밤하늘에 뜬 달과 별 뿐인 허허벌판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div> <div>자동차에서 자는 방법도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집을 뛰쳐나올 때 이불이나 담요같은 걸 챙겨서 나오지 않았다.</div> <div>낮의 태양이 뜨거운 곳일수록 밤공기는 차가운 법.</div> <div>집주인에게 간청을 하는 그 순간에도 싸늘한 밤공기가 둘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div> <div><br></div> <div>집주인인 노부인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결국에는 문을 열어줬다.</div> <div>비쩍 마른 남자와 약간은 멍해보이는 작달막한 소녀가 그다지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했다.</div> <div>집 안은 단정하거나 아늑하다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옥같은 고향집에 비하면 다정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div> <div><br></div> <div>집주인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레슬리와 타냐를 주시하며 부엌의 방향을 일러주었다.</div> <div>두 사람이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쯤, 연신 코를 훌쩍거리는 타냐가 불쌍했는지 집주인은 전기로 작동하는 티포트와 커피의 위치를 일러주었다.</div> <div><br></div> <div>레슬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서, 자물쇠가 바깥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div> <div>아마 노부인 혼자서 사는 듯 보이는 이 집에는 빈 방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div> <div>격리가 가능한 공간에 이방인을 재우겠다는 생각이었을 테고, 그 점이 레슬리를 화나게 할 수도 있었다.</div> <div>그렇지만 그는 노부인의 그런 경계심에 딱히 불쾌해하지 않았다.</div> <div>만약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 찾아와 재워달라고 하면, 레슬리 역시 노부인과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div> <div><br></div> <div>부엌에 들어선 타냐는 티포트부터 찾았다.</div> <div>두 사람이 각자 차 한 잔을 마실 분량을 훨씬 넘는 물을 부은 뒤, 스위치를 눌렀다.</div> <div>그녀는 물이 가열되는 소리를 들으며 티포트를 쳐다보고 있었다.</div> <div><br></div> <div>레슬리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div> <div>아직도 팔뚝 언저리가 차가웠다.</div> <div>레슬리는 타냐의 이마와 입술, 그리고 차가운 팔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div> <div>그의 키스가 타냐를 따뜻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커피 한 잔이 더 효과가 좋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div> <div><br></div> <div>레슬리는 타냐의 팔을 두어 번 쓰다듬은 뒤, 역시 집주인이 가르쳐 준 찬장을 열어 커피와 각설탕, 스푼, 머그컵 등을 꺼냈다.</div> <div>자신의 컵에 커피 두 스푼, 각설탕 하나를 넣은 레슬리는 타냐에게 물었다.</div> <div><br></div> <div>"커피는 몇 스푼이나 넣어줄까?"</div> <div><br></div> <div>물이 끓는 소리에 귀기울이던 타냐는 레슬리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div> <div><br></div> <div>"난 커피 안 마셔. 그냥 설탕 두 개만 넣어줘."</div> <div>"알았어."</div> <div><br></div> <div>레슬리는 타냐의 잔에 각설탕 두 개만 떨어트렸다.</div> <div><br></div> <div>-똑똑</div> <div><br></div> <div>두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부엌문이 열렸다.</div> <div>노부인이 두터워보이는 담요 두 장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div> <div><br></div> <div>"미안해요, 혼자 사는 집이라 이불이 그렇게 많지 않군요. 이거라도 써요."</div> <div><br></div> <div>레슬리는 노부인이 사실은 마음씨가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div> <div><br></div> <div>"고맙습니다, 부인... 이제 막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었어요."</div> <div>"커피만 마시면 속이 쓰릴 수도 있겠군요... 늙은이 혼자 사는 집이라 변변찮지만 냉장고에서 뭐라도 좀 꺼내 먹어요."</div> <div>"고맙습니다."</div> <div><br></div> <div>이번에 대답을 한 것은 타냐였다. 그녀는 뜨거운 설탕물이 든 머그컵을 들고 씨익 웃었다.</div> <div>레슬리가 맨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어디 모자란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미소였다.</div> <div>그렇지만 이제 레슬리는 그녀의 미소가 가지는 의미를 안다.</div> <div>그녀의 미소는 순수한 감사와 사랑, 호의를 담아낼 뿐이었다.</div> <div>타냐의 화답에, 노부인의 입가에도 아주 잠깐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div> <div><br></div> <div>"편한 밤들 되어요..."</div> <div><br></div> <div>노부인은 부엌을 나섰다.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div> <div><br></div> <div>바닥은 이곳저곳 이빨이 빠진 오래된 타일이었고, 바깥 공기만큼이나 차가웠다.</div> <div>타일 바닥에 손을 대어 온도를 가늠한 레슬리는 노부인이 가져온 담요 하나를 절반 정도 펼쳐 바닥에 깔았다.</div> <div>그리고 나머지 담요 하나를 어깨에 걸친 뒤, 담요에 앉아 벽에 기댔다.</div> <div>담요에서는 나무 냄새가 났다.</div> <div><br></div> <div>타냐는 레슬리 몫의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div> <div>자기의 컵까지 맡긴 타냐는 조심스레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거기서 오래되어 보이는 크로와상 하나를 꺼내왔다.</div> <div><br></div> <div>타냐는 레슬리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들추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div> <div>레슬리로부터 컵을 건네 받은 타냐는 곧 설탕물을 홀짝이기 시작했다.</div> <div><br></div> <div>"맛있어?"</div> <div>"응. 달아. 빵 먹을래?"</div> <div><br></div> <div>타냐는 크로와상을 조금 찢어 레슬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div> <div>그녀가 기대어 있는 탓에 레슬리의 한쪽 팔은 자유롭지 못했다.</div> <div>타냐는 팔을 빼서 빵을 받으려던 레슬리를 올려다보았다.</div> <div>그러더니 빨리 입을 벌리라는 듯, 레슬리의 입가에 빵조각을 문지르기 시작했다.</div> <div>레슬리는 누군가가 자기 입에 넣어주는 음식을 받아먹어 본 적이 없었다.</div> <div>적어도 그가 기억이란 걸 갖추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div> <div><br></div> <div>레슬리가 마지못해 빵을 받아먹자, 타냐는 자기 몫을 뜯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div> <div><br></div> <div>"차에 기름이 얼마 없는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div> <div><br></div> <div>커피를 한 모금 삼킨 레슬리가 말했다.</div> <div><br></div> <div>"난 차에 대해서는 잘 몰라.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아?"</div> <div>"글쎄... 계기판 눈금으로 봐서는... 지금까지 온 것의 절반 정도가 아닐까."</div> <div>"기름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div> <div>"걷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태워 달라고 하거나."</div> <div>"나쁘지는 않네.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있다면.</div> <div><br></div> <div>레슬리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타냐의 말에 피식 웃었다.</div> <div><br></div> <div>"기름이 어디서 떨어질 줄 알고 걸어가. 내일 아침에 집주인에게 부탁해서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려달라고 해야겠어."</div> <div>"그럼 어떻게 되는데?"</div> <div>"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적당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div> <div>"그랬으면 좋겠다. 난 브루스터만 아니면 어디로 흘러가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 브루스터만 아니면."</div> <div><br></div> <div>타냐는 레슬리와 자신이 살던 작은 동네를 증오했다.</div> <div>그녀를 만난지 2주 만에 납치하다시피 차에 태우고 도망쳐 나온 레슬리는 타냐가 왜 그리도 브루스터를 증오하는지 알지 못했다.</div> <div>그렇지만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의 목과 다리 언저리에 있는 푸른 멍자국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div> <div><br></div> <div>"후회 안 해?"</div> <div><br></div> <div>레슬리의 질문에 타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div> <div><br></div> <div>"뭘?"</div> <div>"브루스터를 떠나온 거. 그것도 만난 지 2주 밖에 안 된 내 손에 끌려서."</div> <div><br></div> <div>타냐는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둘로 나누어 레슬리의 입에 밀어넣고 자기 입에도 넣었다.</div> <div><br></div> <div>"후회 안 해. 솔직히...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날 끌고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div> <div>"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만약 네가 돌아가고 싶다면 다시 돌아갈게."</div> <div>"헛소리하지마. 난 절대, 죽어도, 두 번 다시는 그 엿같은 동네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차라리 지금 밖에 나가서 얼어죽고 말겠어."</div> <div><br></div> <div>타냐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봤다.</div> <div>레슬리는 한 쪽 팔을 뻗어 푸석한 타냐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머리를 기댔다.</div> <div>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레슬리에게 기대어 왔다.</div> <div><br></div> <div>"내가 돌아가고 싶어할까봐 걱정하는 거라면, 쓸데 없는 짓이야. 만난지 2주 밖에 안 된 깡마른 남자애보다도 가치가 없는 동네라구."</div> <div><br></div> <div>타냐는 자신이 뱉은 말에 레슬리를 얕보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div> <div><br></div> <div>"... 화났어?"</div> <div>"화 안 났어. 그리고, 나 마른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 그리고 브루스터보다 가치있는 남자라니,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네."</div> <div>"응. 그 개똥같은 동네 100개보다 훨씬 낫지."</div> <div><br></div> <div>레슬리는 타냐와 맞닿은 몸이 서서히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div> <div>몇 발자국 앞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닥쳐올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한 걱정을 잠시 동안 잊게 해주었다.</div> <div>차갑게 식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내려놓고, 레슬리는 타냐를 내려다 보았다.</div> <div>그녀는 레슬리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내맡긴 채 어느 새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div> <div>레슬리는 천천히 타냐의 어깨와 얼굴을 감싸서 바닥에 눕혔다. 그는 다리를 베게 한 후 어깨에 걸쳐져 있던 담요를 끌어내려 그녀의 몸에 덮었다.</div> <div><br></div> <div>적막 사이로, 쌔근대는 타냐의 숨소리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다.</div> <div><br></div> <div>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div> <div><br></div> <div>싹튼지 2주가 된 사랑에게 앞으로 닥쳐올 일들은 분명 버겁기만 하리라.</div> <div>그러나 레슬리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div> <div>철없고 조그맣지만 그 누구보다도 천진한 미소를 가진 소녀와 함께라면.</div> <div><br></div> <div>둘이서 함께 걷기 시작한 첫날 밤, 그들은 부엌 바닥에서 잤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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