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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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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조에서 7번 10점 만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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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 광고보고 궁금증이 생겨 인터넷을 통해 좀 더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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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보기 아까워 링크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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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전광판 숫자는 ‘1.0’. 관중석은 술렁거렸다. 순간 항상 9.0 이</p>상의 점수를 받던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1.0</p>이 아니었다. 만점인 10.0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p>체조에서 ‘만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전광판은 최대 9.99점</p>까지 나오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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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한국으로선 잊을 수 없는 대회다. 건</p>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 획득, 구기종목 첫 메달 수상 등 결과가 </p>뛰어났던 것. 한국은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 선</p>수가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여자배구는 </p>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동)을 땄다. 그러나 몬트리올 올림픽이 </p>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체조 종목 최초로 만점 기록</p>을 세운 나디아 코마네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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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올림픽 역사가들은 여자 체조에서 루마니아의 코마네치가 무려 </p>여섯 번이나 만점을 기록하면서 금메달 3개를 차지한 것을 매우 </p>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체조는 기록경기가 아니라 인간</p>의 눈으로 선수들의 플레이(또는 연기)를 보고 10점을 만점으로 </p>해서 점수를 매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9.9점이라면 몰라도 10점 </p>만점을 주기가 어려운 종목이다.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p>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코</p>마네치의 연기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즉 심판들이 앞으로 </p>‘이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는 없다’는 뜻에서 만점을 준 것이</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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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년 올림픽도 석권 후 84년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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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몬트리올 올림픽은 14세의 체조 요정 코마네치를 위한 대회였</p>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출전에 나이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14세</p>의 요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3cm, 39kg의 가냘픈 몸매</p>의 코마네치는 1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기록하며 개인종합 금메</p>달 등 3관왕에 올랐다. 코마네치는 이미 1975년 유럽선수권에서 </p>체조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아 세계무대에서의 만점을 예</p>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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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체조계에는 코마네치 이전에도 요정이라고 불렸던 선수가 있었지</p>만, 코마네치만큼 그 별명에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다. 여자체조</p>는 코마네치를 기점으로 여성미를 보여주는 눈요깃거리 스포츠에</p>서 기술이 가미된 ‘예술’로 승화했다. 코마네치는 76, 77, 79</p>년 세계선수권 우승과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2관왕을 차지하</p>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84년 LA 올림픽을 몇 주 앞두고 돌연 은</p>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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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유명한 체조코치 벨라 카롤리가 여섯 살 </p>때부터 발굴해 키워온 준비된 선수였다. 코마네치는 61년 11월12</p>일 루마니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서 기계공인 아버지와 </p>노동 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까지는 평</p>범한 소녀로 자랐지만 여섯 살 때 카롤리 코치의 눈에 띄어 ‘카</p>롤리 체조연구원’에 입문한 뒤 하루 4~5시간의 훈련과 음식조절</p>을 해가며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특히 살이 찌</p>는 음식은 절대로 먹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생선과 사탕, 고기</p>는 금기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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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코마네치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 세계적인 </p>선풍을 일으켰을 때 그를 둘러싼 기자들에게 그가 한 첫마디는 </p>“집에 가서 놀면서 햄버거와 사탕을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는 </p>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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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코마네치는 카롤리 코치 휘하에 들어간 지 1년 만인 일곱 살 때 </p>처음으로 국내대회에 출전해서 13위에 그쳤다. 그러자 카롤리 코</p>치는 꾸중하는 대신 에스키모 인형을 사주면서 “다시는 13등을 </p>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이후 코마네치는 경기를 할 때마</p>다 에스키모 인형을 가지고 다녔다. 아니, 그때부터 아예 인형 </p>수집이 그의 취미가 되었다. 200여개의 인형을 모았지만 카렐리 </p>코치가 사준 에스키모 인형을 언제나 들고 다녔다. 물론 이후 국</p>내외 대회에서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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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코마네치는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할 때도 그 인형을 들고 비행</p>기 트랩에 올랐다. 코마네치는 그 인형이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p>절못했다. 마치 그 인형이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p>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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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세기 빛낸 최고 여자선수로 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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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차우셰스쿠는 체조를 특별 육성해 코마네치 같은 스타를 배출했</p>다.
</p>코마네치는 뛰어난 체조 실력만큼이나 별명도 많았다. 체조경기</p>장에서는 웃음 짓는 일이 거의 없어서 ‘작은 바위 덩어리’로 </p>불렸고, 가로 10cm의 평균대를 훨훨 날고 이단평행봉에서 공중</p>을 헤집듯이 절묘한 묘기를 연출할 때는 ‘냉정한 작은 벼룩’이</p>라고도 불렸다. 당시 시사잡지 ‘타임’은 코마네치를 “인간의 </p>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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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코마네치가 몬트리올 올림픽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 루마니아 공</p>항은 그를 환영하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코마</p>네치 만세’를 부르며 그 곁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비행기에</p>서 내린 코마네치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오히려 눈물을 떨</p>구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에스키</p>모 인형의 목이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역시 14살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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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코마네치는 최근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여자선수로 뽑히는 등 체</p>조뿐만 아니라 전체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영웅 대접을 받고 있</p>다. 코마네치는 89년 헝가리로 망명한 뒤 캐나다 몬트리올로 갔</p>다가 미국으로 가 미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바트 코너와 96</p>년 결혼했다. 망명 전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p>쿠 부자의 노리개가 되는 수모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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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출처 : 디시인사이드(http://www.dcinside.com) 스포츠갤러리
</p>관련사이트:http://www.nadiacomaneci.com/index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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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아참!! 요즘 모습은 찾지 마세요...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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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로...</p>
근데 예전모습은 정말 예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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