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집 근처의 아파트 단지를 횡단해야 하는데, 며칠 전에 오전 아홉시 반 정도에 그 길을 지나게 되었다. 아파트 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단지 내부를 통과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왼쪽에서 폐부를 가르는 음성이 들였다.
신선이 산다는 선계(仙界)의 울림이 있다면 바로 그런 소리일 것만 같았다. 폼나게 말하면, 대하 장편 소설이나 무정 기협 소설이라고 불리우고, 일반적으로는 무협지라고 불리는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천리전음(千里傳音)이나 사자후(獅子吼)의 공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음성은 이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전방과 후방까지 뒤덮었고, 몸을 휘감아 도는 솜털 같은 진동에 나의 내장까지도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나의 내공을 파괴하여 나를 주화입마로 몰고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을 하는 찰라, 같은 목소리가 새롭게 들렸다. 불과 10초정도 후였다.
이번 소리의 시작은 전방이었다. 인간의 음성이 분명할진대 짧은 순간에 왼쪽의 단지로부터 앞쪽의 아파트 단지의 건물로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대하 역사 소설(!)에 등장하는 축지법이나 경공(달인의 경지를 능허답보(能虛踏步)라 한다)의 수법이었다. 고수출현.
고개를 들어 정면의 아파트 복도를 층층이 훑어 올렸다. 인적은 없었다. 괴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리의 공명은 멈추지 않아서 스테레오와 서라운드 입체 음향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면초가라 했던가. 초나라의 노래로 둘러싸인 항우의 심정은 아니었지만, 그 진동에 휩싸이는 심정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진원지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가. 도무지 감조차도 오질 않았다. 그의 움직임이 아니라면, 그 소리의 메아리침에 내가 속았단 말인가...
청아하면서도 묵직한 울림과 인생의 쓰고 단 맛을 이미 모두 아우르고 있는 소리. 아득히 흩어지는, 모든 공간에 산산이 뿌려지는 애절한 음성.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모든 신경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울림.
"세∼탁."
모든 아파트 주민들은 그에게 세탁물을 맡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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