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최근 한 영화제에서 울리히 자이들 감독의 독일 영화 <파라다이스: 희망>을 보았다. 주인공은 엄마의 권유로 ‘비만캠프’에 입소한 한 ‘뚱뚱한’ 고등학교 여학생이다. 이 소녀는 비만캠프의 중년 의사를 짝사랑하며 그와의 결혼을 ‘희망’하고, 의사 역시 그녀에게 감정을 품지만 이를 제어하기 위해 차갑게 군다.<br /><br /><br />감독은 비만캠프의 ‘훈련’ 과정을 담으면서 날씬한 선생과 뚱뚱한 아이들의 대비를 계속 보여주는데, 뚱뚱한 몸들이 만들어내는 중성성은 그녀와 (삐쩍 마른) 의사 선생 간의 아슬아슬한 감정교류와 대비를 이루며 묘한 감동을 준다.<br /><br />감독은 ‘뚱뚱한’ 여자도 사실은 평범하다는 것을, 그녀의 감정은 그녀의 몸과 달리 중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독하리만치 건조한 스타일로 보여준다.<br /><br /><br />얼마 후 <개그콘서트>의 ‘견뎌’라는 코너를 보게 되었다. 남자가 소개팅에 나왔는데, 기대와 달리 뚱뚱한 여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화를 견디려 노력하다가 결국 폭발하고야 만다. 이 여자가 자신을 소중하게, 예쁘게 여기면서, 남자가 맘에 안 든다고 선언하며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남자가 화를 낼 때마다 폭소를 터뜨린다. 그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br /><br /><br />이 코너를 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뚱뚱한 여자가 자신의 ‘분수’를 모를 때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는 공감대에, 이 여자를 타자화시키면서 웃음을 찾는 개그맨과 관객의 폭력적 감수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u> 한국의 ‘대표’ 코미디라는 <개그콘서트>에서 뚱뚱하고, 못생기고, 사투리 쓰고, 나이 많고, 가난하고, 직업 없는 이들은 쉴 새 없이 웃음거리가 된다</u>. 주변화된 이들을 희화화하는 <개그콘서트>의 웃음과 약자를 혐오하는 ‘일베’의 웃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br /><br /><br /><u>어느 시대든 ‘정상’이라는 기준 밖에 있는 이들은 직간접적 폭력의 대상이 되곤 했다</u>. </div> <div> </div> <div>우리 시대에는 그 기준이 훨씬 모호해지고 세밀해지고 있다. ‘공장’에서의 상품생산에서 ‘삶 자체’의 상품화로 이동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체, </div> <div>감각, 취향, 언어 등 인간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들이 더없이 중요해진다.</div> <div> </div> <div> 문화는 나의 구체적 성공을 위한 중요한 자산이기에, 나는 그것들을 가꾸고 바꾸고 관리하고 전시함으로써 나라는 상품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문화적 정체성을 상품화하는 연예인과 셀레브리티가 우리 시대에 열망의 대상이 된 이유다.<br /><br /><br /><u>오늘날 문화는 그 자체로 경제가 되었다. 뚱뚱하거나, 못생기거나, 사투리를 쓰거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쉽게 희화화되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적 특징이 상품화될 수 없는 그들의 삶,</u><u> 즉 ‘실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u></div> <div> </div> <div>성공에 대한 강박과 실패에 대한 공포가 병적인 한국 사회에서 실패의 이미지를 가진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려는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지고 광범위해진다. </div> <div> </div> <div><u>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이 다른 일부 학생들로부터 ‘지균충’이라 불리며 따돌림 받는다는 최근의 뉴스는 구분짓기의 경계가 상식을 벗어남을 보여준다.<br /></u><br /><br /><u>하지만 ‘인권’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강조는 의도와는 달리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사람들이 ‘너무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u></div> <div>모두가 세상의 법칙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실패해도 사회 대신 나를, 내 부모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div> <div> </div> <div><u> 어쩌면 우리는 문화적 정체성의 관리를 뛰어넘어 ‘우월한 피’, ‘우월한 유전자’를 동경하는 우생학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u>. </div> <div>우생학의 시대에는 외모든 실력이든 경제력이든 ‘넘사벽’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강한 동경이 생겨나고, 그것은 곧 권력관계로 연결된다.</div> <div> 부드럽고 세련된, 동경과 혐오라는 문화적 차이를 통해 지배하는 독특한 파시즘의 시대가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br /><br /><br /><br />문강형준 문화평론가<br /></div> <div><br /><a target="_blank"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07647.html" target="_blank">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07647.html</a> <br /></div> <div> </div> <div> </div> <div>이 기사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사람은 권력관계를 싫어하면서, 권력관계가 존재하기를 갈망한다.라고 보이더라구요.</div> <div> </div> <div>만약에,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긴 외모, 똑같은 직업, 교육, 학벌 등등을 가진다면</div> <div> </div> <div>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똘레랑스 사고방식을 그제서야 가지게 될까요?</div> <div> </div> <div>.</div> <div>작품을 보고, 저건 칭송받아야 옳다. 저건 쓰레기이다. 라고 하는 잣대는 </div> <div> </div> <div>어떤 방식으로 선택되어지는 걸까요??</div> <div> </div> <div>.</div> <div> </div> <div>그리고 제 글을 지금 읽으신 분들은 </div> <div> 우리나라에서 뚱뚱한 남자,여자들은 유죄라고 생각하세요? 무죄라고 생각하세요?</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