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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1539464
    작성자 : 윤인석
    추천 : 21
    조회수 : 643
    IP : 117.111.***.53
    댓글 : 1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12/19 11:36:55
    원글작성시간 : 2017/12/15 21:19:14
    http://todayhumor.com/?humorbest_1539464 모바일
    [창작,단편,비평 환영] 아비
    옵션
    • 창작글

    아비에 대한 첫 기억은 약탕 냄새였다. 아비는 아랫목에 누워 끙끙대고 있었고 어미는 한약을 달이고 있었다. 커가면서 보는 아비는 어미에게 한약을 달이게 하거나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원수 같은 아비는 밖에서 쌈박질하고 와선 자주 앓아누웠다. 괄괄한 성미로는 마을 제일인 터라 상대가 누구든 이길지 질지 생각도 않고 덤벼드는 통에 칼을 맞고 온 적도 몇 번이나 되었다.


    차라리 지고 오는 게 낫지 이기고 왔을 땐 더 문제였다. 그럴땐 합의금이 필요하다고 어미의 패물을 들고 나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않고 속으로 삭이고 삭이다 베개나 나를 부여잡고 눈물만 흘리던 어미였다. 그러던 어미가 마지막 패물이자 어미의 어미에게 받은 산호 비녀를 아비가 들고 나설 땐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이 보오. 그건 아니 되오. 아니 되오.”


    아비가 당황한 듯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보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날 안고 울 때도 울음소리 한번 안 내고 또록또록 눈물만 흘리던 어미였다.


    “에잇. 대장부 가는 길 막는 거 아니다.”


    아비는 결국 어미를 밀치고 나섰다. 어미는 그날 밤도 날 안고 눈물만 흘려댔고 난 아비가 나간 방문을 밤새 아득바득 노려봤다.


    그 뒤로 아비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소문엔 쌈박질을 일삼다가 큰 사당패와 시비가 붙어 다른 지방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일 년이나 지나 갑자기 돌아온 아비는 뻔뻔하게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사나흘 쉬더니 어미에게 물었다.


    “집에 돈이 든 궤짝은 어디에 두었소?”


    아비가 기둥 노릇을 안 해도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하지만 아비가 그 말을 뱉은 후 배를 곯는 집이 되었다.


    어디서 배워왔는지 도박에 미친 아비는 어미와 나의 원수에서 가문의 원수가 되었다.


    도박판에 있던 살림살이를 모두 들이부은 아비는 결국 집안 유일한 수입원인 소작 주던 농지와 심지어 선산 땅문서까지 훔쳐서 도박판에 바치고는 잡아 죽이겠다는 집안 어르신들을 피해 멀리 도망쳐 버렸다.


    돈 없는 세상살이가 시작되었다. 고생 모르던 어미와 나는 버텨나가기 힘들었지만 가엾게 여긴 동네 주민들이 삯바느질이며 밭매는 일이며 여러 일거리를 주선해줘 어찌어찌 살아갔다.


    가장이 없는 세상이지만 비바람 막는 담장은커녕 머리 위에 돌덩이였던 원수가 없으니 그럭저럭 행복한 세월이었다.


    한세월, 두세월, 세월을 팔아 돈을 모았다. 결국 시집갈 패물을 마련했을 때 어미에게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아비를 닮은 구석이 한구석도 없는 사내면 된다고 했다. 정말 그거면 족했다. 어미도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토닥였다.


    옆 마을 총각에게 시집가기 전날 그동안 못 보고 산 아비가 들이닥쳤다. 양 볼이 옴폭하게 들어간 거지꼴의 아비는 싫다는 내 볼을 쓰다듬고 어미 손을 한번 꼭 쥐었다. 그리고 내 패물 단지를 집어 들었다.


    “안되오! 당신이 인간이오. 사람이면 이럴 수 없소!”


    어미는 태어나서 두 번째로 아비에게 매달렸다. 아비는 어미의 마지막 산호 비녀를 들고 가던 그 날처럼 하늘 보며 말이 없었다. 발에 매달린 어미와 그 모습을 노려보는 나는 보이지도 않는가.


    “가져가오. 다만 다시 오지 마오. 죽어서 시체로도 오지 마오.”


    내가 외쳤다. 긴긴 나날 어미가 못한 말과 못 지른 울음 대신이었다.


    아비는 고개를 내려 한참을 나와 어미를 보다 끝끝내 패물을 들고 사라졌다.


    “울지 마오. 사내라면 진저리가 나오. 난 괜찮소.”


    혼사가 깨지고 늙은 어미를 다독여 보았지만, 어미는 그날부로 앓아누웠다. 돌아누워 내게 얼굴을 안 보여도 소리 죽여 눈물 흘리고 있는 건 뻔히 아는 일이었다.


    이듬해 겨울날 밤 몇 사람이 주위 눈을 피해 싸리문을 두드렸다. 태극기를 품고 온 분들이 아비의 죽음을 알려왔다.


    아비는 어미와 내가 총독부에 해코지당하지 않도록 싸움꾼에 도박꾼인 체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간 집안에서 가져간 돈들은 모두 총알과 주먹밥이 되어 독립군에게 갔다고 했다.


    “시체는 어찌하였소?”


    늙은 어미가 물었다.


    “못난 지아비, 못난 아비라 돌아갈 수 없다며 만주에 뿌려 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비는 유품 하나 없이 소식만 돌아왔다.


    어미와 나는 함께 목 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님의 실화를 각색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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