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53<br>무척이나 살랑살랑거리는 날이었습니다. <br>바람도 살랑살랑, 창문 앞 대나무 잎들도 살랑살랑, 집사 마음도 살랑살랑, 그러니 야옹이 마음도 살랑살랑거렸을 겝니다. <br>그 살랑살랑 아른거리듯 흔들리는 뭇 자연의 일체감 속에서, 따스한 햇볕은 수줍은 듯 다가와 유감없이 모든 생명들에게 포근한 기쁨과 평안을 선사하고 있었습니다. <br>참으로 좋은 날이었습니다. <br>창문 밖으로도 봄이 피어나고, 창문 안에서도 봄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br>봄봄봄, 그렇게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br>집사는 그 봄을 타고 흐르는 태깔과 향기에 취해서 나른한 봄 아지랑이처럼 살짝은 몽롱하고 어질거림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br>야옹이 또한 창가에 들러붙어 그 봄이 선사하는 모든 것들을 게으르게 만끽하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br>어떤 영원의 정물화가 우리에게도 하나 선물로 주어진다면, 집사나 야옹이는 바로 이 순간을 그렇게 받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br>살짝 비스듬히 영원을 담고 쏟아지는 햇빛, 살랑거리듯 영원을 쓸며 돌아다니는 바람, 그 햇빛과 바람을 받으며 한순간이 영원인 양 스스로 그러하게 생을 즐기고 있는 온갖 푸나무들, 그리고 그런 그네들이 뒤꼍에서 발하는 그 한순간의 영원으로 초월된 정물화에서, 집사와 야옹이는 그렇게 남아있기를, 그렇게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br><br><br>시나브로 오후가 되어갈수록 빛은 더 비스듬하게 꺾여 들어오며 취해서 붉어진 낯빛을 애써 감춰내고 있었고, 소소하게나마 따스한 대기를 파고드는 바람 또한 약간은 얼근하게 취해서 갈지자걸음을 걷곤 하던 때였습니다. <br>창문 틀에 누워서 게으른 졸음 짓던 야옹이가 어느샌가 벌떡 일어나서는 창문과 방충망 여기저기를 긁고 부비적거리면서 냐옹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br>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가갔더니, 바로 빌라 앞으로 난 쪽길에 회색 냥이 한 마리가 다가와서는 야옹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br>이 녀석은 아마도 자기 구역이 이 근처인 듯싶었는데, 종종 자기 영역을 돌든지, 혹은 심심하든지 하면 이렇게 다가와서 야옹이와 대화를 하곤 하던 녀석이었습니다. <br>오늘도 참으로 대화하기 좋은 날이다, 집사는 마냥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br>하지만 야옹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br>집사야, 평소처럼 저 오라버니?와 대화만 하고 끝내기엔 오늘이 너무 좋은 날 아니냐?<br>오히려, 이렇게 힐난하는 듯하였습니다. <br>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 평소보다 무척이나 오랫동안 그 녀석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집사가, 이젠 안 되겠다., 이 자식이 저 녀석과 오늘 왜 저렇게 말이 많지? 마치 양갓집 규수? 같은 우리 야옹이를 보쌈할지도 모를 저런 족보도 없는 얼치기?와의 대화는 오늘 이걸로 끝내야겠다., 결정하고 야옹이를 창틀에서 떨어내기 위해 잡아 당기는데도 불구하고, 이 자식은 계속해서 냐옹거리며 창틀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그 회색 냥이와의 단절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br>사실, 요 며칠간 이 녀석이 벌려내는 그 발정의 괴로움을 집사는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었습니다. <br>그래서 야옹이의 그 해결 난망한 임신을 이 회색 냥이가 좀 자연적인 방식으로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br>아니면, 이제는 그 녀석이 조금씩 빌라 안에서나마 산책도 하겠다, 그러니 자연이 장대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오늘 같은 날, 한 번 실전훈련 삼아 밖에서 산책을 시켜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r>아니면, 아릿거리듯 비실비실 타고 오르는 봄기운에 지펴서 집사 또한, 그 누구처럼 태양이 쏘게 했다는 식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r>그래서 순간적으로, 이제는 나도 지쳤다 이 자식아, 너 좋을 대로 해라,는 식의 무데뽀만 머릿속에 치받혀서는 그 녀석을 밖으로 홀가분하게 내던져버릴 좋은 기회가 생겼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r>그 어느 이유나 핑계든지 간에 집사의 다음 행동을 정당화시킨 이 목록들은, 그러니까, 일정 부분 -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 분명한 타당성과 실천성을 담보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br>왜냐하면, 집사는 버둥거리며 반항하는 녀석을 창틀에서 억지로 떼어놓은 다음, 일말의 주저나 망설임 하나 없이 바로 그 녀석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것입니다. <br><br><br>빌라 입구에서 집사는 야옹이를 무람없이 내려놓았습니다. <br>바로 한 샛길의 옆에서는 그 회색 냥이가 엉거주춤 거리며 놀란 듯 우리들을 바라보았습니다.<br> 도망가야 되나, 계속 지켜봐야 되나 순전히 우리들의 행동을 주시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습니다. <br>그런 와중에, 야옹이는 갑자기 변한 환경에 또 스리슬쩍 길치에다가 겁쟁이로 돌변해가고 있었습니다. <br>항상 낯선 환경에 두면 변하던 패턴이었던지라, 집사는 괜시리 걱정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br>차라리, 이 시도가 이 녀석의 또 다른 적응 실패로 귀결된다면, 결과론적으론 저도 얌전해진 채 집사의 골방을 다시금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로 되새길 것이 분명했으므로, 야옹이도 좋고 집사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을 재연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br>하지만, 웬걸 오늘은 달랐습니다. <br>잠시는 예전 같은 모습을 보이더니만, 갑자기 그 회색 녀석을 따라 저쪽 샛길로 쪼르르 달려나가는 것이었습니다. <br>달려나가는 폼이 아직도 엉거주춤, 그 뒷발의 상흔이 역력히 남아있음을 싸아한 아픔으로 씹고 있을 집사는 정작 모르쇠로 일관하고서, 녀석은 저쪽으로 달려가더니 그 자식과 나란히 하고 어느샌가 서로 뽀뽀를 해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br>사실, 가서 말려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이젠 그 녀석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습니다.<br>무엇보다도, 혹시나 그 녀석이 멀리 달아나거나 도망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br>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이 그 녀석들 가족이 줄곧 살아오던 영역이고, 그 회색 냥이조차도 이 집사가 사는 빌라 바로 앞이 자기 영역이었던지라, 다른 고양이나 적들을 피해서 멀리 도망가거나 달아날 필요는 없을 거라 무심결에 생각하였던 것입니다.<br>그냥 단순하게, 회색 냥이랑 같이 그 영역 안에서 잠시 놀다가 돌아오거나, 혹시라도 임신까지 해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br>그리고 만약의 경우, 최소한 돌아오진 않더라도, 나중에 찾으러 가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였던 것입니다. <br>집사는 아직도 야옹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style="text-align:left;"><img width="800" height="450" class="chimg_photo" style="border:medium;" alt="IMG_1291 0000017067ms그림.png"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704/1491474615e1b6ed2542024fe2922f5b222b994b6a__w1440__h810__f141524__Ym201704.png" filesize="141524"></div></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사실인즉,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고양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마샬 토마스 -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