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南北朝) 시대 병사들의 모습 뛰어난 정치감각으로 국내에서의 평안을 이루는데에 성공한 무제(武帝) 소연(蕭衍)은 이제는 국외로 눈을 돌려 대외정벌에 나서는데 그때 시기가 506년 되겠습니다.
통상 상대는 화북의 북위(北魏)였고 남조(南朝)의 앞선 왕조들에서도 수없이 북위를 도모했듯, 양(梁)나라 역시 북방에서의 땅따먹기를 위하여 북벌을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 경로를 살펴보자면, 조중종(曹仲宗)이란 이를 총사로 삼고 강주자사(江州刺史) 왕무선(王茂先)에게 옹주(雍州)로 진출하여 만족(蠻族)을 포섭하여 벌위(伐魏)의 뜻을 함께하는 한편, 완주자사(宛州刺史) 뇌표랑(雷豹狼)에게 하남(河南)을 점거하게 하고, 마지막으로는 장혜소(張惠紹)란 사람에게 숙예(宿豫)로 나아가게 하니 대략 세갈래에 걸친 공략이었다 하겠습니다.
당시 북위의 황제는 선무제(宣武帝). 양나라의 침공소식에 선무제는 동생인 중산왕(中山王) 원영(元英)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이란 직책을 내려 총사로 삼고 도전에 응합니다. 하지만 전황은 양나라에 이롭게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거듭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산왕 원영의 부장으로 있던 북위의 맹장(猛將), 양대안(楊大眼)이란 장수에 의하여 번번히 격퇴당했던 것인데, 이 양대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맹장이라 소개했듯 무(武)에 뛰어난데다 전략에도 능통하여 소위 말하는 문무를 두루 겸비한 명장(名將)이었다 하겠습니다. 뭐 번외 이야기지만 이 양대안의 당시 위명을 조금이나마 엿보자면, 이후 양(梁)은 물론 남조(南朝)에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췄다고 하니 그 명성도 알만하다 하겠지만 저는 우선 삼국시대 장료(張遼 : 소위 말하는 遼來來로 우는아이의 울음그치게 했다는 그 분..)가 생각나네요.
북위(北魏)의 명장(名將), 양대안(楊大眼). 그 용맹은 관우(關羽), 장비(張飛)에 비교되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오른쪽 말탄 장수가 양대안, 왼쪽의 싸우는 이는 양(梁)나라의 장수, 조초(趙草)란 사람이다. - 다나카 요시키 作 소설 '분류'에서의 그림 아무튼, 그 대단한 양대안의 활약에 힘입어 북위(北魏)는 여러갈래로 나뉘어 쳐들어온 양군(梁軍)을 모두 막아내고 오히려 당시 회북일대에 근거해있던 양(梁)나라의 성 5개를 공략하는 등 선전했으나 이도 잠시, 양나라의 명장이었던 위예(韋叡)가 합비(合肥 : 오늘날 중국의 안휘성)를 수공(水攻)으로 점거하는데에 성공함으로서 전세는 다시 역전됩니다. 합비는 그동안 북위(北魏)의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화남의 남조(南朝)와 국경을 맞대던 접경지대인 양주(楊州)의 관할지로,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지던 곳이었는데 그 합비가 양나라에 의해 점령당했다라는 말은 북위의 수도, 낙양(洛陽)으로의 길이 뚫렸다라는 것은 물론 그 합비를 거점으로 그 주변일대의 주(州)와 고을이 모두 공격범주에 놓였다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건 뭐 여담입니다만 옛날 삼국시대 때 오(吳)의 손권(孫權)이 그렇게 먹으려던 곳이 바로 합비고 그런 손권을 막아내었던 위(魏)의 장수, 장료(張遼)가 이름을 날리던 곳도 바로 합비입니다.
양(梁)의 합비(合肥)공격. 합비는 강남의 입장에선 중원(中原)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이었고 화북에서는 그 강남의 침입을 제지할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런고로 옛날 삼국시대에는 위(魏)-오(吳)의 주요전장이었고 5호 16국 시대에는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비수대전(淝水大戰)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는 북위(北魏)-제(齊)의 구도이나 이후 양나라의 영토와 차이가 거의 없으므로 그냥 봐도 무방함. 아무튼, 합비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무제 소연은 기세를 몰아 자신의 동생, 임천왕(臨川王) 소굉(蕭宏)에게 대군을 주어 합비를 진수하고 있던 위예를 후방지원 해줄 겸, 낙양을 치고자 다시 북정군을 보냅니다.
소굉(蕭宏)은 수양(壽陽 : 합비 근처)이란 곳에 이르러 당시 수양을 지키고 있던 북위(北魏)의 평남장군(平南將軍), 진백지(陳伯之)란 장수를 회유하여 수양성을 얻는 등, 나름 전공을 세우며 기세등등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북위(北魏)의 중산왕(中山王) 원영(元英)이 요격나옴으로서 또 상황은 달라지게 됩니다.
당시 북위군(北魏軍)의 군세는 양군(梁軍)보다 우위였고 뭣보다 북위로선 전장이었던 양주(楊州)에서 패하면 곧장 수도 낙양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결사항전의 태세로 임하고 있었기에 사기가 충만했던 것이 충분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고, 소굉의 입장에선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전쟁에 임하면서 무릇 그 우두머리가 된 자가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하겠지만 문제는 소굉이 신중함을 넘어서서 두려움을 느끼고 소극적이 되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말씀드렸듯, 당시 북위의 군세가 압도적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한 공포가 아니었나 싶네요. 여튼 그 두려움은 북위의 선봉장, 형만(邢滿)이란 장수가 싸움을 걸어오는 것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이를 보다못한 수하참모 여승진(呂僧珍)이 차라리 뒤로 물려 후퇴하자고 권하지만 소굉은 이에 동의는 했으나 이마저도 행여나 뒤로 물리는 사이 기습당할까봐 시행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편, 북위 측에서도 양군(梁軍)의 그러한 실태를 눈치채고 놀려먹듯 노래를 지어 도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不畏蕭娘與呂姥 ,但畏合肥有韋虎". 해석하자면 소(蕭)씨 아가씨(娘)와 여(呂)씨 할멈(姥)은 무섭지 않은데, 다만 합비(合肥)에 있는 위(韋)씨 호랑이(虎)는 무섭다라는 내용으로 즉, 소씨 성 가진 아가씨란 소굉을, 여씨 성 가진 할멈은 위에서 말한 여승진을 빗대어 말한 것으로 당시 겁먹고 안절부절하는 양군(梁軍)의 꼴을 여자와 늙은노인에 비유하며 모욕했던 것이고 반면 합비의 위씨 성 가진 호랑이는 역시 위에서 언급한 위예(韋叡)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 외에도 꽃을 수놓은 모자를 보내었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양군(梁軍)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고 있었던 것이죠. 자존심에 먹칠당한 여러장수들과 병사들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소굉에게 한판 싸움을 벌일 것을 청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큰 모욕을 당한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굉은 오히려 크게 화내며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목을 베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욕을 먹어서 그런지 양군(梁軍)의 기세는 크게 올라 있었기에 제법 해볼 만한 전투였는데도 말이죠.
한창 달아오른 아군의 기세를 스스로 꺾어버렸던 소굉은 얼마 후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패인(敗因)은 역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밤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소음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소굉은 그 소리가 북위군이 야습을 감행하여 낸 함성소리라 생각했다 합니다. 뭐 대응하기는 커녕 제 한몸 살고자 냅다 도망갔다하니 결국엔 실제로 북위군이 공격해와 총사를 잃고 우왕좌왕하며 도망가던 양군(梁軍)의 뒷덜미를 후려치니 그 전사자가 5만을 넘었다는 기록입니다.
결과적으로 무제 소연의 그 첫번째 북벌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