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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363757
    작성자 : 고려노총각
    추천 : 49
    조회수 : 1582
    IP : 182.210.***.204
    댓글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6/17 16:41:25
    원글작성시간 : 2011/06/16 22:30:17
    http://todayhumor.com/?humorbest_363757 모바일
    매국노 특집 5편 -김활란金活蘭 신석호申奭鎬 이화여대 강단사학계

    김활란(金活蘭, 창씨명 天城活蘭, 1899∼1970)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교육·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꼽혀 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학사협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YWCA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부 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다. 이렇듯 여성명사의 대열에서 김활란은 빼놓을 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교육·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 말기에는 교육·종교계 인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친일 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물론 일제하애서 그가 범한 반민족 행위 때문에 그의 공헌, 그에 대한 찬사가 모두 거짓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반동강이의 우리 국토, 반공 국시를 지키기 위해 왜곡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온 찬사란 점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단문제가 한창 논의될 때 나온 {친일파군상}에서는 김활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28년 근우회에서 활동을 끊은 후 주로 종교단체활동만을 계속하다가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박사학위를 받아 '여성박사 1호'로서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했을 때 민족해방운동의 양상은 크게 변해 여성계의 경우 근우회가 해소된 반면, 사회주의계 여성들은 노농조직 등에서 여성부를 조직하고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여권론을 주장하던 여성들은 종교단체나 민족개량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활란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농촌사업을 벌였다. 박사논문의 주제가 농촌교육이었고 이화여전에 농촌사업가를 양성할 과를 두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 방향을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요한 지식획득,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자립, 봉건적 인습 타파, 의복개량 등에 두고 있었다. 

    이들의 운동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활발하게 일어났던 브나르도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가면 그들의 개량적 시도는 농촌진흥운동에서의 개량적 구호, 예를 들면 문맹퇴치, 금주·금연, 절약·저축, 미신타파 등의 구호와 접근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활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비타협적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여성해방도 민족해방 위에서만 꽃 필 수 있었음에도 점차 두 과제를 분리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일제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 교파마다 그리고 각 학교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장로교계에서는 학교 폐쇄를 불사하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광주 수피아고녀, 숭일고 등은 폐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김활란이 몸담고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각종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응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활란이었다. 

    그가 저지른 친일행각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조만간 맡을 가능성이 엿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孫貞圭)와 더불어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애국금차회는 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였다. 애국금차회의 사업은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銃後家庭)의 위문', '총후가정의 조문(弔問)', '일반가정부인에 대한 시국인식의 강화·철저와 국방헌납과 황군위문금품의 헌납' 등이었다. 

    이후 그는 이와 같은 목표를 둔 단체나 활동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출정가족 간담회'({매일신보}, 1937. 10. 6)에 참가하는 등 친일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의 김활란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제하라는 조건에서 합법적인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국금차회에 가담한 시기부터는 
    민족역사상의 분명한 반민족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중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학교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 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그는 그날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이지 아니하면 안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동맹을 탈퇴……하고 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매일신보}, 1938. 6. 9)라는 발표를 하고 있었다. 1941년경에 가면 결국 활동이 중지될 것을, 이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단체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 때 지방 YWCA에서 활약하던 인물 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여 사회적 지위에 초연한 태도를 취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 YWCA를 구상하고 탄생시킨 김필례(金弼禮)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김활란의 친일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 섰다. 당시 일제는 중등과정의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교복을 입게 했지만 전문학생의 경우는 학교의 재량에 이 문제를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언론({동아일보})과 학생·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매일신보}, 1939. 1. 18, 19) 

    이렇듯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인 교장 자리를 맡기 전부터 너무 많은 친일 행위를 했기에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친일을 했다'라는 정도의 면책조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김활란이 교장이 된 데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이화고녀, 배재고 등 선교사가 경영하던 학교의 교장이 조선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어도 아펜젤러 교장이 물러나는 것에 대해 이사회 내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김활란이 교장이 되는 데는 당시 이사였고 선교사 대신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배재 교장이 된 신흥우(申興雨)의 힘이 컸다고 한다(최규애, {참다운 크리스챤 김활란 여사}, 나랏말 출판사, 1991, 91면). 김활란이 1939년 4월 정식 교장이 되면서부터는 일제에게 굴복하면서도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민족사에서 학교가 해야 할 많은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1년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그는 후에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에서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 중의 하나가 1943년말 전시비상조치방책으로 이화전문학교가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된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이렇게 말하였다.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25)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연성과로 바뀌어, 기존 학생들에게는 3개월간의 교육을, 신입생에게는 1년간의 교육을 시켜 전조선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로 배치하여 농촌여성을 계몽한다는 일제의 방침대로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 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들도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후배들은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있었다. 아무리 자기 본심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동보다는 껍데기뿐인 이화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그가 조선 민족을 향해 내뱉은 그 숱한 반민족적 연설·글·방송을 어떻게 주어 담을 것인가.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들의 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은 커녕 안면몰수한 친일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만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주의를 낳게 했다. 김활란과 같이 교육계에 있었던, 특히 서울의 여학교 교장----황신덕*, 송금선, 이숙종, 신봉조, 조동식, 배상명----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길을 갔다. 교육계에 종사한 이들의 친일행위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저 보고 따르는 스승이었기에 악영향은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것이었다.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진실로 반성하는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친일한 많은 이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남겼지만 대부분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지도 모르겠다. 


    반공전선에 서서 활동을 계속 


    8·15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민족이 분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합법공간에서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자 어제 '적국영미'(敵國英米)를 외치던 이들이, 이제는 기독교인이며 영어를 구사한다는 장점을 이용하여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청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 커녕 항일운동가들을 고문·탄압하던 자들까지 그대로 인수받아 그들에게 권력을 남용할 기회를 주었기에 친일 지식인들의 군정청 접근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 김활란은 이화전문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미군정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8·15 직후에는 사회단체 활동에 별로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1946년 반탁운동이 고조될 때 그도 우익계열의 독립촉성중앙부인단에 참가하는 등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민정 이양시기에 그를 보호하고 그의 지위를 유지시켜 줄 정치세력으로서 이승만을 선택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비난하지 못하였으나, 
    8·15 이후가 되면 냉전논리와 자본주의국가 건설이라는 사회상황에서 이제는 정치이념적으로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여 반공단체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제헌의회 선거에 여성의 정치진출을 강조했던 당시 여성계의 입장에서 김활란도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한부인회 대표로서 나온 이 선거에서 낙선은 했지만 그의 
    정치적 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고 그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확고하게 자리잡혀 나갔다. 

    경찰이나 군대·행정기관에 소속되어 직접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이들과는 다르지만, 문화·교육가로서의 역할이 결코 가벼울 수는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반민족적 행위를 범한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이렇다 할 반성의 말 없이 갔고, 현재의 우리는 여성계의 대모로서 그를 인식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그를 근우회 활동의 중심인물 내지 회장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근우회 활동에서 도중하차했을 뿐이다. 

    일제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한 이보다 어떠한 이유든 간에 강자의 압박에 못이겨 굴복한 이를 우리는 더 널리 알고 추앙해야 할 인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제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긍지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 강정숙(영남대 강사·여성학) 

    ■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김옥길, {김활란 박사 소묘}, 이화여대출판부, 1959. 

    -추가 자료 :: 추악한 그녀의 행동으로 인하여 위안부들의 심각한 피해가 초래하기 시작하였던 날은 1939년 4월부터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일제의 황민화교육정책에 철저히 순응하였으며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 강연과 징병제 실시 환영 담화발표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기고 등 일본군국주의체제를 고무 찬양하는데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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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호(申奭鎬 1904~1981)
    친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1934 진단학회 발기 
    1945 국사관 관장 
    1949 문교부 편수국장, 고등고시 위원 
    1951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1958 한국사학회 이사장 
    1963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 대한민국문화훈장(대통령장) 수상 
    197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신석호는 한국 사학계의 거두로서 사망 직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들어가서 꾸준히 활동해서 해방되던 당시에는 수사관(修史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이병도(李丙燾), 김상기(金庠基)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 양성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창설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영남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 밖에도 수많은 요직을 거치면서 한국 사학계의 제1인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는 친일 인사로서의 반민족적 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친일파 처리 문제의 실패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으로 인하여 신석호는 한국사학계의 권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친일인사들처럼 군국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거나 강연회를 통해 민중을 현혹시키거나 하는 가시적인 행위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일종의 연구보국(硏究報國)으로서, 식민사관 창출에 일조함으로써 우리의 민족성을 근저부터 흔들어 놓았다. 역사의 왜곡은 물질적 수준인 착취의 범위를 뛰어넘어 민족 그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해방은 왔고 그는 과거의 행적에 대해 죄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고, 신석호 자신도 이 문제를 덮어 버렸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학계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한국현대사를 장식했던 독재정권은 그에게 권위자로 군림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 식민사관의 주역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인 견지에서 정당화하려 했으니, 이러한 필요에서 나온 관점이 식민사관이다.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타율성론과, 왕조의 교체 등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정체성론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제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조선사편수회이며, 그 대표적 성과물이 《조선사》라는 저서이다. 신석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서 《조선사》 간행에 적극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사(총35권, 1938년 완성)》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사》 편찬의 실무책임자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동아일보』1925년 6월 13일자 신문에서 "한국은 동양 화란(禍亂)의 원천이 되어 있던 고로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병합된 것이니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라고 편찬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목적에 맞춰 나온 편찬요강 중 하나가 편년체(編年体)이다. 일본은 《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주는 편찬 체제가 바로 편년체였던 것이다. 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적인 목적은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 데 있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조선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았던 삼국시대 이전 시기를 왜소, 왜곡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다. 실제로 《조선사》에는 이러한 목적이 관철되었다. 신석호, 이병도 등 당시 친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사편수회는 사서 편찬을 이유로 자료를 독점하여, 군국 일본의 의도대로 취사선택해 《조선사》를 간행했으니 식민사관의 온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 설치 초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소재 대학 출신들이 직원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경성제대가 설치된 이후로는 이 대학 사학과 졸업생들이 주로 충당되었다.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신석호는 1929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조선사편수회 촉탁(囑託)으로 기용되었고 1930년에는 수사관보, 1937년에는 수사관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시기의 사회 여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중반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편찬을 기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에서는 이 사건을 최후의 정신적 파탄으로 간주하고 공정한 사서의 편찬을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인에 의한 역사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민족주의 사가들의 저술을 연재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최남선이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하자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가 울분을 참지 못했다는 일화는 이미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1929년 신석호의 조선사편수회 가입은 그의 역사 의식 결여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신석호는 친일학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경성제대와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이 중심이 된 친일학회 청구학회(靑丘學會)가 1930년에 조직되는데, 신석호는 여기서 위원직에 있으면서 실무를 담당했고, 학술지 『청구학총』에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연구보국에 힘쓰면서 식민사관의 창출에 직접 관여하여 우리 민족의 소멸에 일조했던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창립의 주역

    8․15해방은 신석호의 신변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총독부 역사왜곡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이병도 등과 함께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원을 양성하였다. 역사를 왜곡했던 장본인이 바로 그 지식으로써 새로운 국가의 국사교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 국사관의 관장이 되더니만,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3월에 이를 국사편찬위원회로 개편 조직하여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였다(1965년 퇴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위원장을 겸임했으므로 사무국장인 신석호가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1958년 12월 이승만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석호 등을 경무대로 불러,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우리 역사상 독립정신이 어려있는 사실을 구명(究明)하여 표준될 만한 학설을 세워 왜곡 선전된 것을 시정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1960년 4월까지 전체 6권의 《국사상의 제문제》라는 저서를 간행했다(《국사편찬위윈회사》, 235~236쪽).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보면 신석호를 위시해 조선사편수회에서 역사왜곡의 주범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목하에(그것도 독립정신이 어려있는 사실의 구명이라는 면에서) 《국사상의 제문제》를 간행했던 것이다. 이들에게 이것을 주문한 이승만이나, 양심의 거리낌없이 선뜻 이 작업에 착수했던 그들이나 모두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1961년에는 일제하 항일운동에 참여한 순국선열과 생존 지사에 대한 포상 계획이 확정되고, 그에 따른 공적 조사 업무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넘어감으로써 아직도 우리의 역사는 친일인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1962년부터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편찬 계획에 들어가기도 했으니 이래서 나온 책이 《한국독립운동사》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이와 같은 사업은 모두 신석호가 책임자로서 사무국장에 재임하고 있던 시기(1965년 퇴직)에 이루어졌다. 신석호뿐만 아니라 당시 그곳의 고위직은 대부분 친일인사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은 아직도 완전히 가셔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신석호 등 식민사관의 주범들에 대한 완전한 구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오류는 하루바삐 시정되어야만 한다. 구체적인 예로 여기서는 신석호와 관련하여 한 가지를 지적해보고자 한다.

    현재의 국사편찬위원회는 과거야 어떻든 간에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국사학 관련 기구이다. 그런데 1990년 이곳에서 나온 《국사편찬위원회사》를 보면 어이없는 기록이 있다. 직원 명단의 재직기간을 보면 조선사편수회의 경력도 포함하고 있다. 신석호로 예를 들어 보자면, 역대 사무국장 명단에서는 그의 재임 기간을 '(1929.4) 1946.9~1965.1.21'로 표시하더니, 역대 퇴직(전출)자 명단에서는 그나마 괄호도 없애고 '1929.4~1965.1.21'로 적어놓고 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이것만 놓고 본다면, 국사편찬위원회는 식민사관의 온상이었던 조선사편수회의 직접적인 연장이란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잘못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 민족의 근현대 역사학은 식민사관의 극복과 궤를 같이 하여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아직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의 부정과 극복이 아닌, 연장선으로서의 국사편찬위원회라고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기록은 하루바삐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 정권에 밀착한 민족주의자(?)

    위에서 우리는 신석호가 일제에 의해 왜곡된 한국역사를 바로잡고자(?) 활동했던 것을 보았다. 그 예의 하나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간행된 《한국독립운동사》에 적극 참여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국사편찬위원회의 명의로 간행된 것이었다면, 다른 곳에서는 신석호 자신이 직접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새벽』1955년 1월호에 실린 「국난극복사-대일투쟁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을 다루더니, 1955년 12월 『사총』1호에 실린 「한말 의병의 개황」에서는 본격적으로 근대의 항일투쟁을 다루고 있다. "의병의 충의(忠義)는 실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1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연구 발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이 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유야 그럴듯하지만, 식민사관의 주역이 항일의병을 다룬다니 말이 안 된다. 그러더니 1962년에는 자신이 역사왜곡에 몰두할 때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사들을 다뤄 『양지』에 「합방 이후의 항일투쟁」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친일파가 재등장하여 주요 요직에 두루 참여하자 신석호도 본격적으로 민족사학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학술활동 이외에도 신석호는 민족주의자로 행세한다. 1954년에는 민충정공 기념사업회 이사로 임명되어 1959년에는 민충정공 영환신도비문을 직접 짓는다. 1955년 5월에는 애국가 작사가 조사위원으로, 1958년에는 독립기념사업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에는 이준열사 사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더니 1963년에는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피선됨으로써 명실공히 민족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친일인사인 그가 1962년부터 1968년까지 독립유공자를 선정하기도 했고, 1980년에 다시 한 번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제 신석호는 식민지시대 항일운동의 평가자로 나서면서 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한국사학계의 거두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그가 이렇게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권과의 밀착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권 당시 신석호는 정부가 필요로 한 국사관련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예 외에도 문교부 편수국장, 국기(國旗) 시정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더니,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군본부 전사감실 편수관, 육군대학 강사 등을 두루 거쳤다. 전쟁 후에도 이승만 정권이 가장 친애하던 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요직에 기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박정희 군부독재가 등장하자 신석호는 역시 정권에 영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

    먼저, 그의 화려한 경력 중에서 군부독재와 직접적인 밀착 관계를 드러낸 것을 보면, 1961년에 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3년에는 한국군사혁명사편찬회 고문으로 피선되는 등 화려한 활동을 보여 주더니,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8월에는 박정희로부터 직접 대한민국문화훈장(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밀착해 활동했던 신석호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재빨리 이승만을 비난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정희의 집권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선전하는데, 이것이 잘 드러난 경우가 1962년 『최고회의보』 9호에 실린 「6․25와 우리 민족의 방향-반공특집」이다.

    이 글에서 신석호는 먼저 6․25 발발의 근본 원인을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제패 야욕에 두고, 반면에 미국은 '자유스럽고 살기 좋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주한 것'으로 보고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조선 왕조 후반기 약 3백년간 당파싸움으로 사회가 부패하여 결국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해나가야 할 터인데 해방 직후부터 민족 진영은 사분오열하여 서로 헐뜯고 정권과 이권을 획득하기에 혈안이 되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유아독존의 망상에 사로잡혀 국민을 무시하고 독재 정권을 수립하기에 급급하였고 … 4․19혁명으로 인하여 …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그들도 또한 부패하고 부정 불법을 감행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유당보다도 무능하여 공산간첩과 용공주의자들이 판을 쳐도 수수방관하여 대한민국의 장래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으므로 박정희 의장을 중심으로 한 국군장병이 일어나 5․16군사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59~61쪽).

    이와 같이, 신석호는 이승만 정권과 밀착 관계를 유지하다가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 끝나지 않은 역사의 심판

    신석호가 아무리 민족주의 사학자로 해방 후 행세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가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가입하여 친일행각을 벌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 점은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서도 남아 있었다. 이 점에 관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석호에 관련한 여러 기록을 보면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해명은 없고, 면죄부라 간주되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우리 역사학계는 일제의 패전 직후 그들이 강점 소유하고 있던 귀중한 민족사료의 파괴와 반출을 막고 보존하여야 할 시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명의 뜻있는 인사들이 이를 위하여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 그 좋은 예가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고 있던 신석호, 김건태 양씨의 희생적인 노력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사》, 56쪽).

    이 '희생적인 노력'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공사관 기록의 사진 원판 4만 4천 매와 기타 중요 사료를 대피 보관하여 학계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의의있는 일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석호의 행위가 근 15년간 식민사관의 창출에 일조한 그의 친일행위를 정당화시켜 주거나, 혹은 그 죄값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의 친일행위는 그것대로 객관적으로 구명되어져야만 할 것이며, 그가 중요 문서를 보존했던 행위는 그 행위대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행위는 과대포장되어 평가되고, 친일 부역행위는 일방적으로 은폐되었다는 데 한계가 있다. 앞서도 보았듯이 1960년대까지 신석호는 전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1970년대에 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일제의 만행과 그 처리 문제 등을 언급한다.

    여기서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은 36년간에 걸친 일제 식민지 통치가 남긴 유산을 정리해 보는 일이겠지요. … 또 하나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해외교포의 귀환이라든가 친일파의 처리 문제 등으로 우리 민족을 커다란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언어를 말살하고 창씨개명, 동방요배(東方搖拜) 등을 통하여 민족정신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유산은 많이 열거할 수 있지요(「한국과 일본의 좌표」, 『세대』, 1970년 8월호. 밑줄-필자)

    일제가 남긴 유산을 정리해야 하고, 친일파 처리 문제도 남아있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신석호를 누가 친일 인사였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을 말하는 대목에 와서는, 그가 식민사관의 주범이었다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어쨌든 일제 시대부터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정권은 여러 번 뒤바뀌었지만, 신석호는 내내 역사학계의 거두로서 행사했다.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그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 행적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근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걸음마 단계이다. 식민사관에 봉사했던 인사들의 행적과 그들이 남긴 역사의 왜곡을 완전히 구명하고, 잃어버렸던 역사의 진실을 찾을 때만이 우리 민족의 비극은 마감될 수 있을 것이다.

    ■ 윤재식(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국사상의 제문제》, 1960.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사》, 1990. 
    김성민, 「조선사편수회의 조직과 운용」, 국민대 석사논문, 1987. 
    이우성 외, 《한국의 역사인식》하, 창작과 비평사, 1979. 
    정운현․김삼웅, 《친일파》2, 학민사, 1992.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시인사, 1986. 
    신석호, 「국난극복사-대일 투쟁편」, 『새벽』 1955. 1. 
    -----, 「합방 이후의 항일 투쟁」, 『양지』, 1962. 7. 
    -----, 「한국과 일본의 좌표」, 『세대』, 1970. 8. 
    -----, 「한말 의병의 개황」, 『사총』1, 195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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