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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363452
    작성자 : 고려노총각
    추천 : 35
    조회수 : 1966
    IP : 182.210.***.204
    댓글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6/16 12:42:53
    원글작성시간 : 2011/06/16 06: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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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국노 특집 4편 -현준호玄俊鎬 방응모方應謨 현대그룹 조선일보

    현준호(玄俊鎬),1889~1950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1925년 호남은행 대표취체역, 1930년 중추원 주임 참의
    1938년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1923년경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등 이른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던 많은 이들이 내세웠던 것은 $조선민족은 아직 독립할 만한 실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아직은 독립운동에 앞서서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실력양성의 가장 중요한 부문으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 특히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본의 육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
    운동은 불과 1년도 못 가 그 열기가 시들어 버렸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 민족이
    독자적으로 실력을 기른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산장려운동 등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이들 실력양성론자들은 일제와
    타협하면서 정치적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점차
    자주독립의 지향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일제지배하에서 자본주의적인 근대화를 우선 추진한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으며, 1930년대 말 이후에는 마침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친일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전락한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들로 꼽히는 것은 물론 경성방직--동아일보
    그룹이다. 이 그룹은 또 전국적으로 같은 지향성을 갖는 이들과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호남 현지에서 이들과 노선을 같이 하고 있던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물론 현준호일 것이다.

    현준호는 한말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 등과 담양 창평의 영학숙에서 같이
    공부하였으며, 1910년대에는 동경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역시
    같은 시기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현상윤,
    최두선, 김병로, 백관수, 신익희, 김준연 등과 교유를 나눈 바 있었다. 이들
    가운데 현준호는 특히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 등을 통해 김성수, 송진우
    등과 깊은 관계를 가졌고, 이후 이들은 같은 인생행로를 걸어갔다.


    부친 현기봉의 두드러진 친일 성향


    현준호는 1889년 전남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서 현기봉(玄基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씨 집안은 현준호의 증조부대에  천안에서 영암으로 옮겨왔는데
    어떤 경위로 가세가 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준호의 조부대에 이미
    3천 석의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현기봉은 영암군의
    향교장의(鄕校掌議), 영암군 향약소 도약장(鄕約所 都約長)을 지내는 등
    재부와 사회적 지위를 겸하여 영암 지역에서 유지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05년 일본의 @조선보호국화#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의병들의
    부호에 대한 자금지원 요구가 잇따르자 이를 피해 일본경찰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목포로 이사를 했다. 이후 그는 무안부 민단장(務安府 民團長)을
    시작으로 영암군 사립구림학교장, 무안군 잠업전습소장(蠶業傳習所長),
    목포신흥철공주식회사 사장, 광주 농공은행 취체역(農工銀行 取締役), 목포부
    참사(木浦府 參事), 명치신궁봉독회(明治神宮奉讀會) 조선지부 위원, 목포부
    무안군연합 물산품평회 협찬회부회장,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제국군인후원회
    특별회원, 목포사립유치학교장, 경성해동물산주식회사 사장,
    목포창고주식회사 사장, 전라남도 참사(參事, 1919년), 전남
    도평의회원(1920), 전라남도 산업조사위원(1921), 중추원 주임 참의(中樞院
    奏任 參議, 1924) 등을 차례로 지내는 등 경제계와 관변에서 폭넓은 활동을
    보였다.

    1910~1920년대의 시점은 일제가 조선인 유지계급들에게 특별히 친일을
    강요한 시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관변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
    것은 당시의 시점에서 그의 친일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그가 참여한 부 참사, 도 참사, 도 평의원, 중추원 참의 등이
    특별한 권력을 부여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이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자리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나가는 데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기봉의 친일적 성향을 잘 보여 주는 것은 1919년 각지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주, 무안, 제주 등 전남 6개군을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종용이 있었다고 해서 이 지역의
    주민들이 만세를 안 부를리 만무했지만 어쨌든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종용하고 다닐 정도였다면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친일적 행각이었다고 할
    것이다. 현기봉은 1924년 사망했다.


    현준호의 은행경영과 친일의 길


    현준호는 앞서 본 것처럼 1906년 창평 영학숙(昌平 英學塾)에서 잠시 공부한
    뒤 서울로 가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2년에는 도쿄로 가
    메이지대학 법과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귀국한 그는 1918년부터는
    @조선인은행# 설립을 꿈꾸고 이를 준비하던 중 3|1 운동을 만나게 된다. 그는
    2월경 그의 옛 동료들인 송진우, 현상윤 등이 3|1 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으나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3|1 운동의 여파가 지나간 4월 부친
    현기봉의 해동물산주식회사 창립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7월에는 마침내
    호남은행의 설립을 발기했다. 호남은행이 창립된 것은 1920년 8월이었으며,
    현준호는 여기서 전무취체역을 맡았다. 이후 호남은행은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목포, 순천 등지에 지점을 내는 등 운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다.
    그리고 1925년에 그는 마침내 호남은행 대표취체역을 맡았다.

    한편 현준호는 1923년 서울에서 시작된 민립대학기성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는 경성에 중앙부, 각 지방에 지방부를 두어
    모금운동을 폈는데, 지방부의 경우 대부분 그 지방의 유지, 부호들로써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의 부친 현기봉도 광주군 지방부의 집행위원장을
    맡았으며, 현준호는 5백 명분의 입회금을 냈던 것이다.

    이같이 이른바 민족자본의 육성과 민립대학의 육성 등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자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  1920년대 초의 현준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개량주의적인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그는 이러한 운동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또 부친이 사망한 뒤인
    192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일제에 밀착되어 간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전남 도평의회원이 되었으며, 1930년에는 중추원 주임 참의가 되었다. 이같은
    그의 총독부 권력에의 접근은 호남은행의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1930년대 들어 각 지방의 조선인 은행들이 합병되어 갈 때, 대표취체역
    현준호가 이끄는 호남은행은 1933년 오히려 동래은행을 합병하여 그 기반을
    더 튼튼히 다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현준호는 1933년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으며, 1936년에도 재임명되었다.
    그는 1933년 춘동간척사업을 완공하고, 이어서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간의 1.2km의 갯펄을 막는 서호간척사업을 계획했다. 이곳을 막으면 총
    9백 정보의 농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9년 마침내 간척사업의
    허가를 총독부로부터 받아냈는데, 이 간척사업의 허가에도 그의 중추원
    참의직은 훌륭한 배경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내선일체의 @소신#


    현준호의 친일활동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7월 15일 미나미 조선총독은
    시국의 중요성과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도적 지위를 대중들에게 선전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학무국은 1, 2차의 전선(全鮮)순회 시국강연반을
    결성하였다. 1937년 8월 6일부터 약 1주일 동안 행해진 시국강연의 연사
    가운데 현준호는 전남지역 연사의 한 사람으로 들어가 있었다.

    또 1938년 1월경부터 총독부는 장기전에 대처할 대내|외 중요 정책의 입안
    심의를 위해 전시 최고심의기관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가 설치되었다. 이 대책위는
    $조선총독의 감독에 속하고 그 자문에 응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시국대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심의함&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회장은 정무총감이
    맡고 위원 및 임시위원은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 및 각 기관의 고등관 중에서
    총독의 주청으로 내각이 임명한다고 되어 있었다. 당시 임명된 위원은 총
    97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현준호를 포함해서 11명이었다. 당시
    현준호와 함께 임명된 조선인 시국대책조사위원은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박영철*(중추원 참의), 박충양(중추원 참의), 박흥식(화신 사장),
    윤덕영*(남작, 중추원 고문), 이기찬(참의), 이승우*(참의), 최린*(참의),
    한규복(참의), 한상룡*(참의, 조선생명보험 사장), 등이었다. 현준호가 이들
    친일파 거물들과 시국대책조사위원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총독부측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9월
    6일부터 첫 회의를 열고 총독의 자문 사항에 대하여 심의하였는데, 이 때
    현준호는 산업 경제관계를 담당한 제2분과회의 전임위원으로,
    문화|사회관계를 담당한 제1분과회의 겸임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현준호는 어떤 발언을 하였을까. 현재 남아 있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그는 제1분과회에서 다루고 있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문제에 대하여 $제1분과회에서 내선일체의
    강화|철저에 관한 건은 본 중대 시국에 가장 중요하다. 이미 병합 이래
    2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선일체의 철저를 기하지 못하여
    금일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내선일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먼저 내선일체를
    이루는 데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통일#과 그 내용을 속히 강화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교육, 실업방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조선의 교육기관을
    정비할 것과, 실업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대등한 기회를 줄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 조선에 와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은 그 돈을
    일본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조선에 재투자하여 조선인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을 오가는 선편에서
    조선인들에게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이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일본인은 형(兄)의 위치에서 조선인에 대하여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현준호의 발언은 그가 상당히 민족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친일파들은
    일반적으로 명실상부한 내선일체의 실시, 즉 조선인을 식민지백성으로
    대우하지 말고 명실상부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대우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앞의 현준호의 발언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전남지역 대표인사로서 친일단체에 적극 참여


    현준호는 시국대책위원회 제2분과 회의에서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데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식량문제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1920년대
    시모오카(下岡) 정무총감은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라고 칭송하고, 중단된 산미증식계획을 다시 부활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의 1년 동안의 인구증가가 1백만 내지 120만에
    달하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1년에 1만 정보 이상의 간척지 또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1반보당 3석의 수확을
    친다면 1만 정보에서 1년에 약 30만 석을 얻을 수 있다면서, 10년 혹은
    20년의 원대한 계획을 세워 10년에 3백만 석, 20년에 6백만 석을 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발언과 1930년대에 착수한 그의
    간척지 개간사업은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까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한편 현준호는 1941년에는 윤치호*계열에서 준비하던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라는 친일 관변단체에 상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대책결의, 근로보국의 강행 등의 강령을 채택한 친일단체로서 최린, 김동환*
    등이 만든 임전대책협의회와 합동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이 된 단체였다.

    일제는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이래 조선청년학도를 전장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43년 10월에는
    학도병강제모집제도가 공포되었고, 1944년 4월에는 마침내 징병제도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학병모집이 공포되자 일제는 친일파들을 앞세워
    학도병 동원에 열을 올렸다. 당시 현준호가 속해 있던 중추원에서도 윤치호
    등 고문 66명과 18명의 참의가 모여서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기 위하여
    강연반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현준호는 전남지역 시국강연반에
    소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은 현준호에게도 찾아왔다. 그는 해방 이후 특별한
    정치활동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광주의 호남동에서 바둑으로 소일했다.
    마침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친일파들을 다루기 위한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전남에도 반민특위 사무실이 설치되었다. 1949년 5월 7일 현준호는
    출두지시를 받고 반민특위에 출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중추원 참의 등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맡게 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호남은행도
    일본인들을 한 사람도 쓰지 않아 끝내 동일은행에 합병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전남특위는 현준호를 불구속 처리했다.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광주에 있던 현준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들에게 붙들렸고 9월
    28일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 박찬승(목포대 사학과 교수)

    ■ 참고문헌
    阿部 薰, {朝鮮功勞者銘鑑}, 民衆時論社, 1935.
    朝鮮總督府, {조선총독부 時國對策調査會 會議錄}, 1938.


    ---------------------------------------------------------------------------------------


    방응모(方應謨 1890~?)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정책의 하수인


    1933 『조선일보』사장 
    1935 『조광』창간 
    1937 애국금차회 활동 
    1938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서 활동,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1941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3 '출진학도 격려대회' 주최 
    1950 납북됨 


    ● 자기방어 한계 넘어선 친일 논조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러나 칼 앞에 이미 무력해진 펜은 엄청난 죄악의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일제하 36년간 소위 지식인이라 자부하던 이들에게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글을 더듬어 보면 우리는 무력한 펜, 아니 무력함 정도를 넘어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 펜이 어떤 죄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볼 수 있다.

    2천6백 년의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大和)정신과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이상으로써 닥거놓은 성업은 일계직통(一系直統)의 천황어능위(御稜威)를 봉(奉)하여 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적(滿幅的) 희열을 느끼고 있다.
    유구한 역사는 가고 와서 이제 2월 11일로 2천6백 년을 맞이하는 이때 오즉 우리는 이 더럽펴 보지 않은 장구한 역사의 흐름우에 자긍과 만족을 느끼고 있거니와 국운이 날로 창성해 가는 우리 일본의 프른 희망과 억센 흥아대업(興亞大業) 달성에 또한 만강(滿腔)의 성의로써 진취해 오는 것이다. 이제 동아(東亞)의 맹주로서의 일본이 오늘날에 이른 것은 오로지 대화국단원(大和國檀原)에 관주(官柱)를 힘차게 세우신 이래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끄님없는 성업의 달성에 진력하옵신 자최라 할 것이다.
    황국 일본이 명치 유신 이후 일청(日淸), 일로(日露)의 양 전역을 지나 오늘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을 격는 동안 우리의 발길은 대륙에 힘차게 드듸서게 되었으니 여기 일본의 뻐더가는 생장(生長) 발전의 힘찬 거름을 볼 수 있거니와 이제 2천6백 년 2월 11일 기원을 당하와는 천황, 황후 양 폐하와 성수무강(聖壽無疆)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천태자 전하, 義宮親王 전하, 照宮, 孝宮, 順宮, 淸宮 4내친왕(內親王) 전하의 御康寧을 빌어 마지안는다.…
    이 전국적 제전에 임하여 오인(吾人)은 국운의 창성과 황군 장병의 무운장구를 삼가 기원하며 마지안는 바이다(『조광(朝光)』, 1940년 3월호).

    '2천6백 년의 기원절'이라는 제목하에 일본의 유구한 역사를 찬미하고 일본 왕족의 건강까지 기원한 이 글은 군국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인 일본인에 의해 씌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글은 엄연한 한국인, 그것도 조선일보사의 사주이자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던 방응모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평안북도 정주군 동주군(뒤에 고안면으로 바뀜) 소암동에서 1890년에 출생한 방응모의 조선일보사 경영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한때 『동아일보』의 정주지국을 운영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다가 1925년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에서 금광을 채굴해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는 이 돈을 당시 경영난으로 인해 사주가 여러 차례 바뀌는 등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일보사에 투자, 경영권을 인수받게 된다. 이때가 1933년 3월. 그는 우선 고향 선배인 조만식(曺晩植)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 겸 전무로 취임했으며, 이어 7월에는 자본금 30만 원의 주식회사로 등기를 마치고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 친일잡지 『조광』을 토대로 교화정책에 앞장서

    우리에게 '민족 언론'이 있었는가라는 의문은 언론사(言論史)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한번쯤 품어 볼 만하지만, 당시 언론계에 몸담고 있던 문인 기자들이나 발행인들의 행적을 뒤쫓다 보면 이들에게 있어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사상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특히 3․1운동 이후 일본의 문화통치 아래에서 등장한 민간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도 1930년대 후반기부터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일제하 한반도 내의 우리 언론사에서 민족지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들 신문이 처음부터 친일을 목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며 다만 시기적인 상황에 편승하면서 점차 변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해 나중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버금갈 정도의 친일 논조를 폈지만 당시 총독부의 창씨개명, 조선어 말살 등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하의 물자절약 차원에서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당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방응모도 시국강연회 등 친일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1935년에는 철저한 친일잡지인 『조광(朝光)』을 창간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함께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던 무렵부터는 『조광』의 권두언 등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서슴지 않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창간 5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뒤를 이어 소화(昭和) 12년 7월에는 동아(東亞) 신질서건설 사업인 제2차 구주(歐洲)대전쟁이 발발되어 세계 신질서 건설은 지금 일․독․이(日․獨․伊) 3국에 의하여 용감하게 진전되고 있다"는 말로 세계 정세를 전제한 뒤 『조광』이 문화조성건설의 '아침 햇빛(朝光)'이 되기 위해 지난 5년간 미력을 다해 왔으며 이제 "국민된 자로서는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를 당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신체제의 확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 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세계 영구 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조광』, 1940년 11월호)"라고 일제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어 「지나(支那)사변 4주년」이라는 제목하에 실린 권두언에서는 "우리는 이 의의 깊은 날을 맞이함에 있어 먼저 이 성전의 초석이 되어 전장의 꽃으로 사라진 황군 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삼가 그 명복을 비는 바이거니와 이들에게 동아 신질서 완성의 우렁찬 고종(告鐘) 소리를 들려 줄 날도 반드시 먼 장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 과거 4년간 황군의 가는 곳엔 실로 글자 그대로 적이 없었다"고 일본 군국주의의 세계 침략전쟁을 적극 찬양하면서 "우리에게는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되는 데 따라 거기에 상응한 준비가 있다. 써 어떠한 방해가 온다한들 조금도 괘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제국의 운명을 도(睹)하고 있는 이 성업(聖業)에 있어 어찌 단 한 걸음인들 후퇴할 것인가. 문제는 다만 우리의 물심양방면(物心兩方面)으로부터의 총력전 준비에 있다(1941년 7월호)"고 국민 모두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만주사변 10주년」「일미(日米) 회담」「불인(佛印) 공동방위의 의의」「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해군 지원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영예」「대동아전쟁의 성전 의식」등 『조광』을 통해 발표한 권두언들에서 방응모는 자신의 친일 성향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앞다투어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시정(施政) 31주년」이라는 제목으로 씌어진 권두문에서는 "회고하건대 지금으로부터 만31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또한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에 있었다. 이때 명치 43년 8월 29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합병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간 역대 조선총독은 선정(善政)을 하여 금일과 같이 경제, 산업, 교육 등 일반 문화 향상에 자(資)한 바 실로 컸다"고 소위 한일합방을 구국의 결단이라 극찬하는 한편,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선정을 베푼 것으로 그가 추켜세운 미나미(南) 조선총독의 일문(日文)글 「시정(始政) 31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라는 기념사를 함께 게재하기도 했다.



    ● 친일어용단체 가입, 전비 마련과 징병 권유에 적극 활동

    이처럼 방응모는 자신이 발행하고 있는 월간지의 권두언 등을 통해 시종일관 친일적인 논조를 펼쳤으며, 김활란(金活蘭), 주요한(朱耀翰), 서춘(徐椿) 등 친일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조광』구석구석을 친일파들의 글로 채우기에 이른다.

    중일전쟁 확대로 일본이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한 해인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사장 백관수(白寬洙) 등과 함께 총독부 학무국에서 결성한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 동원돼 '조선명사 59인 각도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에 전 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 경기 관내 시국강연으로서 순회 연사좌담회에 참석해 국민지도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춘추회 주최의 배영(排英) 궐기대회에서는 황군 만세를 선창했는가 하면 당시 조선반도에서 국어(일본어) 보급률이 식민지인 대만에 비해 뒤떨어진다며 전국적으로 일어상용 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창하기도 했다. 그 외에 1943년 11월 14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서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사재를 출자해 고사포(高射砲)를 구입해 일본군에 기증해 일본을 향한 열렬한 충성심을 보여 주었는가 하면 비행기 제조 전쟁 조력업체였던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에 자본을 출자해 중역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방응모는 이처럼 지면을 통하거나 시국강연 등을 통해 친일행위를 하는 외에 개인적으로는 친일 성향이 짙거나 또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 어용단체 등에 가입하기도 했다. 1937년 5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김영환(金永煥),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및 성대 교수 다카기(高木市之助) 등이 중심이 돼 조직한 조선문예회 회원으로 일본인 17명과 함께 14명의 한국인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총독 정책인 사회교화 달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시국가요와 황군격려가 제작을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또한 일본의 총력운동 단체와 국방 목적 단체 중 하나로 1937년 8월 20일 결성된 애국금차회에 백관수, 이상협(李相協) 등 15인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황군 원호와 전비 마련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1938년 6월 22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민간 사회 교화단체의 대표자들이 총독부의 종용에 의해 결성된 것으로 조선문예회, 조선방송협회, 춘추회 등 59개 단체와 김활란, 백관수, 김성수(金性洙) 등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황국정신의 현양,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 경제정책에의 협력 등을 그 실천 요강으로 하는 단체였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미․일 관계에 틈이 벌어지자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공고한 결전체제로 강화하기 위해 사상통일, 국민 총훈련, 생산력 확충 등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고도 국방국가 건설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해체하고 이를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재출발시키게 된다. 이에 따라 방응모도 이 단체의 참사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일본은 이 조직을 통해 황국신민정신의 앙양, 징병․학병의 독려, 증산, 헌금과 공출, 군인 원호 등의 총력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41년 8월에는 '삼천리' 사장 김동환(金東煥)의 발기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의 위원으로 참여해 종로 화신 앞에서 김동환, 모윤숙(毛允淑), 이광수,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전쟁비용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서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임전대책협의회에 윤치호 등이 주축이 되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자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총장 기와기시(川岸文三郞)가 두 단체 통합을 주선해 1941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라는 명칭으로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단체가 출범을 맞게 되며 방응모 또한 이 단체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다.



    ● 친일은 과거의 일, 건국대업 완성에 기여하자

    이처럼 일제가 강행한 총력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교화정책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해낸 방응모는 일본이 패망한 후 다시 조선일보사의 사주로서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던 조선일보를 1945년 11월 23일자로 속간하게 된다. 그의 속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더퍼노코 '황국신민'이 되라는 강잉을 바덧스며 더퍼노코 징병으로 징용으로 공출로 전쟁에 철저협력하라는 호령을 듯고 볼 뿐이엿다. 우리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스나 호소할 곳이 업섯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다. 굴근 철쇄(鐵鎖)로 억매이고 날카러운 총검밋테 떨허 오직 노예적 굴종을 하지 않흐면 안 되엇섯다. 확실히 총독정치 36년간에 이 기간가치 언론이 구속된 때는 업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말로 일제 치하에서 자신의 친일행위가 놓여진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피력하며 그러나 이는 모두 과거의 일이니 언론의 자유를 회복하고 붓을 다시 들어 건국대업 완성에 기여해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히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른다.

    해방 정국하에서 민족정기를 회복하려던 가장 큰 움직임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친일세력에 의해 폐기되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언론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빌붙었던 친일 언론인 대다수가 해방 이후 다시 문단과 언론계의 주역으로 활동을 재개하던 당시, 방응모도 이전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 황국신민으로서 해야 할 바를 써내려가던 펜으로 다시 대한민국의 건국대업 완성을 호소하는 재빠른 처세술을 보여 주었다. 자기 변명이 섞인 듯한 속간사 이외에는 단 한 줄의 사과문도 발표하지 않은 채였으며,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어떠한 문책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조선일보』속간사를 통해 그가 늘어놓은 변명과 같이 그가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한 것은 언론사 사주로서의 위치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백 번 양보하더라도 『조광』등을 통해 그가 내뱉은 말들은 이미 자기 방어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해방 이후 특별한 활동없이 『조선일보』사주로 있다가 한국전쟁중인 1950년 7월 7일 북한에 납북되면서 소식이 끊긴 것으로 전해진다.

    ■ 문영숙(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조광(朝光)』, 1940~1944. 
    『매일신보』, 1937~1938. 
    『조선일보』, 1945.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정진석, 《한국언론사 연구》, 일조각. 
    정운현, 김삼웅 편, 《친일파》 3, 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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