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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뮤르시엘라고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09-10-06
    방문 : 6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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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르시엘라고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171 이등별님!! 군대가면 이렇게 잘해주나요?? [새창] 2010-04-17 23:37:06 2 삭제
    그래 내가 생각해도 이상식은 병장이다..
    저럴수가 없다!!!
    170 우리나라 숫자 단위 표시체계에 대해서 [새창] 2010-04-17 20:29:22 1 삭제
    이문제도 있지만 또 우리나라는 화폐단위가 하나밖에 없는게 전 조금 불만이었습니다.
    큰 문제는 안되지만,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원"의 가치를 굉장히 떨어지는거로 보더라고요.

    그 이유가 외국은 달러/센트 파운드/쉴링 등등 두개단위가 있는 나라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원 하나 뿐이어서 계속해서 돈 단위가 올라가버리니

    100원 후에 다른 단위로 바뀌면 좋을텐데, 외국인들하고 얘기할때
    외국인 : 일년 연봉이 난 3만달라야 한국에서는 얼마정도야?
    나 : 3만달라? 우리나라 가면 30밀리언 원이야... 라고 하면
    10명중 8명은 깜짝 놀라고 우리나라 가치가 굉장히 떨어지는거처럼 생각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짐바브웨, 터키등등 하이퍼인플레때문에 화폐가치가 떨어진 나라들이 빵하나에
    1억달라씩 내고 그러자나요. ㅋ

    조리있게 쓰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도 단위가 2개있으면 좋겟네요..
    169 이등별님!! 군대가면 이렇게 잘해주나요?? [새창] 2010-04-17 19:26:16 2 삭제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 웰컴투더 헬
    168 이등별님!! 군대가면 이렇게 잘해주나요?? [새창] 2010-04-17 19:26:16 29 삭제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 웰컴투더 헬
    167 나도 너랑같이 폭풍벚꽃바람 맞고싶다 [새창] 2010-04-17 12:39:20 21 삭제
    메달개수마다 내가 폭풍 싸대기를 날려주지.
    166 나도 너랑같이 폭풍벚꽃바람 맞고싶다 [새창] 2010-04-17 12:39:20 97 삭제
    메달개수마다 내가 폭풍 싸대기를 날려주지.
    165 생활의참견 No.229 소심한 민철이 [새창] 2010-04-17 12:37:33 0 삭제
    ㅋㅋㅋㅋㅋ 그..그럽시다 ㅋㅋㅋㅋㅋㅋ
    164 생활의참견 No.229 소심한 민철이 [새창] 2010-04-17 12:37:33 2 삭제
    ㅋㅋㅋㅋㅋ 그..그럽시다 ㅋㅋㅋㅋㅋㅋ
    163 이렇게 떨리게 한 건 니가 처음이야.. [새창] 2010-04-17 12:36:28 2 삭제
    뽀샵인거에 내 채혈을 건다
    162 딴지일보에서 11시부터 토론시작하는거 잊지마세요 [새창] 2010-04-15 22:58:53 6 삭제
    비밀번호는 할떄쯤 풀린다고 댓글에 나와있더라고요.. 이제 시작하것네요 ㅎㅎ

    그나저나 이거 퍼왔어요 - 오늘 나오시는분들에 대해..

    김제동이 우선 MC 보고요

    김진표(金振杓, 1947년 5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열린우리당으로 당선되어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고, 지역구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전까지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김대중 정부), 국무조정실장(김대중 정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및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노무현 정부) 등을 두루 거쳤으며, 노무현 당선 직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재선에 성공한 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면서 현재 재임중이다.


    심상정(沈相?, 1959년 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을 역임하였고, 진보신당을 창당하였으며, 노회찬 등과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서 태어났다. 1971년 대조초등학교 졸업하고, 1974년 충암중학교, 1977년 명지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1] 그뒤 위장취업으로 1980년 구로공단으로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 등 노동운동을 하였다.[2] 대우어패럴 미싱사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고, 1985년 6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기 최초의 정치적 연대파업투쟁인 구로동맹파업에 나섰다.[3]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대한민국의 고속 성장에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으며 1980년대 초에도 이러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4]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만으로도 사상이 불온한 자로 낙인찍혔으며 노동조합과 관련되어 해고될 경우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직장을 구하는데에도 차별을 받았다.[5] 1983년 부터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여러 사업장에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심상정의 노동운동 투신은 이러한 흐름에 맥이 닿아 있었다.

    파업은 구사대의 폭력과 경찰의 탄압 속에 1주일만에 끝났고 44명의 노동자가 구속되고 1천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되는 상처를 남겼다.[6] 1984년 노조결성 및 쟁의로 수배 중이었던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으로 인해 주동자로 지명수배되었다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으로 1993년까지 10년간 수배되었으며, 1993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2] 한편, 2001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구로동맹파업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하였다.[8
    노동운동가로서의 인생을 살아온 심상정은 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 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25년의 노동운동 끝에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현재 2010년 6월 2일 실시되는 지방선거의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안동섭 : 정당인 출생 1964년 1월 11일 (서울특별시) 소속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위원장) 학력연세대학교 (중퇴) 경력 영화동 청소년공부방 1318 운영위원
    경기도 무상급식추진 운동본부 공동대표
    민주수호 민생회복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경기도 시국회의 공동대표

    유시민 : 유시민(柳時敏, 경주 출생, 1959년 7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이며 제16·17대 국회의원이다.

    사회 평론가 및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사회자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친노진영의 핵심 인물로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2]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대구 수성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현재 대구에서 지역 경제학에 대한 학문 연구 및 대학 강의(경북대학교)를 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서 출생하였고, 대구에서 대구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사정권 하에서 두 차례의 감옥살이와 제적, 복학을 거쳐 1991년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독일로 건너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생운동을 하던 1985년 일명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통해 유명해졌다. 80년대 말 출판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일약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면서 대중적 지명도를 얻었다.


    저널리스트 시절 [편집]
    1997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97대선 게임의 법칙'등을 저술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책에서 그는 "김대중은 직접 출마하기보다는 제3의 후보인 조순 서울시장을 대리전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 12월 6일자 < 유시민의 세상읽기-김대중 대통령님께 > 라는 동아일보 칼럼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집권당 국민회의는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불과 2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을 경계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칼럼에서 그는 또 "'동교동계 참모의 전진 배치'로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대통령님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자리를 이른바 '동교동 가신'으로 채웠다. 민주신당에서 조직과 기획을 담당하는 요직도 모두 동교동계 의원들이 차지했다. 게다가 대통령님은 며칠 전 국민회의 의원들을 불러 모아 거의 혼자서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애당심'을 특별히 강조했다"며 "이 모든 것이 그간 국민회의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대통령님께서 '예스 맨'만을 중용한다는 비판이 들리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 전 장관은 "나는 대통령님에 대한 기대를 이제 온전히 접었다"며 "2년이면 실망하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미움보다 더 아픈 것이 냉소와 무관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고 독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유시민의 이 책은 당시 상당한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DJ 열혈 지지자였던 강준만 교수와 이 문제로 지상(紙上) 공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당시 김대중측 인사들은 유시민을 "영남 우월주의와 패권주의 혈맥이 흐르는 사람"이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8월 김대중이 서거했을때 유시민이 추모 편지를 쓴것에 대해 '가식적이다'라는 비판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3]

    2000년부터 2002년까지 MBC의 토론 프로그램인 100분 토론의 진행을 맡았다.

    정치활동 [편집]
    개혁당 시절 [편집]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내 노무현 후보 흔들기를 지켜 보며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과 함께 '국민후보 지키기 시민 운동'을 구상하였고 그 구상이 발전하여 정치를 바꾸기 위한 신당의 창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절필 선언(8월)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2002년 10월, 개혁국민정당(약칭, 개혁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당시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다수파와 함께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별개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방법, 노무현 후보 혼자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을 구상했다.[4] 뜻이 맞는 40여명이 각자 500만원씩 내놓았고 2억원으로 신당을 만들었다. 그때에는 그것이 무슨 당이냐는 소리를 들었으며 창당 기사는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혁신당으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자신도 국회의원이 되었다.[5]

    2003년 4월 24일 보궐선거[6]에서 당선되어 16대 국회에 진입하였다. 같은해 4월 29일 의원선서시 캐주얼 콤비에 라운드 티를 입고 등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싱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선서했다. 또한 평소 자유주의적 소신을 바탕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제적 주입이기에 이를 굳이 강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

    2003년 11월 열린 우리당이 출범할 때 개혁당은 열린 우리당에 통합되었다.[7]

    열린 우리당 시절 [편집]
    국회의원이 된 2003년 당시의 이슈는 단연 '이라크파병동의안'문제였다. 유시민은 파병 동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4년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5년 2차 연장 동의안 표결이 다가왔을 때 그는 노무현 대통령도 정말 싫어하는 일인데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반대표 행사는 비겁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한국 참전을 반대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으나 "궂은 일은 대통령이 하고 폼은 국회의원이 잡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이) 욕먹을 때는 같이 먹고 비가 올 때는 같이 맞아야 되지 않겠나"라며 2차 연장 동의안 찬성표를 행사했다.[8] [9]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이 있었다.

    유시민은 2004년 총선에서 열린 우리당의 압승이 확실해 지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원하는 유권자의 표가 이탈하여 진보정당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민주노동당 의원을 찍는 행위는 지역구 2곳을 제외하면 사표(死票)가 될 것이므로 정당표는 민노당에 주더라도 후보표는 열린 우리당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과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10]

    유시민은 당시 독설로 유명했다.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말했고 17대 국회를 "폭력 국회", "박근혜 국회"라고 논평했다.[11] 유시민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같은 당의 의원일지라도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다. 이종걸 의원은 유시민 의원이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정강 정책이 다를 게 없다거나 연정론에서도 보면 한나라당과 손잡아야 한다는 원색적인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한다고 말했다.[12]

    김형주 의원은 유시민과 노무현의 관계를 "노무현과 유시민은 사랑하고 보호하는 관계다.”라고 말했고 딴지일보의 김어준씨는 2004년 대선 당시 노무현과 유시민을 "영혼의 쌍둥이”라고 말했다. 그는 늘 노무현의 정책을 지지했고 "일단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에는 사실상 원맨쇼를 벌이며 옹호했으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13]

    한나라당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 제안했을 때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서는 대연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는 의석을 정당 총득표율에 따라 할당하는 독일식 정당 명부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2005년 8월 3일 '우리나라 정당정치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에 참석한 노회찬은 대연정 동기의 순수성은 이해하지만 선거구제 개편은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옳다며 국민투표 방식을 제안하였다.[14]

    유시민은 선거구제 개편을 시행하면 최종적으로 창조적 분열 뒤 5당 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역구도를 탈피하게 되면 이념에 차이가 있더라도 지역주의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정당이 해체되면서 왼쪽에 민주노동당, 그 다음에 개혁당, 맨 가운데에 열린우리당 중도우파 및 합리적 민주당파 및 일부 한나라당, 그 오른쪽에 한나라당 다수파 및 보수적 민주당, 맨 오른쪽엔 '5공당'의 순서로 정당이 개편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인 분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하며 연정을 통한 독일식 선거구제로의 이행이 그 충격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15]

    2006년 2월 보건 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2007년 2월 20일 열린 우리당의 분당 사태를 비판하면서 분당으로 인해 열린 우리당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망하고 분당으로 인해 10%였던 재집권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99%"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그는 열린 우리당은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부터 분당이 예견되었다고 말했는데 열린 우리당은 공화제적인 공천 구조를 추구했으나 이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기존의 보스에 의한 공천이 사라진 상태에서 공화제적인 공천을 원하는 세력과 자기들이 공천권을 갖기를 원하는 그렇지 않은 세력간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이 이어져 분당사태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16]이에 대해 범여권은 평화민주개혁세력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과정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비판하였다.[17]

    2007년 3월 13일 제이유그룹 사기사건 조사과정에서 서울 동부지검의 검사가 이재순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연루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의자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는 의혹에 대한 내부 감찰결과 및 후속 대책을 김성호 법무부 장관이 보고하는 과정에서 김 장관이 "앞으로 인권존중 수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영상 녹화제를 확대하겠다." 고 대책을 내놓자 유시민은 "이재순 전 사정 비서관이 무혐의로 결론 났는데, 실추된 그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되느냐. 요즘 시중에는 검찰 내부에 청와대 조지면 영웅 된다면 말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냐."고 김 법무부 장관을 몰아 붙였다.[18]

    2007년 5월 22일,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임한 이후, 일단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하되 향후 저술 활동도 하고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19] 7월 11일에 그의 저서이자 정책제안집인 '대한민국 개조론'을 출간하였고 8월 20일 열린우리당 임시전당대회 직후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공식 입후보(선언, 예비후보 등록은 21일)[20]하였다. 이후 친노무현 후보들의 단일화 움직임에 따라 당내 경선에서 사퇴하고 이해찬 지지를 선언하였다. 제18대 총선에서 원래의 지역구 고양을 떠나 대구 수성 을에서 출마하기 위해 예비후보자로 등록하였다.

    대통합 민주신당 [편집]
    사수파의 반발속에서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유시민은 합당에 찬성하면서 "우리당의 꿈을 접어 가슴 속에 담고 가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석수가 143개나 될 거대한 민주신당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커다란 종이와 같다. 우리가 뜻을 모아 우리당 꿈을 함께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21]유시민은 예비후보로 친노진영으로 정동영의 기회주의적 비노노선을 비판했다. 또한 손학규는 한나라당과 같이 보수적이라며 비판했다.[22]

    대통합 민주신당 탈당 이후 [편집]
    2008년 1월 16일 이해찬 의원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하였고,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겠으며 유연한 진보정당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민주당은 물론 열린 우리당도 중도 보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지닌 가운데 일부 중도 진보 세력이 연합한 정당이라고 말하고 민주당이 좋은 정당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민주당 내에는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적어 보인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당내에서 노선경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사결정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며 전당대회를 열어 노선경쟁을 하게 되면 당은 필연적으로 파열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변화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2년후 지방선거, 2년후 국회의원 선거, 6개월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신당을 만들어 나간다는 5년 구상을 밝혔다.[23] 이에 따라 이번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대변인이자 현 수성 을 국회의원인 주호영 의원과 사실상 한나라당의 텃밭이라고 부르는 보수지역인 대구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개혁 정당 창당을 목표로 18대 총선에 나섰으나, 낙선하였다. [24] 최근에 그는 이명박 정부가 법률을 통해서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25] 2009년4월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주기 공작’으로 규정하면서 “전쟁포로라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줘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26]4월 30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에 앞서,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해 기자들과 만나 "졸렬한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옛날에는 군인들이 정치를 했는데, 요즘은 검사들이 정치하는 것 같다"며 "피의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피의자로서 잘 대처를 하고 와야 한다"며 "이런 정치보복을 노 전 대통령이 잘 이겨내고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27] 전대통령 노무현 조문정국 당시,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을 방문해 유족과 측근들을 만난 뒤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병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비통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유시민의 표정을 통해 네티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영웅본색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28] 10월 19일 국민참여정당 창당 움직임과 관련해서 그는 "신당을 추진하는 분들이 요청하고 있는데 입당할 생각"이라고 입당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중심의 야권 통합 가능성에 대해 "민주당과 같은 당을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29] 2009년 11월 10일 유시민은 국민참여당에 입당하였다.

    보건복지부 장관 [편집]
    2006년 2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재임 중 국민연금법과 건강보험 개혁을 추진했으나, 한나라당의 거센 반발로 인해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기초노령연금법과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각종 아동에 대한 투자 및 지원제도와 소외계층을 위한 '돌보미 서비스' 등을 도입하고, 사회투자정책을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의 미래전략으로 정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161 딴지일보에서 11시부터 토론시작하는거 잊지마세요 [새창] 2010-04-15 22:58:53 1 삭제
    비밀번호는 할떄쯤 풀린다고 댓글에 나와있더라고요.. 이제 시작하것네요 ㅎㅎ

    그나저나 이거 퍼왔어요 - 오늘 나오시는분들에 대해..

    김제동이 우선 MC 보고요

    김진표(金振杓, 1947년 5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열린우리당으로 당선되어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고, 지역구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전까지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김대중 정부), 국무조정실장(김대중 정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및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노무현 정부) 등을 두루 거쳤으며, 노무현 당선 직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재선에 성공한 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면서 현재 재임중이다.


    심상정(沈相?, 1959년 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을 역임하였고, 진보신당을 창당하였으며, 노회찬 등과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서 태어났다. 1971년 대조초등학교 졸업하고, 1974년 충암중학교, 1977년 명지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1] 그뒤 위장취업으로 1980년 구로공단으로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 등 노동운동을 하였다.[2] 대우어패럴 미싱사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고, 1985년 6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기 최초의 정치적 연대파업투쟁인 구로동맹파업에 나섰다.[3]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대한민국의 고속 성장에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으며 1980년대 초에도 이러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4]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만으로도 사상이 불온한 자로 낙인찍혔으며 노동조합과 관련되어 해고될 경우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직장을 구하는데에도 차별을 받았다.[5] 1983년 부터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여러 사업장에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심상정의 노동운동 투신은 이러한 흐름에 맥이 닿아 있었다.

    파업은 구사대의 폭력과 경찰의 탄압 속에 1주일만에 끝났고 44명의 노동자가 구속되고 1천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되는 상처를 남겼다.[6] 1984년 노조결성 및 쟁의로 수배 중이었던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으로 인해 주동자로 지명수배되었다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으로 1993년까지 10년간 수배되었으며, 1993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2] 한편, 2001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구로동맹파업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하였다.[8
    노동운동가로서의 인생을 살아온 심상정은 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 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25년의 노동운동 끝에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현재 2010년 6월 2일 실시되는 지방선거의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안동섭 : 정당인 출생 1964년 1월 11일 (서울특별시) 소속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위원장) 학력연세대학교 (중퇴) 경력 영화동 청소년공부방 1318 운영위원
    경기도 무상급식추진 운동본부 공동대표
    민주수호 민생회복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경기도 시국회의 공동대표

    유시민 : 유시민(柳時敏, 경주 출생, 1959년 7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이며 제16·17대 국회의원이다.

    사회 평론가 및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사회자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친노진영의 핵심 인물로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2]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대구 수성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현재 대구에서 지역 경제학에 대한 학문 연구 및 대학 강의(경북대학교)를 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서 출생하였고, 대구에서 대구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사정권 하에서 두 차례의 감옥살이와 제적, 복학을 거쳐 1991년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독일로 건너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생운동을 하던 1985년 일명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통해 유명해졌다. 80년대 말 출판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일약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면서 대중적 지명도를 얻었다.


    저널리스트 시절 [편집]
    1997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97대선 게임의 법칙'등을 저술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책에서 그는 "김대중은 직접 출마하기보다는 제3의 후보인 조순 서울시장을 대리전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 12월 6일자 < 유시민의 세상읽기-김대중 대통령님께 > 라는 동아일보 칼럼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집권당 국민회의는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불과 2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을 경계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칼럼에서 그는 또 "'동교동계 참모의 전진 배치'로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대통령님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자리를 이른바 '동교동 가신'으로 채웠다. 민주신당에서 조직과 기획을 담당하는 요직도 모두 동교동계 의원들이 차지했다. 게다가 대통령님은 며칠 전 국민회의 의원들을 불러 모아 거의 혼자서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애당심'을 특별히 강조했다"며 "이 모든 것이 그간 국민회의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대통령님께서 '예스 맨'만을 중용한다는 비판이 들리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 전 장관은 "나는 대통령님에 대한 기대를 이제 온전히 접었다"며 "2년이면 실망하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미움보다 더 아픈 것이 냉소와 무관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고 독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유시민의 이 책은 당시 상당한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DJ 열혈 지지자였던 강준만 교수와 이 문제로 지상(紙上) 공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당시 김대중측 인사들은 유시민을 "영남 우월주의와 패권주의 혈맥이 흐르는 사람"이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8월 김대중이 서거했을때 유시민이 추모 편지를 쓴것에 대해 '가식적이다'라는 비판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3]

    2000년부터 2002년까지 MBC의 토론 프로그램인 100분 토론의 진행을 맡았다.

    정치활동 [편집]
    개혁당 시절 [편집]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내 노무현 후보 흔들기를 지켜 보며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과 함께 '국민후보 지키기 시민 운동'을 구상하였고 그 구상이 발전하여 정치를 바꾸기 위한 신당의 창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절필 선언(8월)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2002년 10월, 개혁국민정당(약칭, 개혁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당시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다수파와 함께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별개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방법, 노무현 후보 혼자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을 구상했다.[4] 뜻이 맞는 40여명이 각자 500만원씩 내놓았고 2억원으로 신당을 만들었다. 그때에는 그것이 무슨 당이냐는 소리를 들었으며 창당 기사는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혁신당으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자신도 국회의원이 되었다.[5]

    2003년 4월 24일 보궐선거[6]에서 당선되어 16대 국회에 진입하였다. 같은해 4월 29일 의원선서시 캐주얼 콤비에 라운드 티를 입고 등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싱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선서했다. 또한 평소 자유주의적 소신을 바탕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제적 주입이기에 이를 굳이 강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

    2003년 11월 열린 우리당이 출범할 때 개혁당은 열린 우리당에 통합되었다.[7]

    열린 우리당 시절 [편집]
    국회의원이 된 2003년 당시의 이슈는 단연 '이라크파병동의안'문제였다. 유시민은 파병 동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4년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5년 2차 연장 동의안 표결이 다가왔을 때 그는 노무현 대통령도 정말 싫어하는 일인데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반대표 행사는 비겁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한국 참전을 반대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으나 "궂은 일은 대통령이 하고 폼은 국회의원이 잡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이) 욕먹을 때는 같이 먹고 비가 올 때는 같이 맞아야 되지 않겠나"라며 2차 연장 동의안 찬성표를 행사했다.[8] [9]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이 있었다.

    유시민은 2004년 총선에서 열린 우리당의 압승이 확실해 지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원하는 유권자의 표가 이탈하여 진보정당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민주노동당 의원을 찍는 행위는 지역구 2곳을 제외하면 사표(死票)가 될 것이므로 정당표는 민노당에 주더라도 후보표는 열린 우리당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과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10]

    유시민은 당시 독설로 유명했다.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말했고 17대 국회를 "폭력 국회", "박근혜 국회"라고 논평했다.[11] 유시민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같은 당의 의원일지라도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다. 이종걸 의원은 유시민 의원이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정강 정책이 다를 게 없다거나 연정론에서도 보면 한나라당과 손잡아야 한다는 원색적인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한다고 말했다.[12]

    김형주 의원은 유시민과 노무현의 관계를 "노무현과 유시민은 사랑하고 보호하는 관계다.”라고 말했고 딴지일보의 김어준씨는 2004년 대선 당시 노무현과 유시민을 "영혼의 쌍둥이”라고 말했다. 그는 늘 노무현의 정책을 지지했고 "일단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에는 사실상 원맨쇼를 벌이며 옹호했으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13]

    한나라당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 제안했을 때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서는 대연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는 의석을 정당 총득표율에 따라 할당하는 독일식 정당 명부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2005년 8월 3일 '우리나라 정당정치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에 참석한 노회찬은 대연정 동기의 순수성은 이해하지만 선거구제 개편은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옳다며 국민투표 방식을 제안하였다.[14]

    유시민은 선거구제 개편을 시행하면 최종적으로 창조적 분열 뒤 5당 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역구도를 탈피하게 되면 이념에 차이가 있더라도 지역주의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정당이 해체되면서 왼쪽에 민주노동당, 그 다음에 개혁당, 맨 가운데에 열린우리당 중도우파 및 합리적 민주당파 및 일부 한나라당, 그 오른쪽에 한나라당 다수파 및 보수적 민주당, 맨 오른쪽엔 '5공당'의 순서로 정당이 개편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인 분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하며 연정을 통한 독일식 선거구제로의 이행이 그 충격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15]

    2006년 2월 보건 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2007년 2월 20일 열린 우리당의 분당 사태를 비판하면서 분당으로 인해 열린 우리당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망하고 분당으로 인해 10%였던 재집권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99%"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그는 열린 우리당은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부터 분당이 예견되었다고 말했는데 열린 우리당은 공화제적인 공천 구조를 추구했으나 이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기존의 보스에 의한 공천이 사라진 상태에서 공화제적인 공천을 원하는 세력과 자기들이 공천권을 갖기를 원하는 그렇지 않은 세력간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이 이어져 분당사태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16]이에 대해 범여권은 평화민주개혁세력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과정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비판하였다.[17]

    2007년 3월 13일 제이유그룹 사기사건 조사과정에서 서울 동부지검의 검사가 이재순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연루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의자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는 의혹에 대한 내부 감찰결과 및 후속 대책을 김성호 법무부 장관이 보고하는 과정에서 김 장관이 "앞으로 인권존중 수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영상 녹화제를 확대하겠다." 고 대책을 내놓자 유시민은 "이재순 전 사정 비서관이 무혐의로 결론 났는데, 실추된 그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되느냐. 요즘 시중에는 검찰 내부에 청와대 조지면 영웅 된다면 말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냐."고 김 법무부 장관을 몰아 붙였다.[18]

    2007년 5월 22일,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임한 이후, 일단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하되 향후 저술 활동도 하고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19] 7월 11일에 그의 저서이자 정책제안집인 '대한민국 개조론'을 출간하였고 8월 20일 열린우리당 임시전당대회 직후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공식 입후보(선언, 예비후보 등록은 21일)[20]하였다. 이후 친노무현 후보들의 단일화 움직임에 따라 당내 경선에서 사퇴하고 이해찬 지지를 선언하였다. 제18대 총선에서 원래의 지역구 고양을 떠나 대구 수성 을에서 출마하기 위해 예비후보자로 등록하였다.

    대통합 민주신당 [편집]
    사수파의 반발속에서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유시민은 합당에 찬성하면서 "우리당의 꿈을 접어 가슴 속에 담고 가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석수가 143개나 될 거대한 민주신당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커다란 종이와 같다. 우리가 뜻을 모아 우리당 꿈을 함께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21]유시민은 예비후보로 친노진영으로 정동영의 기회주의적 비노노선을 비판했다. 또한 손학규는 한나라당과 같이 보수적이라며 비판했다.[22]

    대통합 민주신당 탈당 이후 [편집]
    2008년 1월 16일 이해찬 의원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하였고,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겠으며 유연한 진보정당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민주당은 물론 열린 우리당도 중도 보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지닌 가운데 일부 중도 진보 세력이 연합한 정당이라고 말하고 민주당이 좋은 정당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민주당 내에는 진보적 가치가 숨 쉴 공간이 적어 보인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당내에서 노선경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사결정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며 전당대회를 열어 노선경쟁을 하게 되면 당은 필연적으로 파열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변화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2년후 지방선거, 2년후 국회의원 선거, 6개월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신당을 만들어 나간다는 5년 구상을 밝혔다.[23] 이에 따라 이번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대변인이자 현 수성 을 국회의원인 주호영 의원과 사실상 한나라당의 텃밭이라고 부르는 보수지역인 대구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개혁 정당 창당을 목표로 18대 총선에 나섰으나, 낙선하였다. [24] 최근에 그는 이명박 정부가 법률을 통해서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25] 2009년4월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주기 공작’으로 규정하면서 “전쟁포로라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줘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26]4월 30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에 앞서,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해 기자들과 만나 "졸렬한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옛날에는 군인들이 정치를 했는데, 요즘은 검사들이 정치하는 것 같다"며 "피의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피의자로서 잘 대처를 하고 와야 한다"며 "이런 정치보복을 노 전 대통령이 잘 이겨내고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27] 전대통령 노무현 조문정국 당시,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을 방문해 유족과 측근들을 만난 뒤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병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비통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유시민의 표정을 통해 네티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영웅본색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28] 10월 19일 국민참여정당 창당 움직임과 관련해서 그는 "신당을 추진하는 분들이 요청하고 있는데 입당할 생각"이라고 입당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중심의 야권 통합 가능성에 대해 "민주당과 같은 당을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29] 2009년 11월 10일 유시민은 국민참여당에 입당하였다.

    보건복지부 장관 [편집]
    2006년 2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재임 중 국민연금법과 건강보험 개혁을 추진했으나, 한나라당의 거센 반발로 인해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기초노령연금법과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각종 아동에 대한 투자 및 지원제도와 소외계층을 위한 '돌보미 서비스' 등을 도입하고, 사회투자정책을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의 미래전략으로 정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160 마이티 마우스 상추의 운동능력 [새창] 2010-03-16 05:13:22 0 삭제
    상추를 태릉으로 보내라!!!!!!!!!!!!!!!!!!!
    159 마이티 마우스 상추의 운동능력 [새창] 2010-03-16 05:13:22 0 삭제
    상추를 태릉으로 보내라!!!!!!!!!!!!!!!!!!!
    158 마이티 마우스 상추의 운동능력 [새창] 2010-03-16 05:13:22 0 삭제
    상추를 태릉으로 보내라!!!!!!!!!!!!!!!!!!!
    157 람보르기니....정모..................avi [새창] 2010-03-16 05:03:54 9 삭제

    우리도 정모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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