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경희대 여총 성명서 전문
경희구성원께 총여학생회가 진심을 담아 드립니다. ‘진심’을 담는 다는 것은 한 국회의원의 성추행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웠던 지난 어느 날,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술잔을 망치로 깨는 퍼포먼스를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성추행의 근본원인은 바로 폭탄주에 있다’며 사건의 본질을 심각하게 흐려놓은 그 말도 안되는 행위를 보면서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당이 당사를 내놓고 천막당사를 사용했던 것을 보면서 저런 정치쇼에 속을 국민이 아직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언론을 통해 이번 사건이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회자 된지 스무날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 기간이 저희에게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마냥 답답하고 두려웠기에, 그 어느 때보다 기나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질타와 비판의 목소리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많은 분들의 지적대로 ‘경솔한 행동에 대한 사과’와 같은 방법으로 풀면 어떻겠느냐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정치인의 ‘나몰라’처럼 잘못을 해 놓고도 책임지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 때도 있었습니다. 총여학생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밤새워 토론하고 몇 시간을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다듬는 과정을 거쳐서 글을 올리고는, 또 몇 시간을 모니터 앞에 앉아서 조마조마 했습니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스무날을 그렇게 보내면서, 들었던 생각은 ‘진심’이란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론에 몰려서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마음을 거짓으로 표현하거나, 혹은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진심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소위 ‘물타기’ 같은 행위 역시 진심과는 거리가 먼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모든 학우분들과 직접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정말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스물스물 새어나오는 것을 느낄 때면, 때로는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협소하게 느껴집니다. 부디, 저희들의 마음이 진심으로 전달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뿐입니다.
사과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교수님에 대한 사과가 없다.’ ‘섣부른 기자회견에 대한 사과가 없다.’
그 동안 저희들의 글에 많은 분들이 지적하신 부분입니다. 물론, 저희에게도 사과를 하느냐, 마느냐는 총여학생회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 저희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 이후 총여학생회 불신임과 사퇴, 여론의 뭇매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면서도,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는 ‘사과’를 두고, 저희들이 몇날 며칠을 고심했던 이유는 그 ‘사과’가 저희 총여학생회를 비롯해서 경희 구성원 모두에게 ‘독이 든 사과’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희의 의견이 ‘경희대 총여, 사과 안하기로..’와 같은 머리와 발이 잘린 상태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희의 입장을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간 총여학생회는 경희대 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도움 받을 곳이 없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이 확연하게 밝혀져도 이 사회에서 성폭력피해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거나, 사건 자체가 사실로 밝혀지기 어렵다는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사건해결을 지원받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알고 있는 총여학생회는 성폭력 사건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피해자를 마지막까지 돕고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져왔습니다. 앞으로도 학내 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하기를 꺼려하는 사태를 막고, 누구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총여학생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원칙을 지켜야합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원칙과 진심과는 별개로 이번 성폭력 사건은 ‘법적 공방’이 진행 중이며, 이후에 판결이 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무게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존재하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이 사건을 접수했던 처음의 마음과 원칙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폭력 사건판결에서 균형 잡힌 시각은 찾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균형 잡힌 양팔저울을 기대하기란 너무나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성폭력 사건은 현장범이 아닌 이상, 대부분 ‘증거 불충분’이란 이유로 패소합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이겨내는 것도 모자라,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냐’ 등의 피해자 책임론에 휘말리게 됩니다. 성폭력의 모든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달려있으며, 이 증거입증 과정도 9가지가 맞더라도 단 한 가지가 모자라면 ‘증거 불충분’으로 피해사실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또,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합의된 성관계’ 아니냐는 공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MBC PD수첩의 ‘강간죄를 개혁하라’라는 방송 분을 보면 지금의 성폭력 판결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혹여나 가해자가 사회적 명망가이거나 상당한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해자가 넘어야 될 장벽은 몇 겹이나 더 두꺼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이런 어려운 장벽들을 모두 넘어 법정싸움 에서 승리한다 해도 피해자가 얻는 이득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성폭력과 관련해서 심심치 않게 피해자가 어떤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의도가 있지 않냐라는 의견이 있는데, 실제 그 피해 보상액수는 500-1000만원 정도입니다. 그에 반해 조사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사실의 고통스러운 환기와 피해자를 향한 사회의 의심의 눈초리, 그로인해 멍들어가는 정신적 피해는 돈과 같은 물질적 형태로 절대 보상 받을 수 없는 깊은 상처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의 높은 벽을 다시금 확인 하고, 급기야는 장기화 되는 법정싸움에 지쳐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납니다. 그렇기에 성폭력의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신고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선택입니다.
다시 이번 사건을 돌아보며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었음에도 여전히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성폭력 사례는 극히 드물며, 그로 인해 실제 피해자를 보호할 장치가 없기에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여성의 피해 과정에 있어서의 그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경청해주고 돕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 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접합니다. 그 이유는 십중팔구 실제로 그 마음이 진실 되지 않은데 있습니다. 잠깐의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여 책임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행했던 수많은 일들은 진심보다는 그 사건의 근본적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문제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만큼 답답한 경우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희 구성원 모두가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있는 지금의 일에 책임을 회피하거나, 덮으려는 무모하고 비원칙적인 일은 없을 것임을 다시금 약속드립니다. 경희구성원 모두가 지금의 사건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청회를 반드시 개최하겠습니다. 그리고 제안 드렸던 총여학생회 재신임 투표를 통해 끝까지 이 사건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여학우들이 이 문제에 대해 총여학생회에 엄중한 책임을 묻고 사퇴 결정을 내리신다면, 책임지고 물러날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지금 총여학생회가 할 일은 그 결정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여학우들의 입장에 서서, 총여학생회가 지켜야할 원칙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장문의 글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총여학생회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21대 희망클릭 총여학생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