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해서 고고학 계열에서의 신뢰도는 높은 편입니다. 사실 그런 부분이 몽촌토성의 본격적인 발굴 이후의 고고학적 사실과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측면도 있지요. 몽촌토성의 초기 조사에도 참여한, 김원룡 선생의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이해와 입장을 어느 정도 이어간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기원전 18년 건국설 정도를 신봉할 정도는 아니고, 근초고왕대 건국설 따위의 수준에서 적어도 고이왕대 수준으로 흐름을 앞당겨 볼 수 있다 정도의 의미는 되는 것이죠. 이 부분은 몽촌토성의 발굴 결과와도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국정교과서 시절 1980년대부터 마지막 국정교과서까지 교과서 집필을 맡았던 인사이기도 하지요. 지금 분위기를 보면 정말 국정교과서에 대한 애정이 있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라도 들어가서 균형을 잡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가신 듯 싶기도 하고... (후자는 제자들에게 하신 이야기라고 하십니다. 아는 분도 그 앞에 서서 만류하셨다고...)
최몽룡 교수가 평범하지는 않죠. 김원룡 이후 한국 고고학의 기수라고 보셔도 될 정도의 인사입니다. 현재 학계의 주류로 자리잡은 막강한 서울대 고고미술의 고고계열의 40~50대 교수들은 전부 그 영향을 받고 성장한 세대라고 해도 좋습니다. 고고학 영역으로서는 현직에 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던 인물이라고 봐도 좋을 그런 분이구요. 다만, 고대사 연구자라 할 수는 없지요. 고고학 중심인 분이고... 연구도 열성적이고, 연구에 대한 욕심도 많고, 그 만큼 결과도 많은 그런 인물입니다.
기병 관련 기록은 대부분 경기병 활용 위주의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표현도 경기가 대부분이죠. 이걸 대부분 날랜 기병 따위로 번역을 해놓아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외에도 돌기突騎 따위도 보이긴 합니다만... 역사적 용어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 기병의 무장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 세조 대에 40% 등은 어떤 기록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말은 사람 몸무게의 2배가 넘는데, 거기에 무장한 사람까지 싣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논과 같은 진창에서의 운동성은 일반 보병보다 떨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거의 운신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지요. 그 부분을 제외하면 농경지가 아닌 일부 공간만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동력을 살리는 것이나 기병 운용의 묘는 전혀 살릴 수 없습니다.
신립의 기병을 궁기병이라고 하셨는데... 엄밀히는 경기병이라고 봐야 합니다. 거기에 궁시는 기본 보유 무장 중의 하나인 것이구요. 그리고 경기병 운용은 추격용이 아닙니다. 조선의 경기병은 활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과 말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기동에 목적이 있습니다. 원거리에서 적의 '진'이 적합한 대형을 갖추기 전이나 취약 지점을 찾아서 활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고, 지속 사격보다는 일정한 무력을 투과한 뒤 적이 진형을 갖추거나 공세로 나오면 빠져나오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비교적 경무장인 경기병이 치고 빠지기가 안된다면 그건 그냥 보병의 일부 병과인 궁병/일반 보병 따위와 차이가 없는 게 됩니다. 난감한 상황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언급하신 궁기병은 사실 경기병+활이 결합된 것으로 봐도 좋고, 궁시만이 주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적의 보병이나 도망하는 적이라면 당연히 근접전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이죠. 단, 그것이 주목적이라 보기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