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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atin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1417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새창] 2008-09-27 08:20:04 10 삭제
    1
    세습이 정당하답니다. 성경에 세습하는게 정당하다는 예기가 나온답니다.
    그렇다고 이단도 아니랍니다.
    1416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에서 시작해볼까요. [새창] 2008-09-27 06:58:21 8 삭제
    그리고 계속 파고들어가보면

    한국교회의 문자주의는 결국 자기들의 친일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아닙니까?

    성경의 내용을 왜곡해서 신사참배하는 등등

    당시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이들의 논리가 조상을 모시는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논리로 알고있는데..

    아닌가요? 결국엔 자기 방어위해서 철저하게 성경그대로를 따르게 된거 아닙니까?
    1415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에서 시작해볼까요. [새창] 2008-09-27 06:52:02 9 삭제
    참고로 말해서 기독교계가 욕먹는 이유중에 하나가

    친일청산 하지 않은곳에서

    반성했다 말하고있지만

    일부 친일인사들이 꼭 그들중에서 나와서

    난리를 치니까 전체가 욕먹는거 아닙니까?

    실제 청산도 않했는데 말로만 청산했다 회개했다 이러고있고

    결국 보면 조용해질때쯤되면 그들중에 하나 나와서 난리치고

    꼭 일본애들 보는거 같지 않습니가?

    지들끼지 잘못했다 예기하고

    나중에 가서는 그들중에 한명나와서 망언 내뱉고

    그럼 또 지들중 일부가 그런거라 그러고

    꼭 일본 놈들 보는거 같아서 씁쓸하네요.
    1414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에서 시작해볼까요. [새창] 2008-09-27 06:49:42 8 삭제
    불교계와 기독교의 차이는

    현제 불교계는 친일반대승려가 주류를 이루고있고

    현제 기독교는 친일인사들의

    교회들이 주류를 이루고있지 않습니까?

    대한장로교회였던가? 딱이곳 한곳만

    친일청산과 죄가 없는 곳아닙니까?

    더해서

    순복음교회와 금란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들도 대한잘로교회인가? 그쪽노회입니까?

    아니면 친일의 계통을 숨기고 계속 이어오고 있는것입니까?
    1413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에서 시작해볼까요. [새창] 2008-09-27 06:41:27 8 삭제
    기독교계몽운동으로 친일인사 많이 나온건 사실 아닙니까?
    1412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에서 시작해볼까요. [새창] 2008-09-27 06:40:27 10 삭제
    그많은 노회중에 딱 장로회의 2개 노회에서만 신사참배 반대했고 그결과

    딱 2개의 노회에서만 투옥되고 그곳의 인사들또한 바껴서

    찬성했고요.

    그후 군대의 하급장교와 순사가 기독교의 계몽운동으로 많이 생겼죠.

    이건 피식님이랑 예기하면서 많이 나온거 같은데...

    했던예기 또하고 했던예기 또하고

    학교폐쇄 한거랑 않한거랑의 차이라면

    차라리 학교를 폐쇄 했다면 친일인사들이 나오지도 않았을꺼고

    지금까지 친일파욕들을 사람들도 적었을꺼고요

    자기 아버지 일본 순사였는데 자랑스럽다 말하는 장관도 않나왔을겁니다.

    그학교에서 하급장교및 순사 많이 나온검 무엇으로 설명하실껀데요.

    딱 2개의 노회에서만 반대해서 투옥됬다는 자료 올리면 되나요?

    아래쪽에 제가 올린거 찾아보면 나올텐데..
    1411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6:44:18 4 삭제
    쩝.. 인정하기 싫지만 먹힙니다...

    현실에서는 먹힙니다. 조그만 교회만가도 그렇습니다. 먹힙니다.

    멀리 볼것도 없이 제주변만봐도 먹힌다는거 알겠습니다.

    지역 볼거 없이 그냥 먹힙니다.

    지역보다 강한 교회의 힘입니다.
    1410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3:54:55 2 삭제
    장로회의 분열은 일정때 있지 않았나요?
    1409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3:52:04 3 삭제
    아 그런가요.. 이거 계속 찾다보니까 이거자료 가지고 한국 불교와 개신교의 근현대사 이런 주제로 한편의 논문도 쓸수있을꺼같은데..
    1408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3:42:16 2 삭제
    1

    3번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이 어찌되었던 청산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더해서 드리는말로

    당시 의회를 장악하고있던 당이 자유당입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손발이었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확인하시면 바로 아실듯합니다.(자유당이 이승만의 장기집권 하는 무슨 사건인데. 하여간 해궤하게 소수점까지 이용해서 장기집권 허용하는 법안도 통과시키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이유로 행정부의 중립을 표방한다는것은 지금 제가 아는 대로라면 정치적 쑈일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언론에대해선 말씀않드려도 아실듯합니다. 4.19때 당시 언론의 횡포가 아주잘 나타났죠...

    그리고 회개.. 죽음.. 친일과 관련되서 교회에서 대립은 없나요?
    1407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3:14:26 2 삭제
    그리고 기독교 장로회의 갈등역시 제가 전에 올려 드린걸로 아는데..
    1406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2:58:59 3 삭제
    1 카톨릭=천주교 로 알고있는데 제가 잘못알고있는지요 제가 말하는 기독교는
    개신교입니다. 천주교의 경우 중앙체제죠...

    2 피식님의 말씀대로 정화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양측의 법통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때당시 문재가 되었던

    8개 조항 ① 독신자 ② 삭발염의자 ③ 불구가 아닌 자 ④ 백치가 아닌 자 ⑤ 3인 이상의 단체 생활을 하는 자 ⑥ 살(殺)·도(盜)·음(淫)·망(妄)의 4대 범계(犯戒)를 하지 않는 자 ⑦ 술과 담배·고기를 먹지 않는 자 ⑧ 20세 이상인 자

    은 지금도 지켜져오고 있습니다. 대규모 정화 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피식님께서도 인정하실겁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불교도 친일행위를 한거는 인정하는 사항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도 친일행위를 했다. 이것도 인정될사항입니다(제가 피식님의 속뜻을 몰라서 지송)
    그럼 지금 논란이 된건 양측에서 청산활동을 했나 않했나로 나뉠수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가 불교쪽의 청산 작업을 올리고 했으나 이것은 소수 운동으로이라며 기독교 측에서도 소수운동은 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것에 더해서 불교에서는 대대적인 청산활동을 했다는 것을 저는 예기 한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대규모 청산 활동을 않했다고 말하는것입니다.

    3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드리는 말이 이승만 정권에서 과연 지지를 한것일까요? 역사의 전체적 흐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독교가 팽창할때 불교는 친일청산등의 내부갈등으로 선교활동에 제약이 있었던것은 인정하실것입니다.
    이것의 불씨를 만든것이 이승만정권입니다. 이승만정권이 친기독교적 성향이
    강했다는것과 친일적인 성향이 강하신것은 인정하실것입니다.
    그상황일진데 왜색종교 몰아내자 등등 발언으로 불교계가 양분이 나고 친일청산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종교중립 입장을 밝힌것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발언했던것은 무엇이고요? 않그렇습니까? 타의던 자의던 일단 불교계는 청산 활동을 했고 소정의 성과를 올렸습니다.(지금도 분쟁중)
    그것에 반해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친일청산했습니까? 단지 친일하지 않은교회가 따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노선을 겆고 있는 걸로 아는데. 몇명 인물들은 아시는 사실로 기독교중에 대한기독장로회는 독립운동 하신분들이 만든 교회다라는건 알고 계실겁니다. 저도 그것은 알고 기독교를 별로 않좋아해도 그쪽교회는 좋다라는 발언을 오유에서도 기독교 친일논란때 몇번 했습니다. 일단 이건 접어두고
    기독교에서는 결국 친일 청산을 못하고 단지 독립운동을 하신분들만 따로 나와서 다른 노회를 만든걸로 친일 청산이 끝낫다는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알고있는데로 친일목사들이 계속 기도교의 우두머리로 남아 있다는것이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1405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1:45:31 2 삭제
    기독교의 정화 활동이 알고 싶습니다.
    1404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1:45:15 2 삭제
    법보 신문 뿐만 아니려 여러 자료에서도

    불교의 정화 활동에 대해서 잘나옵니다.
    1403 깔려면 까라 난 나대로 깔련다. 항변할 것 있으면 항변하고.. [새창] 2008-09-26 11:42:59 5 삭제
    해방 후 한국종교사의 흐름

    목차

    1. 서론
    2. 일제에 관한 기억과 교단의 분열
    3. 신종교의 발흥
    4. 개신교의 양적 팽창
    5. 제2바티칸 공의회의 충격과 적응
    6. 전통종교의 복원: ‘미신’의 민족주의화
    7. 종교와 민주화 운동
    8. 독재정권과 불교: 호국불교로서의 정체성
    9. 개신교의 성장세 둔화와 평신도의 자각
    10. 결론

    1. 서론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은 정치, 경제 또는 다른 문화 영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를 거론하는 것은 가능한 한 회피되며,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진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헌법에 서술된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해 정당화 되고 있다. 종교는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에 관한 이야기도 사적인 영역의 범위를 벗어날 경우에는 부적절하다고 간주한다. 이 경우에 무성(茂盛)해지는 종교담론은 주로 같은 신앙을 믿고 있는 신자끼리 주고받는 것이다. 종교적 주제에 관한 공적인 언급을 제한하는 이런 소심증(小心症)은 학적인 종교담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른바 종교학이 계속해서 주변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증상과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더욱이 다루어지는 주제가 현재의 종교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이 되면, 소심증은 더욱 강화된다. 지금의 종교적 역학 관계에 직접 맞닿아 있는 주제를 언급하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해방 후의 종교사적인 흐름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는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간혹 교단의 최근 역사에 관해 서술해 놓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해방 후 한국 종교적인 상황에 대해 포괄적으로 서술한 것은 얻기 힘들다. 이 글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면,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해방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종교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제 청산의 문제와 연관된 종교적 갈등,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의 사회변동과 결부된 종교적 변동, 그리고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종교계의 대응 및 그와 상호 관련된 종교계의 민주화 현상이 거론되고 있다.

    2. 일제에 관한 기억과 교단의 분열

    1) 개신교 교파의 분열

    해방 후 개신교 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교단 인사가 행한 친일 행위의 단죄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친일 행위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신사 참배였다.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개신교에서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여 신사 참배를 행했으면서도 여전히 개신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에 대해 교회 내부의 불만이 고조된 것이다. 하지만 비난의 대상이 된 목사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갈등이 노골화 되었다.
    갈등의 강도는 장로교회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특히 장로교회의 경남 노회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경남 노회는 신차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중에서 사망한 주기철 목사 및 수감생활을 하던 목사들이 상당 수 소속되어 있던 곳이다. 이른바 출옥파라고 불린 이들은 신사 참배에 가담한 장로교회 지도부의 친일 행위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이 설립한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경남노회의 지도부를 고압적으로 압박하였고, 이에 반발한 노회 측과 갈등을 빚다가 새로운 노회를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 이른바 장로교회 내부에 고신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바이블을 문자 그대로 믿고 수용해야 한다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면서, 극단적인 보수신앙 진영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축자영감설을 비롯한 보수신앙은 고신파뿐만 아니라, 장로교의 상당 부분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조선신학교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비롯된 갈등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한국개신교의 유별난 보수신앙을 잘 보여준다. 바이블의 절대무오설과 축자영감설, 그리고 미국선교사 중심주의로 무장한 장로교신학교파와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조선신학교파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서로 끊임없이 대립하다가 1954년 대한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는 것으로 마감이 되었다.
    이후에도 장로교회의 분열은 계속되어 교회 내부의 재정 비리와 권력 다툼, 그리고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태도 문제를 둘러싸고 1959년에 다시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합동측은 고신파와 연대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양쪽 모두 몇 차례 분열이 이루어지는 등 이후에도 계속해서 장로교 내부에는 수많은 분열이 생겨나서 여러 분파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가톨릭과 같은 중앙 통제기구가 없는 개신교는 거듭된 분열을 통제할 수 없어서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게 되었고, 개신교의 개(個)교회 중심주의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런 개신교 교회 내부의 분열상을 치유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교파 분열이 반드시 부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파끼리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신도 증가에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신도의 양적인 증가가 신앙 본래의 목적과 얼마나 부합되었느냐는 심각하게 따져 봐야할 문제로 남는다.

    2) 불교: 비구와 대처승의 대립

    일제 치하 동안 일본불교의 포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승려의 결혼이 허용되는 등 일본불교화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비구승보다 대처승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 후 일제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과 함께 등장한 대처승 처리 문제는 불교계에 많은 갈등을 야기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새로운 교단 체제를 성립시키고 일제 잔재의 청산 문제를 논의하였다. 하지만 중앙총무원의 집행부 대부분은 대처승이었으므로 청산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근본적인 청산을 주장하는 혁신세력 측의 불만이 높아지게 되었다. 친일 세력이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 분노가 쌓이게 된 것이었다. 이에 선학원을 비롯한 불교혁신단체들이 모여 1946년 12월에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을 만들고, 조선불교총본원이라는 별도의 중앙기구를 결성하였다. 혁신 세력은 교도(敎徒)제 실시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승려의 권한을 수도자에게만 부여하고, 계율을 거부하는 자는 교도(일반신도)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대처승은 당연히 이를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중앙총무원과 선학원 중심의 불교총본원이란 두 단체는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교단의 기득권 세력과 혁신 세력과의 갈등은 미군정이 불교 혁신세력을 좌익으로 간주하여 탄압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반공제일주의를 남한에서 지상과제로 만들었고, 그런 분위기를 틈타서 친일세력이 다시 불교계에 복귀하였다.
    한국전쟁 후, 불교계의 내분은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계기로 다시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승만은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담화에서 교단은 청정 비구승이 담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처승은 사찰에서 떠나라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비구승들은 이를 교단 장악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교단 주도권을 쥐고 있는 대처승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대처측은 승려를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이분하여 비구와 대처의 타협을 제안한 반면, 비구측은 대처승을 승려가 아니라, 재가불자로서만 인정하겠다고 맞섰다. 그리고 비구측은 종조(宗祖)를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로 하여 태고(太古) 보우(普愚)를 모시는 대처 측과 차별화하였다.
    같은 해 11월 왜색종교를 폐기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제2차 유시가 이어지자, 비구측은 당시 교단본부인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진입하여 물리적인 폭력사태가 야기되었다. 이에 대처 측도 비구 측의 폭력사용을 비난하며 양측은 서로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문교부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으나,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 점이 없지 않았다. 양측은 끊임없이 법적 소송을 제기하며 분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4․19 학생 봉기로 인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그동안 수세에 몰려 있던 대처 측 세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지만 곧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강압적으로 비구와 대처의 통합 종단을 요구하여 1962년에 대한불교조계종을 성립시켰다. 대처측은 정부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통합종단에 가담하였지만, 정부의 비구 측 편향 정책에 불만을 감추지 않다가, 다시 법적 소송으로 대항하였다. 법원은 비구와 대처 양측에 번갈아가며 유리하게 판결을 내려 더욱 혼란이 가중되었고, 불교계 내부의 폭력사태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국 1969년 대법원이 비구 측의 주장에 합법성을 인정함으로써 비구와 대처의 법적 갈등은 일단락이 되었다. 다음 해 대처측은 한국불교태고종을 설립하여, 한국불교계는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양분하게 되었다. 비구와 대처의 사찰점유율을 살펴보면, 1946년 100:900, 1962년 300:700으로 대처 측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지만, 1964년 600:400, 1970년 950:50, 1982년 990:10으로 거꾸로 비구 측이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정화운동과 현대불교>, <<한국종교문화사강의>>, 한국종교연구회, 청년사, 1998, 418쪽
    .
    대처 측과의 싸움에서 결국 비구 측이 승리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비구 측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무자격자를 대거 영입함으로써 비구측은 스스로의 청정 자질을 훼손하였다. 그리고 교단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 권력에 내맡김으로써 불교계의 자율성은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르도록 축소되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그동안 비구-대처의 갈등 과정에서 드러났던 폭력성이 치유되지 못하고 깊이 내재화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통합종단이 성립한 다음에는 그 폭력성이 조계종단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다시 재연되었다. 주로 그것은 종정과 총무원장 사이의 알력이란 모습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계는‘정화’과정에서 생겨난 후유증 때문에 지금까지 고질적인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3. 신종교의 발흥

    해방 후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서구적 세계관의 대규모적인 유입,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충격은 기존의 문화적 기반을 동요시키면서 많은 신종교가 등장하는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일제 하에서 신종교 진영은 막강한 교세를 자랑하는 천도교, 수많은 교파로 나뉘었으나 나름대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증산교,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대종교, 그리고 독자적으로 불교를 해석하여 실천불교화한 원불교가 대표하고 있었다. 해방 후, 이들 신종교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천도교는 분단으로 부득이 북한의 천도교 세력과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분이 겹쳐 교단 재정비의 기회를 상실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재원이 고갈되었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홀대 때문에 뒷전에 가려있게 되었다. 반면 증산교의 여러 분파(예컨대 증산도, 대순진리회)는 개혁운동을 통해 새로운 신앙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원불교는 교육사업에 참여하며 새로운 도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국전쟁 후에 등장한 신종교는 주로 기독교와 연관이 있는 것이 많았다.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신종교의 특징은 메시아사상과 선민사상, 그리고 한국 토착사상과의 융합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한때 국제적으로 강력한 교세를 마련했던 통일교는 독특하게 <창세기>를 해석하고 한국 중심적인 구원론을 전개하여 기독교 신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통일교를 둘러싸고 많은 분란이 있었던 것도 신자를 빼앗긴 기독교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초(超)종교를 주장하고 있지만, 예전에 비해 교세가 많이 약해진 상태이다.
    계룡산은 수많은 신종교 단체가 군집해 있던 곳으로 유명했으나, 1984년 이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오면서 강제적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많은 신종교 단체가 여러 도시 안으로 이주하여 예전과 같이 신종교의 지리적인 중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계룡산 주변이나 모악산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신종교 단체가 남아 있다.

    4. 개신교의 양적 팽창

    일제 치하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교세는 한국 개신교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이 서북세력의 신앙적 특징은 문자주의적인 근본주의 신앙과 선교사 중심주의였다. 서북세력은 해방 후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 반공주의를 더욱 체질화 하였다. 극단적 문자주의 신앙과 체험적 반공주의를 공고히 결합시킨 이들은 북한의 탄압이 가중되자, 대규모로 월남(越南)하게 되었다. 남한에서 월남 개신교인들은 반공과 친미를 정책 근간으로 하는 미군정과 이승만 체제에 적극 협력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서북 개신교 세력은 많은 특혜를 받았으며, 미국의 개신교 선교부에서 제공되는 원조 역시 개신교의 기반 확충에 큰 기여를 하였다.
    월남 개신교인의 극우세력화, 그리고 친미세력화는 한국전쟁 후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은 “북한은 종교를 탄압하고 있는데, 적어도 남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라는 것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극단적 보수신앙 특유의 선악 이분법, 즉 ‘그들’은 절대적 악이고, ‘우리’는 절대적 선이란 양분법적 논리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국제적인 미․소의 냉전체제, 남한과 북한의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배경으로 월남 개신교인을 중심으로 한 남한의 개신교 세력은 압도적인 기득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걸고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그 결과, 1960-1970년대에 정부 주도아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인력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농촌에서 대규모의 노동력이 대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된 이들은 이전의 전통적 농촌의 삶에서 느끼던 공동체적 유대감을 주로 도시의 개신교 교회에 소속하면서 얻으려고 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성장의 수혜자인 상당수의 중산층도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른 불안감을 종교집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려고 하였다.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 수는 1960년 125만 명, 1970년 219만 명, 1980년 718만 명 <<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 관한 조사연구>>, 현대사회연구소, 1982
    으로 급격한 신도 수의 증가가 확인되고 있다.
    이 시기 개신교가 양적인 팽창과 급성장을 한 이유에는 교회가 파괴된 농촌 공동체의 대체물(代替物) 역할을 해준 측면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인한 부의 축적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1970년대에 급속한 성장을 한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그런 점을 살피는데 좋은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당시 개발독재의 정권은 “선(先)성장 후(後)분배”의 이데올로기로 노동자의 광범위한 불만을 억누르며 수출 성장주의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박탈감은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항상 고조되어 있었다. 경제성장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중간층도 이런 긴장감을 내재화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에게 쌓인 물질적인 부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순복음교회는 물질적인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게 하여 개발독재 정권의 성장주의로 형성된 중간계층의 구조적 불안감을 해소시켜준 것이다. 그 결과 순복음교회는 단일교회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급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급속한 양적 팽창은 교회 자체가 자본주의의 병폐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낳게 되어, 항상 내부적 갈등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5. 가톨릭: 제2바티칸 공의회의 충격과 적응

    제2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1962년-65년에 걸쳐 소집된 공의회 공의회(Concilium)는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주교들의 모임을 일컫는다.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이는 것이 세계 공의회로서, 가장 최근의 것이 바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로서, 이를 계기로 가톨릭교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2바티칸 공의회의 결과, 가톨릭교회는 세상과 보다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빈곤과 전쟁과 같은 구조적 폭력에 대해 무관심했던 이전의 태도에서 벗어나서,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제 중심의 교회 조직 대신에, 교회문제의 논의에 평신도가 폭넓게 참여할 수 있는 보다 민주적인 체제로 탈바꿈을 시도하였다. 의례 활동의 측면에서도 미사 때,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토착화 운동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타(他)종교와의 반목 및 기독교 내부의 여러 종교와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 간의 대화 혹은 교회일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2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가톨릭교회는 현대세계 및 그 속에 살고 있는 평신도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서구중심적인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진보적인 움직임에 대해 반발하여 이탈하는 세력도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성 비오 10세회(The Society of Saint Pius X)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제2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교회의 불변의 진리를 훼손했다고 비난하며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제2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가톨릭교회가 현대세계에 보다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하였다는 긍정적인 것이다.
    중앙집권적 체제를 지닌 가톨릭교회의 성격 상, 로마 교황청의 변화는 한국 가톨릭교회에도 커다란 파급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제2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대체적인 한국 가톨릭교회 성격은 기존 체제와의 영합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치하에는 신사참배와 노골적인 친일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고, 미군정 체제 및 제1, 2공화국과는 밀접한 우호관계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는 그동안 정치권력과 맺어온 유착관계를 반성하면서, 사회적 불의(不義)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또한 1962년에 한국 가톨릭교회가 정식교구로 인정받게 됨으로써 그동안 선교지역 교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교구로서 자율성을 지니게 되었다. 1969년 한국인 추기경의 탄생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자립성을 더욱 증진시켰다. 제2바티칸 공의회의 권고대로, 가톨릭 의례에서 한국어의 사용이 대폭 늘어났으며, 한국의 타종교와 대화가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교리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고, 평신도의 운동을 활성화하였다. 1970-8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6. 전통종교의 복원: ‘미신’의 민족주의화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적 합리성을 기준으로 가동되었으며, 그 과정은 일직선적인 진보의 방향으로 그려졌다. 낡은 것은 나쁜 것, 그리고 새 것은 좋은 것의 단순 등치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근대화를 추진해 나가면서 집단적․ 개인적 아이덴티티 확립이 절실히 요청되었고,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특히 1970년대 경제의 급격한 압축성장을 위해 가동되던 개발독재 체제로 인해 여러 가지 구조적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부는 이런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민족주체성의 확립’과 ‘민족문화의 중흥’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전통의 재발견 혹은 ‘발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이전에는 미신으로 간주되던 무속(巫俗)이 민족전통으로서 대접받게 되었다. 이전에는 근대화의 장애물로 간주되던 무속이 민족문화의 원천으로 높이 모셔지고, 경멸적인 대우를 받던 무당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인간문화재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된다.
    반면 개발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세력도 서구적 근대화에 맞서는 전통종교의 민족주의적 원천을 높이 평가하고, 무속과 민간신앙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정부와 반정부 세력 모두 ‘미신’으로 폄하되던 전통종교의 정치적 유용성을 새롭게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무속의 재평가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전통종교의 모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이란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따라서 무속의 복원은 무속 그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무당을 과거 문화의 담지자가 아니라, 현재의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은 그런 비판의 소산이다. 아무튼 정부 측과 반정부 측에서 모두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무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새롭게 무속이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7. 종교와 민주화 운동

    수출제일주의와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로 모든 사회적 모순을 덮어버리려는 박정희 정권의 노력은 곧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유신 체제가 등장하여 시민의 자율적 공간을 심하게 제약하자, 그에 반발하는 힘도 점차 강경하게 되었다. 반민주적 독재체제에 비판적인 이들이 점차 세력화 하면서 여기에 종교인도 참여하였다.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저항의 공간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서 성직자 및 종교적 공간은 매우 유용한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단 체제를 새롭게 정비한 가톨릭교회의 민주화 운동 참여가 두드러졌다. 가톨릭농민회,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발한 사회참여를 시도하였고, 교회가 억압당하고 있는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추기경의 촉구도 민주화 운동에 정당성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보수 세력이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민주화 추진 세력에 제동을 걸었으므로, 교회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의‘민주화운동’세력은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보다 활발하게 움직였고, 개신교 측과 연대하여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개신교는 대규모 부흥회를 개최하면서 개인적 회심운동을 전개하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정치의 개입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일부 개신교 단체는 산업화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의 인권보장을 위해 적극 개입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산업선교를 위해 설립된 도시산업선교회이다. 도시산업선교회는 항상 노사분규가 벌어지는 곳에 달려가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정부는 용공단체로 몰아 계속 유형․ 무형의 압박을 가하였다.
    사회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사회의 합법적 공간이 자율화되기 전까지, 종교단체와 종교공간은 민주화 운동에 활발히 동원되었다. 지금 민주화운동에서 명동성당이 갖는 상징적 위치는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종교공간은 정부의 물리력이 될 수 있는 한, 개입하기를 꺼렸으며, 당시 거의 유일한 합법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활용 가치가 매우 높았던 것이다. 또한 정교분리 원칙이 헌법에 보장된 상황에서 성직자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처리는 정부에게는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다양한 의견 표출이 보장되는 시민사회의 조건이 마련될 때까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의 중요성은 지속되었다.

    8. 독재정권과 불교: 호국불교로서의 정체성

    ‘정화’운동의 결과 성립된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으나 곧 스스로가 심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내분으로 조계종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종단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종정과 실무 책임자인 총무원장이 대립하여 사회의 여러 현안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게 되었다. 내분은 문중으로 나뉘어져 있는 불교계의 파벌싸움과 재산권 행사를 둘러싼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대처승과의 싸움이 일단 마감되자 이제는 비구승끼리의 싸움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일반인들은 불교계에 대해 실망과 냉소의 태도를 취하였다.
    1980년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를 내세워 법정 싸움과 폭력으로 얼룩진 조계종의 내분에 개입하였다. 정화운동으로 나타난 조계종이 정화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의 법당난입 사건이 불교계를 모욕한 것으로 간주되어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불교계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자랑하며 친정부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는데, 이런 정권 비호의 태도에 대해 심각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86년에는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열고, 기득권에 안주해온 여태까지의 태도를 비판하고, 불교자주화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정부 측 관점만을 지지해온 종단 지도부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승려들이 나타났으며, 포교의 활성화, 현대화의 움직임이 가속화 하였다. 내분에 골몰해 있거나 산중에서 수행에만 몰두하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발언하는 승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9. 개신교의 성장세 둔화와 평신도의 자각

    한국 개신교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유례없는 급성장과 양적 팽창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극단적 보수주의 신앙 일변도의 성향도 특징적이다. 그런 종류의 신앙은 어디나 존재하지만, 다른 성향의 신앙과 어울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한국처럼 문자주의 신앙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지역은 지구상에 아무 곳도 없다. 그만큼 학자들의 좋은 연구 주제이다. 물론 은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조차도 그런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개신교의 유례없는 양적 성장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금 줄기차게 계속된 개신교의 성장세가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양적 성장은 계속 되고 있더라도, 성장속도와 성장률이 이미 하락하고 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개신교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로 야기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문제점을 알고 있고, 금란교회와 순복음 교회에서 나타난 목사비리나 내부갈등에 관해서도 알고 있다. 세금을 내는 일 없이, 그리고 사회 복지에 환원하는 일 없이, 엄청난 현금을 만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최근의 사태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 바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종교 엘리트의 행동 방식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기 시작한 평신도가 발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제도종교의 환부는 여전히 뿌리 깊지만, 이전에는 종교집단 내에서 소외되었던 평신도가 이제는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 바뀌고 있는 점이다. 여태까지 종교 엘리트의 권위를 절대시하던 평신도가 이제 종교집단의 권위구조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종교 엘리트가 스스로 제도종교의 고질적 문제점을 극복할 수 없다면 남은 길은 평신도가 나서서 해결책을 찾는 일이다. 만약 이럴 때 평신도도 침묵하고 있다면 그 종교는 곧 생존능력을 잃게 되지 않겠는가?
    개신교 평신도의 자각과 함께, 불교 평신도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많은 사찰의 운영이 돈 많은 보살의 시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다면, 그리고 그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불교 평신도의 몫은 언제나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찰 운영 방식이 조금씩 바뀌어 간다면, 그리고 평신도의 목소리가 사찰 운영에 민주적으로 반영된다면, 불교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보다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다.
    종교엘리트와 평신도의 관계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서로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보완 관계이다. 따라서 평신도의 활발한 참여를 보장하는 장치 마련이 앞으로의 종교적 발전을 이룩하는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개신교의 성장률 둔화는 여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개신교가 이 메시지를 어떻게 수용하고 배워서 대처할 것인가에 개신교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는 개신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종교는 여태껏 모두 개신교를 모델로 하여 모방해 왔기 때문에 개신교의 문제는 다른 종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10. 결론

    지금까지 다룬 해방 후 한국 종교의 흐름은 일제 청산, 한국전쟁의 충격에 대한 대응,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민주화 등의 주요 문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종교가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을 지니고 있지만, 사회 변동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종교 스스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된 초점은 사회의 변동이 종교에 미친 측면이다. 하지만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종교의 모습이 그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종교 영역 자체의 내부적 역학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이지만, 이 글에서는 다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근대성의 체제를 이룬 한국, 중국, 일본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비교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역시 다루어지지 못했다. 예컨대 한중일 삼국에서 개신교가 지닌 특징을 파악하는 문제나 불교적 성격을 살피는 문제는 한국 종교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과제이다. 곧 이루어져야 할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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