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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atin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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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atin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1312 안재환씨의 결단에 촛불네티즌들의 반응이 영향을 [새창] 2008-09-19 18:46:45 1 삭제
    안재환씨만 불쌍한거죠..

    사업할 안목도 없고 그릇도 않되는 사람이 그런건데.. 쩝.


    1311 정선희 측근 눈물고백 - 누리꾼 반응 [새창] 2008-09-19 18:44:51 5/4 삭제
    안재환이가 그냥 자기가 판단 실수한거 때문에 망한거 아니였나?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거기에다가 촛불 운운하는건 좀 한심하다 생각 들어서 하느말입니다

    물론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기지만요..

    술장사 잘되면 그거나 꾸준이 하면서 내실다질생각이나 하지

    뭐하러 영화찍는 다고 돈투자 하고또 그거 때문에 자금난

    허덕이면서 화장품 사업에 돈투자하는건지

    경기래도 좋아서 소비심리래도 좀 좋으면 말을 않해요..

    있는 사업도 정리하고 규모 축소하고있는 현실인데..

    사채까지 써가면서 사업했으니...

    이건 사업가로써 안재환씨가 실수한것입니다.

    그리고.. 투자가들한테 참좋은 명언있죠.

    절대 연예인이 관련된 사업에는 투자하지마라...

    이상 제 혼자 생각 이었습니다.

    참고로 반대도 먹을 생각으로 적었습니다 그럼 이만...

    1310 한국 교회의 사유화와 그 문제점 [새창] 2008-09-19 18:35:33 0 삭제
    한국교회의 문재점이라면 쩝.. 그냥 십일조라든지

    각종 헌금이 너무 강조되어있어서 그런거 같기도 함...

    솔찍이 종교에 과대포장은 있기 마련이니 그렇저렇 넘어 간다쳐도

    선교활동 왕성하게 하는거도 어떻게 보면 저 사람 신심있구나

    보일수도있지만...

    교회에 성금 내는 제도 같은거 보면 나한테 선교활동을 하는건지

    판매활동을 하는건지 애매함...

    자기네 교회와서 돈내라는 거지 선교하는거 같지는 않음...

    가끔씩 앞쪽 교회 사람이랑 뒷집 교회 사람이랑 서로 자기네

    교회오라고 할때면.. 조금 한심함...

    그냥 이정도.. 십일조 가지고 모라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글을 봐서

    이렇게 남겨요...
    1309 황국신민화 내몰렸던 조선불교의 슬픈 자화상 [새창] 2008-09-19 18:28:51 4 삭제
    피식님 말 생각 한번 곰곰이 해보면

    1 기독교만 친일행위 않했다 불교도 친일 행위했다

    그런데 왜 기독교만 욕먹냐?

    이것입니까? 아니면

    2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친일 행위 많이 했다

    아니면

    3 기독교는 깨끗한데 불교가 친일행위 했다 그런데 너희들이 몰르고있는거다

    이거입니까?

    개인적으로는 1번 아님녀 2번같은데....

    결국엔 누워서 침뱉기 아닙니까?

    불교계의 친일 인사들은 어떻게 정리가 됬고

    기독교계의 친일 인사들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

    비교해서 올려주시는게 님의 뜻에 부합될꺼 같은데.....

    그냥 이렇게 적어 올립니다..
    1308 한국 교회의 사유화와 그 문제점 [새창] 2008-09-19 18:23:54 0 삭제
    솔찍이 십일조 내던 말던 내가 상관할바는 아니지만..

    깨끗한척은 혼자 다하면서 그돈 가지고 모하는지 궁금함...

    비 기독교인이라 도와줄수 없다면

    지나가는 불쌍한개 한테 밥이래도

    한끼 먹이던가...

    자기네가 걷은돈 뭐라 쓰는지 관심 갇지 말라고 하신다면

    주변에 선교래도 하지 말던가.. 자기네 종교 믿으라는게 결국엔

    십일조 내라는 말 아닌가? 그냥 집에 편안이 사는 사람한테

    십일조 내라고 자꾸 강요 하는데 내가 관심갖으면 않되는 건가?

    궁금하네...
    1307 황국신민화 내몰렸던 조선불교의 슬픈 자화상 [새창] 2008-09-19 18:16:49 2 삭제
    생각해보면 어퍼치나 돌려치나 누워서 침뱉기 같은데....
    1306 피식이 너누냐 남의 논문도 지맘대로 뒤죽박죽에 짜마춰서 올리냐 [새창] 2008-09-19 11:52:07 1 삭제
    친일이니 조선시대 법이랑은 상관없더구만 .,ㅡ
    1305 피식이 너누냐 남의 논문도 지맘대로 뒤죽박죽에 짜마춰서 올리냐 [새창] 2008-09-19 11:48:43 1 삭제
    그리고 절 문재는 등기를 늦게해서 땅소유권이 불확실하는게

    국가로 귀속시킬수있다는 주장의 근거 논지이고 ,.ㅡ
    1304 피식이 너누냐 남의 논문도 지맘대로 뒤죽박죽에 짜마춰서 올리냐 [새창] 2008-09-19 11:47:21 1 삭제
    아니 그건 묘소에관련되서 임야 소유권을 인정할수없다는 예기자나 .,ㅡ

    그것두 친일파애들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자기 조상이

    그곳에 안치되있어서 그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니까

    그것의 소유권을 인정할수없다는 말이자나 .,ㅡ
    1303 한 불교인에 대한 글 [새창] 2008-09-19 11:39:54 5 삭제
    1.황사영을 시켜 나라는 진멸해도 된다는 사랑의 논리를 설파하고 순교하게 하심....
    또 들으니 그 나라 왕이 나이 어려 아직 왕비를 맞지 않았다 하니 만약 종실(宗室)의 딸 하나를 골라 공주라 하여 시집을 보내어 왕비를 삼는다면 왕은 사위가 되고 이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자연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요 또한 몽고를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중하다 했으니 이 나라를 전멸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진대 ....

    (황사영 백서란 프랑스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프랑스 군대를 동원하여 정부를 갈아엎어달라는 청원을 기술하였기에 반역죄로 처형당한것임.....)

    이건 절대 반역이 아니라 순교라고 우기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심.....

    2. 선교사들에게 금광, 벌목,철도부설권을 독점하게하여 기독원국의 국부충당과 선교자금을 확충하게 하심...

    미국 선교사 알렌은 첫 발전소 계획을 세우고 그 이권이득 ,미국 기업체들로부터 전화 및 수도시설을 끌어들여 이득. ...평북도 운산금광의 채굴권 팔아 넘겨 당시 1500만 달러의 국부유출.
    알렌은 ‘을미사변’전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민비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이노우에의 제의에 따라 리조왕실의 안전을 일본침략군에게 맡기도록 설복함으로써 일제를 도와줌.

    언더우드는 석유와 석탄 등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이득.

    마펫은 압록강 주변의 산림 채벌권을 얻어 거대한 목재 재벌.

    선교사 리젠드르는 1백만 달라의 자본을 투하하여 고진동과 대유동, 수안과 강릉 등 굴지의 광산들에서 ‘채굴권’을 틀어 쥐고 금, 은을 비롯한 지하자원을 약탈해 갔으며 수많은 공장들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조선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

    미국 선교사 해리스는.. 소생은 자기의 직무상 한국재류의 모든 선교사와 일본에 호의를 가지고… 실은 통감정치의 가장 열심있는 지지자임을 고백합니다 라는 글을 냈고

    미국 선교사 호기스는 1908년 10월 조선통감부를 찾아가 정치의 불간섭을 선서하고 광주의 구세군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 개입한다는 것을 구실로 그 관영을 해산하여 일제의 통치체제 수립을 도와줌.

    미국 선교사 존스는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제도에 순종할 것을 설교.

    헐버트는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

    평양주재 미국 선교사 불레비는 ‘조선 교회는 일제의 침략세력을 미워하는 죄를 회개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원수도 사랑하는 무맥한 순종을 설교.

    아~ 복음의 씨앗을 내려주신 이분들의 발자취를 기념하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랍고 복된 일이구낭~~~

    3. 삼일운동당시에 목사님들의 안전도모....

    예수님은 33인중 기독교인사 13명의 목사와 3명의 전도사는 2달전부터 동참연락을 받았음에도 기도하느라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2월 28일 밤이 되서야 서명하시게 했다....

    더구나, 그후 16명의 목사들은 모두 친일파로 변절했으니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탄이 절로 나올뿐이다...

    더구나 기독교계의 돈을 낭비하지 않도록 이승훈 목사를 들어쓰시면서 성전건축하려고 모았던 헌금 95만원을 거사자금으로 책정한 천도교에게서 5000원을 빌리게 하시고 아직도 안갚은 목사님들을 축복하신다.....

    .....할렐루야...아멘......

    4.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끔 인도하셨다....

    독립운동가들은 고향과 처자식을 버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면서 타지에서 쓰레기죽으로 연명하면서 종교적 보루인 대종교(97%), 사상적 보루인 사회주의(95%)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게 하심으로써 미국을 역사하여 기독교계 인사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하셨다.....

    당시 김구 여운형선생께서는 중국인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한 반면에

    이승만 서재필등은 월급 385달러, 롤스로이스 승용차를 굴리면서 독립운동을 할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예처럼 일하면서 독립자금 헌납한 동포들의 주급은 2달라)

    광복군 조직대에도 돈줄을 쥐고 있게 함으로써
    비리로 인하여 24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탄핵되었던
    이승만장로님을 다시금 대통령에 취임할수 있도록 역사하셨다.......
    놀라운 예수님의 역사이다....할렐루야!!!!

    5. 친일의 길을 인도하심으로서 (도륙당한 천도교와는 정반대로)

    기독교계의 융성을 이끌어주셨다...

    조선 장로호 비행기도 바치고 젊은이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하시게 함....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國民精神總動員 朝鮮耶蘇敎長老會 聯盟,일명 精動 長老會總會聯盟)
    소속 목사들(총 206명)


    강두송/강병철/강석진/강신명/강헌집/강흥수/경환/계일승/고득순/고려위/고봉윤/
    곽진근/권오균/권중여/김경덕/김광수/김교영/김규언/김기현/김기형/김길창/김낙영/
    김내흥/김대업/김두헌/김득주/김리현/김만곤/김만일/김범진/김병률/김봉아/김석진/
    김석창/김석흥/김선환/김성준/김성찬/김성호/김세영/김수영/김영서/김영환/김영후/
    김용삼/김용출/김우필/김윤찬/김은석/김응순/김의문/김이철/김인빈/김재철/김정묵/
    김정오/김정칠/김제각/김진국/김창립/김천덕/김치근/김태호/김하원/김혁동/김현정/
    김형관/김형모/김형숙/김홍식/김화식/김희섭/나기환/목영석/문신규/문재린/문재희/
    민영률/박경희/박동환/박례헌/박병호/박봉로/박상철/박선택/박순석/박승준/박영기/
    박용희/박응률/박태선/방경수/방학성/배운환/배창교/백낙원/백남철/백일선/변봉조/
    사칠현/서명준/서성일/서재곤/손창헌/송재찬/송형칠/송화익/신봉정/신영욱/신후식/
    심문태/심상민/안봉진/양윤묵/양찬언/염학기/오경신/오기주/오용갑/오응식/용희창/
    우연석/유상봉/유창세/유흥렬/윤석귀/윤원삼/윤주한/윤하영/윤하영/이경즙/이계수/
    이권찬/이규을/이기방/이남규/이도봉/이동희/이문주/이병식/이보식/이상백/이수현
    이승길/이영은/이영태/이영희/이우항/이운목/이운형/이윤의/이정로/이정심/이주석
    이지양/이창규/이창섭/이창철/이태학/이학인/이홍필/이희영/이희정/임척호/장기순
    장병윤/장애경/장운경/장인호/전기형/전수창/전필순/정규삼/정기헌/정순모/정재면
    정재순/정진률/정헌주/조두현/조승익/조승제/조승환/조택수/조희상/조희염/주영신
    주형옥/지군일/지문상/최광훈/최병준/최봉주/최상섭/최성주/최익순/최지화/한경직
    한익동/함종흡/허담/허덕화/홍우석/홍종섭/홍택기/황주옥

    이 단체의 국가·황민·교회에 대한 방침....

    국가에의 봉공

    1) 대동아전쟁 목적 완수에 협력함과 동시에 사상의 완벽을 기할 것.
    2) 시국의 진전에 즉웅하여 여러 교회 및 여러 단체를 전시체제화하여 국가적 요청에
    청헌(請獻)할 것.
    3) 징병 의무 및 정신을 높이 강조하여 신도에게 철저하게 할 것.
    4) 총후 봉공의 목적으로 다음 사항을 장려할 것.
    황군 상이 장병 및 유가족의 위문, 군사원호 사업, 국민저축의 실시, 귀금철류의 헌납
    전시 생활지도와 절약 운동, 전시 근로 봉사, 매월 정액의 국방헌금, 신사참배 및 전승기원의 여행

    황민의 동성

    5) 각 신도의 가정마다 대마(大麻)를 봉재하고 황도정신을 철저히 할 것.
    6)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충군애국의 정신과 경신숭조의 정신을 함양할 것.
    7) 아국(我國)의 순풍미속을 존중하고 질실(質實) 강직한 기풍을 길러 견인 지구의 공고한 의지를 연성할 것.
    8) 신도(信徒)의 황민동성의 실을 거두기 위하여 황국 고전 및 국체의존에 관한 지도 교본을 편찬할 것.
    9) 각 소(所)에 동성회를 개최하고 교사(목사) 및 신도의 동성에 노력하며 특히 황국 문화의 연구 지도를 도모할 것.

    교회의 필신

    10) 기독교 교사(목사)로서의 교양을 높이고 솔선 수범하여 세상의 사표가 되는 실을 거두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실시할 것. 현 교사의 신학적 재교육운동, 교사양성 기관의 정비
    11) 일본기독교를 확립하기 위하여 특히 전문가로서 일본교학의 연찬에 노력하고 일본적 신학을 수립시킬 것.
    12) 말세·심판·재림 등은 세상적·물질적 해설을 고쳐 그것을 종교적·심령적으로 해설할 것.
    13)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그 적당한 해석 교본을 편찬할 것.
    14) 전시에 있는 반도 교화의 실을 거두기 위하여 신앙 부흥 및 전도 진흥의 구체적 방법을 강구할 것.
    15) 신도필휴·신찬미가·기도문 및 예전 요의(要義) 등을 편찬할 것.
    16) 국어(일본어) 상용을 극력 장려할 것.
    17) 예배당은 신축 또는 개축할 경우 일본적 양식을 고려할 것.
    18) 예배 혹은 집회 양식에 대하여는 연구를 진행하여 될 수 있는 한 일본적 풍습을 채용할 것

    김활란 여사님(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의 은혜로운 강연

    태평양전쟁으로 징용, 징병, 정신대 동원을 지지하는 강연과 기고...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25)

    6. 두번씩이나 양들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게 하심으로서 옥체를 보전하사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개신교의 횃불이 되게 인도하심...

    이선교 목사님의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 에 나옴.

    6.25 때 서울 사수를 주장하다 신도들 냅두고 먼저 도망(도망 안친놈만 쪼다만듬) 유엔군이 북진하자 평양에 까지 가서 집회하다가 중공군이 내려오자 시민들에게는 알려주지도 않고 먼저 토끼도록 역사하심....(예수님도 토끼신적 있으므로 죄가 안됨)

    자유당 때에는 프린스턴 선배인 이승만 대통령과도 섭섭치 않는 관계를 유지하였고 당시 많은 지도자 목사들도 자유당 정권의 선거에 장로대통령이라고 김영삼대통령에게 그런 것같이 충성을 맹세.

    눈치없는 지도자 목사들을 인도하사 4.19가 내일 모레인데 3.15선거가 공명선거였다고 성명을 내도록 역사하심......

    5.16 한달후 김활란 이대 총장, 정일권씨 등과 더불어 미국까지 가서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외치게 인도하셨으며 ...

    박정희 정권과도 섭섭치 않은 관계를 유지하게 하시면서 조찬기도회에서 박대통령을 모세같은 지도자가 되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하게 하심....

    그시각 그자리에서 박정희씨는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어도 사랑으로 다~ 용서하심...

    5.18 학살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호텔에서 모인 기도모임에서 "전두환을 여호수아같은 지도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도록 영빨을 주심....할렐루야!!!

    7. 역사의 유적지들을 보전하도록 인도하심....


    선교사들의 휴양지였던 지리산 노고단 왕시루봉의 별장 폐허터 10만평을 기독교 유적지로지정되어 국고로 국립공원내 위락시설을 복원토록 역사하심.....

    당시의 시설물은 영빈관(호텔), 강당(2층 높이, 33평), 발전실, 상점, 진료실, 목공소, 주택 등 58동인데, 33.5평, 33평, 31.6평 등의 규모가 큰 건물도 있었다.

    자재들은 누가 지고 날랐을까?
    선교사님들은 산꼭대기까지 가마타고 올라가시는 은혜를 베풀음....
    그 가마는 물론 이방인(?)들이 들게 하셨다...

    제암리감리교회에서 죽임을 당한자들은 천도교인들이 대다수였음에도 기독교성지로 탈바꿈시킴.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서 천주교인 5명을 숨겨주다 같이 처형당한 스님 5명의 위패대신에 천주교 성지라는 비석을 세워 위로해주심.....


    그냥 재미있는 글이라서 올림니다

    1302 한 불교인에 대한 글 [새창] 2008-09-19 11:32:19 4 삭제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인과 鄭仁果, 창씨명 德川仁果, 1888∼1972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결성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38년에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장로회 총회는
    이듬해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 연맹 이사장으로 윤하영 목사,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를 선임하여
    '종교보국'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부일협력에 나섰다. 다음은 1940년
    정인과 목사가 총회에 보고한 이 연맹의 사업 내용이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私的)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이만하면'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의록}, 1940, 87∼94면)

    이는 장로교가 다른 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여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러한 장로교 부일협력의 중심적인 인물이 바로
    정인과 목사였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정인과의 본적지는 경성으로 되어 있지만 평남 순천 태생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잠시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8월 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9년 산·엔셀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 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의
    교포단체인 국민회는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봉사"하게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에 따라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파견하고 정인과, 황진남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5일 미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5월 25일 목적지인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6월 28일에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게 되고,
    안창호를 수행했던 정인과와 황진남은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8월 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시
    부의장이었던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서 업무 때문에 부의장을 사임함에 따라
    부의장 보선 투표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손정도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의장인 정인과가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외무차장을 맡아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동양
    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 등과 함께 이들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1920년 10월경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그의 사임은 1921년 3월 18일 제1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수리되었다)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인과는 임시정부에서 떠나기는 하였지만 바로 국내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다시 건너가 1921년 프린스턴 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같은 대학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년 11월말경 입국하여 1925년부터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다. 그 때부터 그는 각종 강연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중국 남경발로 정인과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정인과 씨 환영.……12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풍상을 겪으며 학업에
    힘쓰던 정인과(鄭仁果) 씨는 재작년 미국 가주(加州:캘리포니아)에서 신학(神學)을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더욱 연구를 가하야 신학사(神學士)와
    문학사(文學士)의 존귀한 학위를 얻고 다시 교육학을 연구하다가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고 동아의 그리운 땅을
    밟고저 나오던 길에 상해에 들렸는데 동지의 간곡한 권고를 못이겨 할 수
    없이 길을 멈추고 중국에 얼마 동안 있게 되었는 바,……씨는 년전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띠고 많이 노력한 일도 있었다더라.
    이러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인과는 일제 경찰에 의해 평소에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성진에서 개최된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에서 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30년 1월 25일에
    보안법위반 혐의로 3일간 성진경찰서 구류되어 조사를 받고 불구속으로
    풀려났다가 그 해 5월에야 경성지법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고향인 평남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소행 조서]에서는 그를
    "성품이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다"라 한 뒤,
    "전과는 없으나,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요시찰인(要視察人)에 편입되어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동우회
    사건이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 지식인 내지 지도자들을
    적극적인 정책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그간
    묵인하거나 방조하였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사건이었다.
    정인과는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서도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도 적극적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방 후
    어떤 목사는 익명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타무라(北村)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영전되자 H의 활동 무대는
    서울로 옮겨졌고 대담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 중 선교사가 쫓겨나자
    대영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작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종교교육부의 C를 무사히 석방시켜준 구실로 그를 황국신민으로 전향케 하여,
    군기헌납운동에 열광케 했다.

    여기는 H는 오문환이요, C는 정인과 목사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듬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상치위원회는 1940년 11월 성명과 함께
    [장로회지도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의 본의에 기하야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야 과거
    구미(歐美)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질서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매일신보}, 1940. 11. 10)
    이어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 것과 찬미가 등 전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일본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이미 일제측이 마련한 것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제측의 요구대로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상치위원회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본질까지도 내팽개치고 교회를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르는 어용
    교회기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특히 정인과가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 도쿠가와(德川仁果)라는
    창씨명으로 각노회연맹 이사장에게 보낸 [헌종(獻鐘)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공문은 위협적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일제에 협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 4월 24일부로 공문을 발하였던 바, 5월 5일까지
    다수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全)노회의 보고 통계서를 작성함에
    곤란할 뿐더러 당국 관계 방면에도 크게 영향이 되는 동시에 귀노회연맹의
    사무처리상에도 여하한 영향이 미치게 될 점까지 착념하여,……귀노회 연맹의
    헌종 보고서를 꼭 제출하도록 주의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기독교신문}, 1942. 5. 20)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회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매일신보}에
    194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3회에 걸쳐 기고한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이라는 글에서 장로교의 친일협력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간에 그
    거단(巨團)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 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서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 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 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해 마지 아니한다.
    즉, 부일협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청할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미·영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 {조광}
    1942년 2월호에도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친일논설을 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정인과를 매우 신뢰했으며 또한 비호했던 것 같다. 한때
    신사참배문제로 60일 동안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전필순은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신문할 때 사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 헌트(韓富善)
    씨와 결탁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 장본인을 지명수배해서 잡아
    가두어 그 일을 좌절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물은 정인과 씨인데 장본인은 나를 위시한 모모
    인사들이라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 사이가(齋賀)라는 작자의
    설명이었다. 그는 또 정인과 씨와 사이가 좋아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고려할 일이지마는,
    여하간 분노가 들끓어 치솟던 것만은 사실이었다.({목회여운}, 97면)
    성서공회도 영국인 홉스 총무가 떠난 후 정태응 총무가 맡고 있었으나 일제
    당국은 그를 간첩혐의로 검속하고 1941년 4월 1일부터 정인과에게 맡기도록
    지시하였다가, 이듬해 5월 23일자로 적산으로 압류하고 말았다.
    일제가 모든 기독교계 신문 잡지를 폐간시킨 후 1942년 4월 유일한
    교계언론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사노(佐野吾作)는 정인과 목사를 이 신문의 발간 주체인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이것도 그가 얼마나 일제 경찰의 신임을 얻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일제 경찰에 철저히 '순응'하여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소위 천장절에 창간호를
    내게 되는데, 정인과는 이 신문의 창간사에서 발행 목적과 강령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고로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의(趣意)하에 본보는
    1. 반도 기독교 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1. 각교파 간 돈목(敦睦)의 기도(企圖)와 각파 간의 연계 합동의 추진
    1. 건전한 신앙의 발달과 교화기능의 증진
    1. 종교의 국민정신작흥과 국민사상 계도
    1. 상의하달(上意下達)과 하정상통(下情相通)의 원활
    1. 필승체제 확립에 관한 계도(啓導)
    1.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1. 국민 개로(皆勞)
    1. 부인 계발
    1. 교내 여론의 통일 지도
    등 강령을 실행하려 한다.
    이 신문은 그 첫호부터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충실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계 부일협력의 유일한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정인과 목사는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행각 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1949년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민자 죄상기}(1949)는 ['유다'의 직계 정인과]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22일 특위는 8·15 전 일제에 충성하는 데 민족과 신앙을 판 새로운
    '유다' 정인과를 체포하였다.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목사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주께 영광이 있으라'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던
    목사 정인과는 배신자로서 '유다'도 놀라게끔 전쟁 말기에 온갖 매족·매교
    행위를 하였으니 기독교 대신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를 모시고 기독교
    총진회장이 되어 신도배(神道輩)들과 손을 잡고 신궁참배를 한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남산 돌층계를 오르내렸으며, 십자가 앞에 수난의 미사를 올리는
    양같은 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 신궁참배를 시켰다. 여기서 한 수를 더 떠
    헌금헌납운동을 일으키고 신궁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비국민'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 '참회를 하라'고 도리어 꾸짖고 대들었으며,
    신궁참배 않는 교회는 그 교회당까지 일제와 손을 잡고 폐쇄 혹은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신궁을 참배하자', '성전(聖戰)에 헌금 헌납을 하자',
    '신도와 황도를 모시고 이 앞에 고개 숙여 기도를 하자'고 설교하기에 목이
    쉴 지경이었으며 여기서 더욱 광신에 들떠 '미소기(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인용자)를 한 번 해 보지' 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기독교를 팔고 민족을 파는 데 애쓴 대한판(大韓版) '유다' 정인과는
    지금 죄의 심판을 앞두고 신궁 대신 철창 안에서 무슨 기도를 또 하느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후에도 교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송탄 등지에서 외롭게 은거하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鄭春洙, 창씨명 禾谷春洙, 1875∼1951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4년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그대 일생을 내 집에서 길렀노라

    어찌타 벗을 잘못 만나 외도에 눈이 떠서

    원수의 신주(神酒)에 그대 넋을 녹이길래

    '아스소 그 술은 못 마실 술이라오'

    이렇게 눈물로 몇 번이나 충고했던고?


    외도에 팔린 정신 신주(神酒)에 넋을 잃어

    미칠 듯 날뛰던 그대 꼴을 보았노라

    몽치 들어 죄 없는 가족을 내어쫓고

    아까울손 선조 유산 눅거리로 팔아다가

    요부(妖夫)의 무릎 앞에 바치지 않았는가

    ……

    신주(神酒)에 취튼 마음 구주(舊酒)에 팔렸는가

    어찌타 술을 배워 신세를 망치는고?

    사람이란 절개 갖어 값이 나나니

    젊어서 잘못 배운 술 늙어서 끊은들 어떠리

    ({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이 산문시는 정춘수가 일제 말기에 부일협력을 하다가 해방 후 천주교로
    '개종'하여 신의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풍자하여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러한 비판을 받는가.


    3·1 독립선언식의 지각자


    정춘수도 처음부터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는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2월 16일경 서울에 갔다가 박희도*, 오화영(吳華英) 등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장을 맡기고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원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이가순, 곽명리 등을 포섭하여 서울과 연락하며 운동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독립선언 일자가 3월 1일로 잡힌 것을 알고 그 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그는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된 것을 알고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서명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하여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는
    이 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후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등을 전임하다가,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의 본부 간사로 선임되기도 하였고, 1934년부터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감리교 총리원 이사에 피선되어 교회 행정에
    깊이 간여하였다.

    그는 이 무렵 신흥우가 조직한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8년 5월경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류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업구락부는 이미 1935년 이후 내분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고,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하여 1938년
    9월 3일 관계자 전원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모두 풀려나 부일협력 활동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는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다가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여 종래의 포회(抱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당함에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로 끝맺고 있다({매일신보}, 1938. 9.
    4).


    교회종까지 갖다 바친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것은 반드시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의
    간부로 참여하고 있었다. 즉, 그는 1938년 5월 8일 일제의 사주로
    전도보국·황도실천을 위해 창립된 '경성기독교연합회'에 일본인 목사
    아키츠키(秋月致)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메소디스트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친일행각이 본격화된 것은 1939년 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권장악을 위하여 일제의 지시에
    충실히 '순응'하여 1940년 10월 그가 주재하는 총리원 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과 함께 감리교 '혁신안'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아(我)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고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新案)을 솔선 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 1940. 10. 4)


    이 혁신안은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배격, 일본 정신의 함양, 일본
    메소디스트교회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규정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한편, 1941년 3월에는 국민총력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른
    새교단규칙을 마련하여 교단을 재조직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와
    21일에는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어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1942년 2월 13일에는 정춘수 통리자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 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춘수의 전횡은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켜 1942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자, 그는 일본 경찰의 지원을
    받아 총회해산을 공고하였다. 이런 와중에 잠시 변홍규가 통리자가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1943년 10월에 열린 교단 총회에서 정춘수가
    통리에 다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비호 아래 교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려는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켜
    실천하였다({기독교신문}, 1944. 4. 1).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라 그 해 5월부터는 예배설교시 구약성서와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4복음서만 사용하도록 하며 예배집회 시간도 단축하여 주 1회만 집회를 갖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하였다.

    정통리가 이끄는 감리교단 본부는 1944년 9월 서울의 상동교회 예배당에
    이른바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을 모아 일본
    정신과 문화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한강으로 끌고 가 신도(神道)의
    재계의식인 미소기하라이(계발)를 행하게 하고,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머리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뛰어가 신사에 참배하게 하였다.

    당시 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八木信雄)의 회고록인 {일본과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도(神道)의 의식인 '미소기'를 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야기와 친근한 박준영(朴駿榮, 본명 喜多毅:그는 한국인으로 드물게
    일본의 신궁황학관 출신이었다)이 야기를 찾아와 "나와 친근한 기독교 간부들
    사이에 최근 기독교 탄압의 소문이 화제가 되어 매우 걱정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상의한 결과 목사들에게 신도(神道)의 계행사(계行事:미소기 행사, 즉
    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를 시켜서 기독교도 또한 참다운
    일본인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하여 탄압을 면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합의를 보았다.……그래서 직접 그 기독교 간부들을 상면하여 그
    의중을 타진한 후 가능한 한 비호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준영의 소개로 '기독교 감리파의 정춘수와 이동욱 씨를 상면한 결과' 그의
    말과 틀림없었고 그 후 기독교계 목사들이 계행사를 할 때 야기가 초청을
    받아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정춘수 등이 자진하여 기독교계에서 신도의식인 '미소기'를 하겠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정춘수의 이와 같은 일제당국과의 관계는 해방 후 감리교
    재건파측에서 나온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도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조선 전 기독교를 신도화(神道化)시켜 일제의 주구를 만들기 위해 1943년에
    이르러 당시의 보안과장 야기(八木信雄), 정학회(正學會)의
    기다(喜田毅:朴駿榮),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 등의 절대한 원호와
    사주를 받아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을 조직했었다. 그러나 전선유지신도와
    교역자들의 결사적인 반대투쟁으로 혁신교단이 탄생 후 1개월에 유산되어
    버리고 말자 그들은 다시 경찰당국의 힘을 빌어 감리교회의 영도권을 잡고
    배신·배족의 죄행(罪行)을 대담무쌍히 감행하여 온 것이다.


    이어서 그들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가운데 "정춘수 이하 간부들은
    동포의 황민화를 위한 기독교의 변질을 전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에게
    서약하였고 기독교 요인 모해에 관한 최고 비밀 상담역이 되어 있었다(1946년
    5월 6일 남조선형무소 목사 회의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근무하던 나가사키의
    고백)"고 하며 증인까지 밝히고 있다.

    마경일 목사도 그의 회고록(1984)에서 일제 말기 정춘수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경찰은 '총진회'(總進會)라는 것을 만들어 정춘수 감독을 회장으로,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그것은 결국 경찰의 앞잡이 역할이었다.

    '총진회'란 결국 당시 크리스찬들의 성분이며 사상 등을 조사하여 그들을
    선량한(?) 황국신민으로 전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하나, 실은
    교회와 신도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였다고 함이 타당하다. 이를테면 그
    기관은 일본 경찰과 밀착된 일종의 '비밀 경찰'의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춘수는 이와 같은 교계 안에서의 부일협력뿐만이 아니라, 1941년 초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의 1인으로 참여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단체의 평의원을 맡았으며, 1944년 말경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천주교로 '개종'의 변


    해방 후 감리교계는 교회의 재건 방향을 둘러싸고 부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분열을 가져왔다. 재건파는 주로 정춘수가 통리자로 있을 때 교계에서
    소외되거나 징계를 당했던 사람들로 교계 내의 부일세력의 숙청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47년 2월 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정춘수를 비롯한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를
    발표하였다.


    1940년부터 왜적의 경찰과 군부를 업고 우리 교회를 마음대로 농락질하던
    이른바 혁명파 배신교역자들은 감리교회의 재건을 거절하고 방해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작당하여 가지고 이른바 남부대회를 빙자하다가 나중에는
    부흥파니 무엇이니 하면서 교파 하나를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죄상가죄(罪上加罪)하였다.……

    우리 교회가 천직을 감당하여 인류에게 행복을 끼치며 건국 도상에 우리 조선
    민족에게 큰 공헌이 있으려면 교회 안에 그와 같이 불순하고 부정한 자들을
    그냥 두고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 재건을 주장할 때에 친일적이요 배신적인 그들의 숙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정춘수는 해방 후 감리교 내부에서도 친일파의
    거두로 지목되어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더욱이 1949년 초에는 이러한 친일
    전력 때문에 국회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안팎으로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또 한 번 변신을 하였다. 1949년
    10월 어느 날 서울 명동성당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든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 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였고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서
    진정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고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 올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족손(族孫)
    정인환의 집에 머물다가 1951년 10월 27일 피난지에서 79세로 생을
    마감했다.({천주교회보}, 1952. 12. 23).
    1301 한 불교인에 대한 글 [새창] 2008-09-19 11:20:50 3 삭제
    국내 민족주의자중에 변절하지 않은사람이 윤동주 시인 한분뿐이 없다고 아는데...
    1300 한 불교인에 대한 글 [새창] 2008-09-19 11:17:09 3 삭제
    저글만 보면 친일파라고... 웅?
    1299 한 불교인에 대한 글 [새창] 2008-09-19 11:10:23 3 삭제
    이런식으로 올리면 되는건가...
    1298 한 불교인에 대한 글 [새창] 2008-09-19 11:08:40 3 삭제
    박희도 : 33인중 최연소자.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창간. 잡지 '동광'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로 돌아섬. '48년 반민특위에 회부. 1951년 사망.

    이갑성 : 기독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상해로 망명. 해방 후 자유당 창당에 깊이 관여. '81년 작고.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변질된 것으로 추정됨.

    정춘수 : 3.1 운동 당시 감리교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운동 지도. '34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고문. 신사참배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51년 사망.

    길선주 : 한국 최초의 목사. 3.1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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