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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7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7:49:39 1 삭제

    조계종 총무원 중앙기록관 소재. 1947년 김법린 스님이 미군정청 재산관리관에 보낸 서신.

    군정법령은 3년 동안 감행된 미군정청의 무단통치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군정법령은 남한의 의회나 국민투표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군정법령에 따른 정치·경제적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미군정청의 통치효율성과 친미세력과 친일 잔재세력들의 기득권강화 및 예속적 한미관계를 공고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특히 미군정은 군정법령 2호인 ‘재산이전 금지법’을 이용해 적산이라는 미명하에 미군정청이 국·공유재산과 일본인의 재산을 접수·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한 전체 재산의 8할이 ‘적산’이었던 점을 감안 할 때, 미국의 ‘적산불하’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미군정은 적산을‘불하’하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기만적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불교계는 해방후 일본인 소유의 사찰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불교계의 적산사찰 접수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군정청이 적산사찰을 친미주의자들과 친일잔재세력 및 기도교에 우선적으로 불하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불교중앙총무원장 김법린 스님은 군정청재산관리관에게 ‘종교재산이양의 건’이라는 서신을 보내면서 그 내용을 적고 있다. ‘일년 반이 경과했지만 어떤 도에서는 모리배의 준동인지 혹은 폭민들의 불법행위인지는 모르되 이 원칙이 전연망각되고 말살되고 또는 무시되어서 당연히 우리 불교에게 이양되어야 할 재산이 하등연고 없는 단체 또는 개인에게 불법점거내지는 부정당하게 이양됐다’는 내용이다.

    당시 적산사원은 857개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에는 46년 일간지 <신생> 3월호에 중앙 총무원에서 경성내 일본사원 43개를 접수 관리한다고 기사화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군정은 종교관련 법규의 개폐와 종교관련 적산의 배분을 이용해 기독교 위주의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1947년 8월 입법의원은 사찰재산임시보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 취지는 종교의 자유를 가로막는 사찰령을 폐지하고 사찰의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에 의해 일본불교의 적산이 조선불교라는 일개의 종교단체로 귀속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법안의 인준을 거부했다.

    미군정 당시 일본종교의 적산은 막대했다. 미군정 당시 일본종교의 적산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귀속재산 처리와 관련된 법에 공인된 교화단체라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아 종교관련 적산이 대부분 기독교에 불하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미군정 당국으로서는 남한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종교의 귀속재산도 그런 맥락에서 처리됐을 것이다. 해방후 10년 동안 2000여 개의 개신교 교회가 신설되었다.

    그중 90%이상이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교회였다. 이들 피난민의 교회설립에 일본종교의 귀속재산이 많은 도움이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56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7:49:16 1 삭제
    한민족과 불교계는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해방이라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잠시 뿐이었다. 미군정의 진주는 점령군만이 변한 것뿐이었다.

    미군정 3년과 이승만 단독정부는 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한번 꺾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른바 민족종교의 차별과 기독교 우대정책이었다. 이 시기의 불교정책은 일제 사찰령 등 일제가 한국불교를 예속화시키기 위해 만든 제도적 장치의 유지 및 기독교 우대정책,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멸시 등 민족종교의 차별정책으로 대표될 수 있다.

    조선불교 중앙총무원과 불교혁신세력에서 사찰령 및 불교악법폐지를 위해 건의서를 올리는 등 폐지 운동을 펼쳤지만 1947년 1월 25일 미군정청 문교장관은 각도지사에게 ‘사찰 재산의 처분의 경우에는 기존의 사찰령에 의거해 소정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결국 사찰령은 1962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어 사찰령을 모법으로 하는 불교재산관리법으로 대체됐다.
    미군정청과 이승만 단독정부는 기독교 우대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쳤다. 첫째는 기독교인 인사 등용, 둘째로는 최초 민간방송을 기독교방송 설립허가, 셋째로는 크리스마스 공휴일 지정과 군목제도 실시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이후에 민족자본의 형성과 전후 경제의 복구라는 큰 과제 앞에 선교자금에 기반한 외국인이 운영하는 선교목적의 기독교 방송의 설립인가는 기독교에 대한 특혜로 밖에 볼 수 없다.

    군목제도는 51년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명령으로 실시된다. 이 명령에 따라 70여 명의 목사, 신부가 일선에 종군했다. 그에 비해 불교의 군승제도는 1968년 국방부령 제124호에 의해 실시됐다.

    크리스마스는 53년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에 의해 공휴일로 정해졌다. 이에 비해 불교의 부처님오신날은 1975년 1월 14일 법정 소송의 와중에 이뤄졌다.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정해진 것은 이승만정권의 권력핵심인사 및 정부관료들의 종교로 개신교가 많았기 때문이다.

    1946년 12월부터 47년 8월까지 군정청에 임명된 군정 각 부처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가운데 7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이들 전원은 미국 유학출신자들이었으며, 46년 12월 7일 발표된 입법의원 90명 중 21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친미, 반공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승만 정권에 대거 참여한 사람들에게 친미, 숭미 이데올로기는 한국 교회의 뿌리 깊은 문화적 제국주의를 튼튼하게 하게 만들었다.

    1355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7:48:10 1 삭제
    만당은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된 것이 바로 만당활동의 산물이었다. 만당은 불교청년운동의 이면단체로서 청년운동의 방향 등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만당의 활동은 청년운동에 그치지 않고 불교계 교정 전반에 미쳤다.

    만당의 당원들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핵심적인 주도자로 활동했다.

    커져가던 만당의 위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은 1932년 가을부터다. 당원이었던 정상진과 허영호가 재단법인 교무원 증자문제로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 됐다.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추가로 증자를 할 수는 없다”는 정상진의 반대론과 “재정이 어려워도 증자를 해야 한다”는 허영호의 찬성론이 정면으로 부딪쳐 조직의 여론이 양분됐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상호가 당(黨)의 뜻을 어기고 교무원 이사라는 교단의 중앙 요직에 진출한 것이었다.

    만당의 내분은 격화됐다. 이용조는 “‘이색분자’를 제거하고 조직을 재가동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원들은 “그 경우 조직이 외부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격분한 이용조는 1932년 겨울, 만주 지린(吉林)으로 떠났다. 만당의 실질적 해체는 최범술의 회고에 따르면 “당원들은 1933년 4월 동해루란 곳에서 모였다”며 “이 자리에서 최범술이 ‘동지들 간의 불화를 우려해’ 조직의 해산을 제안, 만당 해체와 ‘총동맹’ 간부 개편을 결정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직이 와해된 만당은 1938년 고초를 겪게 된다. “만당은 1938년 일제에 노출돼 6차례의 검거선풍으로 당원들이 일제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았다”고 임중빈은 한용운 일대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지족암의 임혜봉 스님은 “만당은 내부고발보다는 내부의 의견충돌에 따른 알력다툼과 일제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서 와해 됐다”고 평가했다. 혜봉 스님은 또한, “1938년 8월 김법린과 박근섭이 체포되고, 1942년 초엔 만당 멤버 최범술과 그의 스승 임환경, 만당 관련자 김범부·이대천 등이 체포됐다”고 덧붙였다.

    만당의 정신적 지주인 만해 한용운 선사는 구속 당원들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신구대학의 전보삼 교수는“한용운 선사는 진주에서 검거된 최범술·장도환·박근섭 동지들이 장부의 기개를 잃지 말고 꿋꿋이 싸우라고 격려하며 꽃다발을 선사해 주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박근섭은 훗날 ‘대장부의 전도를 (꽃다발로) 축하해주는 만해 한용운의 역설적 표현을 만당 동지들은 큰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최범술은 회고록에서 “내가 주지로 있던 다솔사에 김법린, 김범부와 한용운을 비롯한 만당 당원 다수가 모여들어 일종의 집합처 역할을 했다”고 술회했다.

    만당 당원들은 정식 재판을 받지 않았고, 그로 인해 이제 경찰의 심문조서나 재판기록이 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체된 당원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점에 기인한다. 증거 불충분으로 정식 재판을 받지 않고 사건이 종료된 것 같다.

    임혜봉 스님은 만당의 활동은 불교인들의 항일 독립단체로서 정교분리를 주장하고 이후 국채보상운동 등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또한, 만당의 당원들은 다른 독립단체에 가입하면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1354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7:47:30 1 삭제
    1920년대 불교청년운동은 제반 여건의 미비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만당은 그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두됐다. 만당 결성의 주역인 이용조 씨의 회고문은 1924년 4월 이후,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등 네사람은 불교계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자주 교류했으며 그들의 교류와 토론은 만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불교계 교정의 모순과 불교청년운동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순교정신을 가진 동지들을 대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1930년 5월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등 4명의 1차 결사가 있었고, 조은택, 박창두, 강재호, 최봉수 등을 포섭한 2차 결사, 박영희, 박윤진, 강유문, 박근섭 한성훈 김해윤 등의 불교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한 3차 결사가 있었다.

    만당의 당원들은 당원으로서의 서약인 ‘비민한사엄수’ 및 ‘당의절대복종’을 지키기로 하고 만약 서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생명을 바친다는 각오로 활동했다. 만당의 당수는 한용운을 추대했으나 한용운에게는 통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당결사 자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부분은 박영희 씨의 회고와 차이가 있다. 박영희 씨는 “어느날 만해 스님이 학교로 나를 찾아오셨어. 그리고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이니 인물을 물색하라고 지시했지. 그래서 옛날 함께 운동했던 최범술·이용조·강재호·박근섭을 만나 탑골 근처에서 막걸리 한 잔씩 마시고 결사불변(決死不變)의 맹세를 했지. 그 뒤 점차 동지를 규합했는데 30~40명을 확보했지”라고 회고하고 있다.

    중요 쟁점은 만당이 결성될 당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실질적인 만당의 당수로서 활동을 했는지 여부다. 아직 이용조 씨와 박영희 씨의 회고외에는 이렇다할 만당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만당의 당원들이 정신적 지주로서 만해 한용운 선생을 의지하고 만당의 중요사안에 대해서 자문을 구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광식 교수는 “만당은 불교계 항일결사로서 제대로 활동한 최초의 불교청년 항일결사였다”며 “만당 당원이 아닌 외부인 정 모씨가 일본에 밀고를 하면서 만당 다원들이 검거됐다는 기록은 있다”고 만당의 활동을 평가했다.

    지하조직 만당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이란 단체를 조직, 지상에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대한불교’ 회고를 통해 이용조씨는 “만당이 이면조직이 되어, 표면조직으로 ‘불교청년총동맹’을 조직하고 경향각지에 청년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청년운동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된 것은 모두 당원들이 본부 지령을 받고 이면활동을 한 까닭이었으며 또 이 청년운동을 통하여 당원 후보를 많이 획득할 수도 있었다”고 밝혔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만당이 배후에서 청년운동을 조직, 후원했다는 점 ▲본부의 ‘지령’에 의해 당원들이 움직였다는 점 ▲전국 각지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지하조직으로서의 만당 활동은 아직까지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일본·프랑스 등 해외유학자가 많아 서구 사상을 갖고 있었을 것이며 ▲3·1운동 참가자들이 있는 것으로 미뤄 항일·민족의식이 높았을 것이고 ▲강령으로 미뤄 불교 대중화와 교단혁신에 역점을 뒀을 것이라고 추론할 뿐이다.

    김광식 교수는 “중앙에서 출발한 만당은 점차 조직을 지방, 나아가 일본으로까지 확대했다”며 “불교 교정(敎政) 전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러 단결의식과 통일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1353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7:47:01 1 삭제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한국불교는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에 의해 1600년의 한국불교 흐름이 왜곡됐다.
    친일성향이 강한 30본산 주지세력에 의해 한국불교는 대처식육을 하는 등 수행납자로서의 풍토는 사라져갔다.
    이런 친일적 성향이 강한 한국불교는 3.1운동을 기점으로 젊은 승려들의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이 싹트면서 조선불교 청년회, 조선불교 유신회, 선학원 설립, 만당 등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일본의 외압에서 한국불교를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교단의 기득권을 가지고 일제와 결탁한 주지세력과 불교혁신세력들의 내실부족으로 지리멸렬하는 한계성을 가지게 됐다.

    조선총독이 30본사 주지들의 인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상황하에서 주지계층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 총독부 권력과 타협했다. 불교계의 청년 승려들은 관권과 결탁한 일부 주지 계층의 권위적인 행태를 시정하고 불교계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려고 했다. 불교청년운동의 시발점은 1910년 임제종 설립운동이다. 하지만 불교청년운동은 총독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항상 감시와 통제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불교유신회는 강대련을 필두로한 친일성향이 강한 교무원과 자주성을 지키려는 총무원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시기에 총무원과 함께 불교의 자주성확립과 개혁을 위해 1921년 김법광 외 4인의 발기로 탄생했다. 유신회는 교단에 불교개혁을 위한 교육과 포교에 힘쓸 것에 대한 건의안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신회는 당시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의 친일행위가 조선불교의 존망을 위태롭게 한다는 의견을 모으고 명고추출사건을 벌였다. 명고추출사건이란 유신회원들이 강대련이 등에 소고를 지우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명고추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남대문에서 종로 네거리를 지나 동대문으로 행진하면서 망신을 준 사건을 말한다. 이일로 유신회원들은 징역형을 살았다

    유신회는 불교계의 최대 장애였던 사찰령 폐지운동을 전개했다.
    유신회는 총독부에 사찰령 건백서를 제출하면서 30본산제도의 시행으로 본산 주지들은 자리다툼에 골몰하고 있으며, 말사 주지를 압박해 부질없이 원망하는 폐단이 생기고 불교사업이 황폐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사찰령을 하루속히 폐지하고 불교계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유신회는 1924년 자주의식을 가진 총무원이 친일성향을 가진 교무원에 흡수되면서 침체의 길을 걷게 됐다.

    친일성향이 강한 교무원과는 달른 교단의 수행풍토를 진작시키기 위해 비구승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선학원은 백용성, 송만공, 오성월 등 민족적 성격이 강하던 스님들이 불교의 진리를 널리 펴고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발족했다. 선학원은 식민지 시기 전통선맥을 회복하고자 했다. 선학원이 사나 암이라는 이름이 아니고 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총독부의 사찰령에 반대해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의식의 발로였다. 그러나 선학원은 1926년 재정난으로 인해 침체의 길을 걷다 1931년 송만공의 제자로 한의학에 능통한 김적음 스님이 선학원을 인수함으로써 중흥이 계기를 마련했다.

    선학원은 선의 대중화에 노력하면서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해 내실을 기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선학원은 재단법인화 했다. 법인화 되면서 과거 전통선맥을 계승하는 민족적 자주의식이 변모하면서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만공스님의 손상좌로 1940년에 출가한 진암 스님은 “1940년 예산 수덕사에서 출가했어. 당시 일본놈들 무섭게 몰아쳤지. 일제전쟁에 쓸 용품, 광솔기름, 스님들 부역, 절 놋그릇, 종 농사지어도 다 가져갔어”라며 “당시에는 애국자가 절에 많이 숨어있었어. 김구선생도 마곡사에서 주지했어. 일본사람들이 애국자를 색출하기 위해 본산제도 만들고 주지도 맘대로 오라가라, 사찰령도 만들고 여러 가지 불교를 위하는 척하면서 값진 보물 빼가고 했어”라고 회고했다.

    진암 스님은 또한, “용주사 주지 강대련은 남총독의 수양아들이었어. 일본놈들이 31본산 주지를 중앙청에 모아 놓고 일본사람들이 베풀어준 소감을 말해라 하니 강대련이가 불교를 잘 도와주고 했는데 그 은혜가 백공난망이라고 찬양했어, 그 때 마곡사주지인 만공스님이 하는 말이 스님하나를 술집만 가르쳐줘도 500생 동안 조막손 벌을 받는데 산해총독이 7000승려를 파계시키고 중을 장가들게 했으니 지옥에 들어갔다. 스님들은 공부를 빨리 해서 지옥에서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어, 당시 통역을 맡았던 해인사 주지 최범술이가 진땀뺐어”라고 당시 상황을 덧붙였다.

    진암 스님은 범어사 오성월 스님, 봉익동 대각사 백용성 스님, 만공 스님 3분이 대처승들이 절에서 수좌들을 안재워주고 돈 조금 줘서 여관으로 내쫓는 등 비구스님들을 학대해서 수좌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선학원을 설립했다고 증언했다.




    1352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7:46:46 2 삭제
    한국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암흑기를 보내면서 삼국시대 및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탄압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돼왔다.

    16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10만에 달하는 승려의 수는 1909년 황성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승려 수는 비구, 비구니를 합해 5781명, 사찰 수 957개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렇게 탄압을 받던 한국불교는 일본불교를 동경하면서 쇠락한 한국불교를 부흥시키고자 이회광 스님을 비롯한 전국 승려 대표들이 통일종단 재건을 위해 노력, 원종을 창종하지만 정부로 부터 인가를 받지 못하고 이회광 스님이 정부인가를 받기 위해 일본 종파 조동종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불 매종 행위라고 지탄을 받았고, 한용운 스님을 비롯한 한국불교의 자주적 종단건설을 주장하는 스님들이 임제종을 창종하게됐다.

    1910년 한일합방이 있은 이듬해인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 도구의 하나로 한국사원 행정에 관한 법령인 사찰령을 제정하고 사찰령 시행규칙을 반포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수호와 발전을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원종과 임제종을 탄압 해산시키고 총독부가 교단의 역할을 하며, 30본산제도를 만들어 본산주지들을 회유, 세속화 시켜 전국사찰을 관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사찰령의 성격은 사찰의 폐합·이전 내지 일체의 사찰기물에 대한 총독의 허가가 아니면 건드릴 수 없게 돼 있다. 사찰령시행규칙은 시행규칙 2조에 따라 본사주지는 총독, 본말주지는 도장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강제해 일제가 조정하기 곤란한 인물일 경우 언제든지 이를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찰행정의 주체인 주지를 관권으로 임면하고 주지들은 또 그 관권을 배경으로 사찰의 온갖 실권을 총람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일제하의 한국불교 특징은 소위 ‘주지전횡시대’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종전의 지극히 민주주의적이었던 산중공의제도는 소멸하게 됐다.

    또한, 사찰령 3조에 따라 각 본사에서 제정, 총독의 인가를 받아 실시했다고 하는 각 본말사 사법의 성격이다. 그것은 조선 총독의 앞잡이로서 주지의 권력이 자뭇 비대하게 규정된 것과 불자들을 되도록 순량한 인민으로 유도시키려는 내용들을 삽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는 강점기 36년동안 본산주지들을 지나치게 속화 타락하게 한 결과, 교단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했다. 사찰의 온갖 재산에 대한 처분 및 관리권이 주지에게 갔고 동시에 인사의 출척이 얼마든지 가능토록 만든 것이 사찰령및 사법이다.

    1932년 불교 100호에 장도환 관북 순회 개감에서 장도환 씨는 “1930년 유점사 주지가 도청 출장 때 3백원씩을 소비한 예가 있다던가 본산 주지급의 호사는 5천석 지주가 부럽지 않다”고 회고하는 등 당시 일제에 의해 속화 된 본산 주지들의 전횡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찰의 타락상을 일반 언론계에서도 그 패악성를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934년 12월 16일자 사설에서 ‘사찰령을 폐지하라’는 제목하에 사찰령으로 인한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찰령에 의한 불교계의 부정적인 면을 우려했다.

    사찰령에 의해 세속화 된 주지들은 친일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결국 일제말기 대동아전쟁에서 불리해진 일본은 친일 스님들을 이용해 스님들을 군인, 징용 및 보국대로 차출하게 하는 일까지 해 한국불교의 젊은 스님들과 삼보정재까지 파탄나게 만들었다.

    일제시대 때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서 출가한 경주 흥륜사 천경림 선원에 주석하고 있는 혜해 스님은“그 당시는 일본 놈들이 스님들도 모두 군인으로, 노동자로 징용 빼가고 비구니 스님들도 보국대로 끌려갔어”라며 “그 놈들은 사명스님 처럼 도인 못되게 독신 스님들에게 장가가라고 강요했어, 젊은 스님는 그 당시 못살았어, 일본 놈들 얘기는 말하고 싶지않아”라고 말했다.

    1351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6:26:56 3 삭제
    불교로 하면 물어 볼거리도있고 잘못된 자료있으면 찾아서 반박이래도 하지 원
    1350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6:26:21 4 삭제
    불교로 해요 재미 있네요
    1349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6:23:57 4 삭제
    하긴...
    1348 증산도는 슬 접을까? 다음번은 누구? [새창] 2008-09-24 16:13:40 5 삭제
    재미 있으세요?
    1347 일왕 명치(明治), 왜 상제님의 양장(良將)인가? [새창] 2008-09-23 22:33:59 3 삭제
    글올리시는 분의 예의로써 궁금해서 물어 보는 것에 답변좀 부탁드릴뿐...
    1346 일왕 명치(明治), 왜 상제님의 양장(良將)인가? [새창] 2008-09-23 22:27:18 3 삭제
    쩝 까놓고 기독교 성경에 제대로 자기들 신을 제대로 표현할려면

    하나님이라고 하면 않되지 쩝...
    1345 일왕 명치(明治), 왜 상제님의 양장(良將)인가? [새창] 2008-09-23 22:24:45 4 삭제
    쩝 웃긴건 성경만 진실이라는거 다른건 죄다 구라...

    내 보기엔 기독교 입장에서 성경이 진실이고

    불교입장에선 불경이 진실이고

    증산도 입장에서는 저게 진실이겠지.. 쩝..

    남의 경전가지고 깔꺼면 성경가지고 까면 그냥 가만이 계세요 쩝...

    1344 일부기독교가 그렇다구요? 잘 생각해보세요.. [새창] 2008-09-23 14:54:17 3 삭제
    "한국교회가 사회정의와 사회윤리를 생각하는 설교를 했다면 교회는 대형화되기 어렵다"

    이재철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를 설교의 위기라고 정의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설교는 대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철 목사는 9월 17일 열린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소장 이태형)가 주최한 '설교 컨퍼런스'에서 “한국교회가 1970년대부터 대형화를 추구하면서 결국 교회다움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교인 숫자는 줄고 있지만 대형교회의 교인 수는 늘고 있다"면서 "대형교회 교인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며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최대 병폐를 '물량주의·기복신앙·이기주의'라고 설명하고 이는"사람들이 대형화를 추구하고 교회도 대형교회를 추구하면서 문제의 진원지가 대형교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를 오랜 시간 경험했던 서구의 신학자가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개인, 돈 밖에 모른다"는 주장을 빌려서 설명했다. 그는 "한국교회 교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봉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교로 돌렸다. “교인들이 그런 설교만 듣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고 꼬집었다. 즉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고, 예배당에서의 윤리는 강조하지만 예배당 밖에서의 윤리와 사회정의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사도바울은 복음을 미끼로 삼지 않았다"며 "수많은 목회자들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성공신화 등 십자가의 영광이 없는 듣기 좋은 설교만 했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교인이 듣기 좋은 설교가 아닌 꼭 들어야 하는 설교를 대형교회에서 선포했다면 그 교회 교인으로 인해 세상은 10번이라도 새로워 질 수 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설교자의 자세를 강조했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의 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서 “자기를 헌신하고 자기를 부정할 때, 설교자의 말이 어눌하고 표현력이 짧더라도 교인은 이를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각자 주어진 사역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들려주는 메시지에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설교 할 때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343 일부기독교가 그렇다구요? 잘 생각해보세요.. [새창] 2008-09-23 14:54:17 5 삭제
    "한국교회가 사회정의와 사회윤리를 생각하는 설교를 했다면 교회는 대형화되기 어렵다"

    이재철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를 설교의 위기라고 정의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설교는 대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철 목사는 9월 17일 열린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소장 이태형)가 주최한 '설교 컨퍼런스'에서 “한국교회가 1970년대부터 대형화를 추구하면서 결국 교회다움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교인 숫자는 줄고 있지만 대형교회의 교인 수는 늘고 있다"면서 "대형교회 교인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며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최대 병폐를 '물량주의·기복신앙·이기주의'라고 설명하고 이는"사람들이 대형화를 추구하고 교회도 대형교회를 추구하면서 문제의 진원지가 대형교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를 오랜 시간 경험했던 서구의 신학자가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개인, 돈 밖에 모른다"는 주장을 빌려서 설명했다. 그는 "한국교회 교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봉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교로 돌렸다. “교인들이 그런 설교만 듣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고 꼬집었다. 즉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고, 예배당에서의 윤리는 강조하지만 예배당 밖에서의 윤리와 사회정의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사도바울은 복음을 미끼로 삼지 않았다"며 "수많은 목회자들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성공신화 등 십자가의 영광이 없는 듣기 좋은 설교만 했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교인이 듣기 좋은 설교가 아닌 꼭 들어야 하는 설교를 대형교회에서 선포했다면 그 교회 교인으로 인해 세상은 10번이라도 새로워 질 수 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설교자의 자세를 강조했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의 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서 “자기를 헌신하고 자기를 부정할 때, 설교자의 말이 어눌하고 표현력이 짧더라도 교인은 이를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각자 주어진 사역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들려주는 메시지에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설교 할 때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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