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상황에서는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서 다른 분께서 얘기해 주셨지만, 이 상황에서의 '고의성'이라는 것은 다른 부대원들이 윤 일병을 '죽이기 위해서' 사전 모의를 했다거나 하는 등의 정황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부대원들이 윤 일병을 정말이지 집요하고 악랄하게 괴롭히기는 했지만, 명백한 살의를 가지고 (사전 모의, 살인 계획 등의) 이러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증명할 수가 없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고의성이 다분한' 살인죄로 그들을 기소했을 경우,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 혹은 경미한 수준의 판결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게 됐을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해서는 부대원들에게 다시 죄를 물을 수가 없게 됩니다. 최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 경우 군 검찰에서는 조사 과정에서 '고의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정쩡하게 기소했다가 무죄 판결이 날 위험보다는 좀 더 확실한 유죄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서이지요.
다만 감정상 5~30년형은 좀 약하다는 생각은 듭니다. 더군다나 관례적으로도 검사가 구형한 형량에서 판사의 재량으로 20~50% 가량 삭감된 판결이 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같은 문창과 학생으로서 참 반가운 화두입니다. 저는 시 전공은 아닙니다만 짧게나마 의견을 내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을 포함한 모든 작품은 결국 소비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그것을 즐기고 향유하는 계층이 있을 때야말로 그것은 작품으로서 가치를 발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현대 한국문학은 어떻습니까? 최근 10년간 작품을 발표한 작가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5명만 말해보라, 했을 때 그 자리에서 척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요. 현대 한국문학이 현실의 독자층과는 점점 유리되어 가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하상욱의 시는 이 부분에서 가치를 발합니다. 하상욱의 작품은 현대 한국인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위트 있게 표현해 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예술로서 가장 중요한,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을 폭 넓게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상욱의 시는 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시의 범주에 들어갈 수는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하상욱의 시가 작품으로서의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한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성 있는 작품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좀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하상욱의 시가 시로서 명쾌하게 정의되지 못하는 것은, 그 형식적인 부분에 기인합니다. 앞서 몇 분께서 언급하셨다시피, 하상욱의 작품은 시라기보다는 짧은 산문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상의 틈새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사건, 사물을 소재로 하여, 참신한 시각에서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분명 높이 평가 받을 만합니다. 소위 말하는 '낯설게 하기'가 적용된 아주 좋은 예시라고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상욱의 작품은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합니다. 시란 곧 운문에 속하며, 운문에 속하는 글은 그것이 정형시이든 자유시이든, 심지어는 산문시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운율을 포함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하상욱 작품을 볼까요.
바빴다는건 이유였을까 핑계였을까 - 헬스장
생각의 차이일까 오해의 문제일까 - 미용실
보시다시피 기초적인 운율은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말 그대로 '기초'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지요. 형식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 결코 눈에 띄는 창의성이 엿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상욱의 시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즉 운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은 갖추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형식적인 면에서의 표현력은, 딱 잘라 말해서, 수준 이하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하상욱의 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쟁점이 되는 것이지요.
정리하겠습니다.
하상욱의 시는 운문으로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시'의 범주에 간신히 속하는 수준입니다. 다만 형식미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독창적이라거나 창의적인 부분은 일절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본 이하의, 기초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하상욱 시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상욱 시가 가치를 발하는 부분은 그 특유의 위트에서 비롯된, 공감대를 잡아내는 능력입니다. 이 부분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하상욱 시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은근히 돌려 까는 듯한 뉘앙스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하상욱 작품과 그것을 읽은 독자의 반응을 보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 현대소설은 서사 구조, 주제의식 등의 요소에서 결코 미흡한 부분이 없음에도, 현대 독자와는 다소 동떨어진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소설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일본 소설은 굉장히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것을 봐 왔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하상욱은 독특한 모델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심도 깊은 주제의식이나 뛰어나고 독창적인 형식미 이전에, 하상욱 시는 가볍고 위트 있는 시로 독자 계층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경우니까요.
하상욱에게 미래 한국 문학의 지향점이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상욱의 작품과 그에 대한 독자 계층의 반응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현실의 독자층과 유리되어 가는 현대 한국문학을 위해 반드시 한번쯤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