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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 갑자기 연락도없이 웬일이세요?
[새창]
2016-02-23 10: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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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간 파먹은 매형이랍니다. ㅋㅋ 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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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독일의 서로 다른 전후 경험.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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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2 17: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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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현재의 정치, 경제적 지위도 중요한 변수인 것 같습니다.
아래 나무위키 해당 항목 글 발췌해 봅니다.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현재 세계 강대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방 강대국들의 정치와 외교,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태인, 폴란드나 체코,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벨기에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게 전쟁 피해를 겪었거나 싸운 적이 있었던 유럽 국가들[9]에게 외교적으로 밉보이지 않기 위해 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독일은 '과거에 저지를 잘못을 인정 할 줄 아는 멋진 나라' 라는 인식이 옆나라 일본때문인지 상당히 크게 퍼져있는데, 사실 그 과거 식민지로 삼았던 탄자니아,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저지른 학살, 인권탄압 등에 독일 정부는 지금까지 사과나 보상을 안 하고 있다. 결국 독일도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소문이 퍼진 유럽의 전쟁 피해국들이나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전쟁, 침략 등은 사죄하고 있지만, 힘 없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아프리카 국가들의 식민지 침략이나 학살과 인권 탄압등에 대해선 보상은 물론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위대의 전쟁범죄는 비난하고 군대로 인정하지도 않는 반면 국방군의 전쟁범죄에는 쉬쉬하고 오히려 "전부 어쩔수 없이 끌려갔던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집시 학살에 대해서도 별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당시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태인, 동성애자, 양심수들과 함께 미개 인종으로 분류되어 도매금으로 묶여 수용소에 끌려간 집시들이 매우 많은데도 독일은 이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국방군이 동부전선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다루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는 국방군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참전용사로부터 거센 항의는 물론 테러까지 행해졌다
1464
환향녀와 위안부
[새창]
2016-02-22 17: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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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가부장적, 남성적 시각으로 피해자를 바라봐서 그런 것 아닐까요? 이건 매우 뜨거운 감자인데요. 우리 민족의 내부의 부끄러운 민낯과 섹스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가부장적, 남성적 문화가 있기 때문이죠. 뒤에서 온갖 부끄러운 짓은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엄숙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척하는 그런 이중적, 위선적 문화가 위안부 문제와 겹치니까 온갖 모순이 생기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463
환향녀와 위안부
[새창]
2016-02-22 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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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옹호 글로 읽혔다면 제 엉터리 글솜씨를 탓해야겠군요.. 민족과 국가의 가치를 의심하면 달을 안보고 똥묻은 손가락 탓을 받게 되는건 어찌보면 당연.
1462
환향녀와 위안부
[새창]
2016-02-22 09: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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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유하가 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잘못은 있어요... 글을 읽다보니 예전 여명의 눈동자에서 채시라와 색계의 탕웨이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ㅡ..ㅡ;
1461
환향녀와 위안부
[새창]
2016-02-22 09: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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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우리 민족 내부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는 눈을감고 일본국 탓만 해야하는 것인가... 그게 과연 제2의 위안부의 역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일까... 이런 반성적인 글이였습니다..
1460
네셔널리즘적 언론과 특정운동단체의 탄압으로부터 박유하 교수를 지킵시다.
[새창]
2016-02-21 22: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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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헤드라인 기사만 읽고 분노할 게 아니라 아래 링크에 무료로 읽어볼 책 있으니까
한번씩 읽어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읽은 후 제 느낌은..
섹스와 민족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건드린..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욕먹는 작가??라는 느낌?
장정일 교수도 옹호하는 걸 보니.. 흠.. 진보도 보수도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작가군요..
살아계신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글도 아니고..
당시 위안부는 어찌 모집됐고, 정신대와 위안부는 어찌 다른지... 이렇게 설명한 글인것 같은데..
마녀 사냥 느낌은 있네요..
1458
네셔널리즘적 언론과 특정운동단체의 탄압으로부터 박유하 교수를 지킵시다.
[새창]
2016-02-21 19: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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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안의 협력자들
앞서의 센다의 책에는 어느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1970년대 초반, ‘충
청북도 출신의 쉰네 살’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 갔지만, 1940년 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촌이었던 우리 고향
에 키가 작은 일본인 남자가 와서 “돈 되는 일이 있다. 일은 편하고 식사도 제공
된다”면서 여러 집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마을마다 일본인 경찰의 주재소
가 있었는데, 그런 경찰이나 면장(원문에는 괄호 안에 ‘촌장村長’이라고 쓰여 있다-
인용자)을 대동하고 다녔으니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생활이 여의치
않은 농가에서 몇 사람 응모했습니다. 응모는 미혼인 젊은 여성만 할 수 있었습
니다. 일본 내지의 방적공장이나 군의 피복공장 등에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에, 사람들은 그런 일로 생각하고 응모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101쪽)
‘키 작은 일본인 남자’가 중간업자나 포주였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런데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닌 ‘면장(촌장)’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협조한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마을의 어느 집에 대상이 될 만
한 ‘가난한 처녀’가 있는지를 알고 부모나 본인을 설득할 수 있는 이들은 순
사나 중간업자가 아닌 마을 내부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센다는 인터
뷰한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에 의하면, 1937년 말부터 1939, 40년 이전까지는 경찰이나 촌장을 대동하
고 오기는 했어도 강제는 아니었고, 동반한 것은 속이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
다. 쇼와 시대 초기에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도쿄의 업자들이 농민을 속여 처녀들
을 데리고 갔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따라서 농촌에 주재하는 순사들은 주역이
아니고, 군의 어용매춘업자들의 압력기관으로서 칼소리를 내며 따라갔을 뿐이
었던 것 같다.(102쪽)
센다의 설명은 모집을 둘러싼 순사-경찰과 마을의 장-행정기관의 관
계를 가장 사실에 가깝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금의 ‘위안부’ 증
언집에도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알려주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적
지 않다. 한 위안부는 “지금 생각하니 나보고 배급을 타가라던 이장 아들이
계집애가 있는 집을 다 가르쳐준 것이 아닌가 싶다”(『강제 2』, 47쪽)고 말한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38년에 우리 동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광목공장에
취직할 사람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 사람은 동네 구장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하
룻밤을 자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묵인 아
래 동네일을 보는 구장을 따라 광목공장에 취직하러 나서게 되었다. 우리 집은
술장사, 밥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 지서 주임, 면장, 구장, 반장까지도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서 주임이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한 것
같고 동네의 구장, 반장이 나서서 나를 끌어냈다.(『강제 2』, 169쪽)
센다는 일본군이 “조선총독부에 모집을 의뢰했고 총독부가 각 도•군•면에
내려보내 최종적으로는 면장의 책임으로 모았다”(103쪽)는 전쟁 당시 군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면장의 아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도 쓴다.
그는, “1941년경 5월이나 6월” 주재소 순사가 다녀간 직후에 머리를 싸
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일본 내지에 좋은 일자리가 있소. 어떻소, 딸을 보
내지 않겠소? 딸한테 송금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라고 권유하면서 돌아다
제1부 ‘위안부’란 누구인가–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1
닌”(104쪽)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데, 면장이 돌아다닌 집은 “가난한 집, 그
리고 아이가 많아서 생활이 어려운 집”이었다. 그리고 그가 권유한 처녀는
“우리 고향에서는 네 명이나 다섯 명”이었고, “모인 건 두 명”이었다. 그랬
기 때문에 이들이 떠날 때의 모습은 “울면서 보내는 광경은 분명 있었지만,
취직하러 고향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할 때의 모습이었고, 심각한 건 아니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105쪽)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모집 대상은 위안부가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정신대였
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그런 모집에 가담한 것만은 분명
하다. 물론 이들은 당시의 ‘국가’의 여성 동원에 협조했을 뿐이고, 그런 한
그들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신대건 위안부건, 그들
이 그렇게 동원되는 과정에 조선인이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묵과한 것이
‘위안부 문제’ 를 혼란에 빠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참혹하고 슬픈 시대였습니다. 아버지는 약했다면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만 당시의 조선 사람이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해방 후에는 고향을 떠날 수밖
에 없게 되었지만, 저는 아버지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면장
을 맡게 된 게 불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106쪽)
“면장을 맡게 된 게 불운”이라기보다는 한국이 병합된 것이 불운이었다.
20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면장’이건 ‘읍
장’이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제에 대한 영합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그 지위를 얻었다 해도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국가정책에 대
한 ‘협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다가 “말하면서 그는 울었다”면서 협력
자의 아픔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협력하도록 만든 나라의 후예로서 그런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위안부들 중에는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
들이 더 밉다”(『강제 1』, 57쪽),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자기 살려고 남을
죽을 곳에 넣었으니 마찬가지로 나쁘다”(같은 책, 71쪽)고 말하는 이들도 적
지 않다.
사죄라는 것이 ‘미움’을 풀기 위한 응답이라면,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
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 그런 사태야말로 ‘식민지’의 모순이자 ‘조선
인 위안부’의 모순이다. 식민지화란 그렇게, 국가에 대한 협력을 놓고 구성
원 사이에 치명적인 분열을 만든 사태이기도 했다.
4. ‘강제로 모집된’ 정신대
그렇다면 ‘일본군이 강제로 데려갔다’는 증언들은 무엇일까.
‘위안부’들의 증언은 자신을 데려간 주체가 ‘마을 남자’이거나 모르는 아
저씨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찰’이나 ‘군인’이었다고 말하는 경우
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해서 중급 규모의 여자사냥은 전쟁의 확대에 따라 대규모의 여자사냥으
로 바뀌어간다. 대규모로 여성들이 모집된 것은 1943년부터였다. 모집이 가장 극
심했던 것은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
라고 한다. 그녀들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하에 모집된 것이다.
‘정신대.’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이 ‘정신대’원의 자격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이었다. 다만 총계 20만(한국 측 추정치)이 모집된 가운데
제1부 ‘위안부’란 누구인가–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3
‘위안부’가 된 사람은 ‘5만 내지 7만’이라고 한다. 모두가 위안부가 된 것은 아니
다.(106쪽)
센다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가 모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단정한 이유는 “당시 일을 조사한 한국인 신문기자”(106쪽)가 “우선
18세에서 22, 3세의 여성만을 골라 위안부로 만들고, 중년 여자는 군수공
장에 보내진 것 같습니다”(107쪽)라고 한 말에 있는 듯하다. (후에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윤정옥 교수는 센다의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신대와 위안부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러던 것이 시간
이 지나면서 애매하게 겹쳐지면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결과로 만들
어진 기억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안부’의 모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정신대’의 모집
은 전쟁 말기, 즉 1944년부터였다. 그리고 정신대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였다. 일본은 1939년부터 ‘국민징용
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국민근로동원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14~40세의 남자, 14~25세의 미혼 여성을 국가가 동원할 수 있도록 했는데,
‘12세 이상’이 대상이 된 것은 1944년 8월이었다(일본 위키피디아 ‘여자정신
대’ 항목).
그나마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발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센다
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1970년 8월 14일자 『서울신문』은 1944년에 정신
대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 정신대는 사실상 나치의 소
녀대보다도 잔인했던 위안대. 정신대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군수공장, 후방기지
의 세탁소 등에도 배치됐으나 대부분 남양, 북만주 등 최전선까지 실려가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다.
본문 일부 발췌합니다.
지금은 삭제된 34곳의 내용도 보고 싶지만 OOOO 식으로 처리되어서 알수가 없지만
내용 읽어보지도 않고 우르르 마녀사냥 식으로 비난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1457
네셔널리즘적 언론과 특정운동단체의 탄압으로부터 박유하 교수를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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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1 18: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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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책을 읽어보니 그동안 민족주의나 감정적 국가주의로서의 '일본'의 책임에만 머물러 있었던 문제의식에서
위안부 문제를 탈국가주의에 입각해서 바라보고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가 보다 더 근본 원인이다.. 뭐 이런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 이 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거에요.
우리 민족 내부에서도 동조자가 있었다... <-- 이거 엄청 불편한 진실이거든요..
1456
진보논객 박가분의 제국의 위안부 관련 한겨레 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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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1 17: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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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어느 국가를 둘러봐도 리버럴이 네셔널리즘과 합동하는
곳은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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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 의한 강제 병합과 김일성에 의한 민족간 대규모 전쟁 때문이죠.
정신분열증적이며 인지부조화 환자 천지.. ㅎㅎ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진보적 리버럴이 짬뽕된.. ㅋㅋㅋ
1455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는 영원할까?
[새창]
2016-02-18 19: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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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불교가, 성리학이.. 등등
내적 사유나 최소한의 방어 수준이 아닌
지배자들에게 이용당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 질서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이 있었죠.
위에 인용된 트럼프나 우리나라 조선족 운운하는
김무성이나...
1454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는 영원할까?
[새창]
2016-02-18 19:3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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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념이든 사상이든 그것이 신성불가침한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원리주의자들이 많아지면 그 이념,사상은 타락하게되고 오히려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1453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6-02-18 15: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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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부 편은 윤선생 광고만 뜨네요.
1편 검색 후 올린 댓글입니다.
1편 내용 참고가 조선일보더군요.. ㅋㅋ
https://www.youtube.com/watch?v=MBoEnHRWTvA
1452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6-02-18 15: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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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4330&s_no=11330506&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419934
이른바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이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입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우고 치욕의 역사를 가르친다라...
요즘 국정교과서 : 치욕의 역사를 지우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한다.
국정교과서 옹호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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