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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한 부자관계 - 조선의 왕과 왕자들
[새창]
2016-08-06 1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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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글 썼네요. 정리도 잘 되있고요.
그런데 오타난 부분이 있어요.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기(1455) 전인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1453년에 죽었어요. 교동도로 귀양갔다가 슥삭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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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이라는 남자의 20대 시절
[새창]
2016-04-16 18: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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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옹 잘한 것 중 한 가지 - 군투표 개별 자율권 부여....
무조건 1번만 찍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찰라. 투표소 앞에서 인솔장교의 한마디 " 걱정하지 말고 찍고 싶은 사람이나 정당 마음껏 찍어도 된다"
45
프랑스차 푸조 308 사고 사진입니다.
[새창]
2016-03-22 02: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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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 308이면... 최근 모델은 고장력강판 76% 적용됬다고 하네요. 볼보나 사브보다는 약하지만 쉐보레보다는 좀 더 센 수준인듯.... 유리가 저정도면 큰 사고였을것 같은데 푸조시트로엥 그룹에서 썬루프에 사용하는 유리가 이중접합 유리라죠? 수입차중에 볼보와 푸조가 거의 유이한(?) 회사라더라고요. 요즘은 모르겠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만큼 안전은 나름 신경쓰는 브랜드인거 같아요.
물론 AS는 할말 없지만... 음....
44
임진왜란 1년후 일본군의 손실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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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8: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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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데루모토의 7군은 주로 경상도 쪽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기별로 주둔지가 달라지기는 합니다만 한양 점령이후 임진왜란 전투가 한창이던 1592년 5월 이후로 본다면 1군 평양, 3군 황해, 2군 함경, 4군 강원, 5군 경기, 8군 경기, 7군 경상, 6군 전라, 9군 경상도 거제?(지휘관이 병을 얻어서?) 로 보여집니다. 7군의 경우 경상우도 지역의 의병활동(곽재우 등)과 일부 관군의 저항으로 좀 당한것이 있다고 봐야겠죠. 1군의 경우 주요전투(탄금대전투, 임진강전투, 평양전투) 등을 치르고 몇차례 평양방어전을 거치면서 전사자와 동사자(겨울)가 발생했고, 2군도 함경도의 매서운 추위에 따른 동사자와 가토의 수하장수 사야가의 투항으로 병력이 꽤 많이 손실을 입었죠. 5군과 8군은 독성산성전투, 행주산성전투와 벽제관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벽제관에서는 다른 군도 많이 참전), 6군은 전라도로 진입하려다 이치, 웅치 전투 및 금산전투(고경명, 조헌 등의 의병)에서 손실을, 3군은 황해도 연안에서 이정암에게 격퇴당했죠.
대부분의 군대가 지속된 전투에 의한 사상자, 이순신등의 활약으로 해상봉쇄, 의병의 게릴라전으로 육상보급 등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식량부족에 시달려 아사자 발생, 추운 겨울을 대비하지 못해 동사자 발생 등으로 손실이 커졌죠. 결국 이런것때문에 한양을 방어하는 것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서 경상도 해안가로 후퇴해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했다고 봅니다.
43
금성백조
[새창]
2016-03-17 18: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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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남 지역에서 지방 건설업계 1,2위를 다투는게 계룡건설하고 금성백조입니다. 그 중 금성백조는 특히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죠. 타브랜드보다 조경이나 아파트 디자인쪽이 좋아 생활하기 편리하다나 뭐라나... 반면 아재들은 계룡건설쪽을 선호하는 편이죠. 물론 개인별 호불호는 다르겠지만.
42
삼국지에 촉한에 열조 소열제 유비에 관해서
[새창]
2016-02-04 02: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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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곧바로 한중방면으로 공격할 가능성은 적었지만 (217년-219년 사이에 벌어진 유비와의 한중일대를 놓고 벌인 전투에서 국력소모가 컸음) 몇년 정비하면 한중방면으로 밀고 내려올수 있었죠. 220년 유비가 오를 치기로 결심할 무렵 관우를 배신한 상용의 맹달이 위에 붙어버려 촉은 위축되어 있었죠. 그리고 손권도 오왕을 제수받으면서 형식적으로 위에 머리를 조아리며 위의 동맹국인 상태였고...
그당시 유비가 느낀 압박감은 상당했을 것임. 형주를 잃고 인재와 병력손실... 그리고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을 잠재워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 등... 결국 오를 침공할 수 박에 없었죠.
그리고 형주에서 친유비성향의 세력도 물론 있었겠지만 사실 형주는 어느 한 세력에 국한되기는 힘들죠. 형주를 오래 다스렸던 유표가 살아있을때만 해도 형주=유표의 세력이었지만 그 뒤 쪼개지고 갈라지면서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8-9년 다스린데다 북형주는 조조가 유비와 마찬가지로 210년대 초반부터, 동형주는 손권이 215년부터 지배하기 때문에 누가 형주의 주인이다라는 개념은 없었을듯 해요. 그리고 유비가 입촉하면서 형주에 있던 자신의 세력들중 상당수를 익주로 데려왔기 때문에 형주에 유비를 지지할만한 세력이 과연 얼마큼 남았을까 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이릉전투 당시 동원된 병력수를 보면 유비군이나 손권군이나 큰 차이가 없었죠. 사마가 등 이민족이 합세한 유비쪽이 병력의 우위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고, 원래 수비보다 공격하는 쪽 병력이 더 많아야 공성이 가능하다는 옛말이 있듯 쉬운 공격은 아니었을듯해요. 잘하면 빼앗긴 형주는 일시적으로 다시 되찾을수도 있겠지만 북형주에 주둔한 조인,서황의 위군과 본래 오의 근거지인 양주쪽에 있던 손권의 지원군이 밀어닥치면 유비는 버텨낼 재간이 없죠. 형주는 차지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고, 유비에 절대 충성을 다짐하는 형주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결사항전도 어려운데다 촉에서 원군을 잔뜩 데려오기도 힘든 상태였음. 한중방면의 위군이나 강족, 남만세력의 준동을 막을 병력이 필요했고 수도인 성도를 지킬 병력까지 제외하면 과연 얼마나 더 이릉쪽으로 보낼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41
삼국지에 촉한에 열조 소열제 유비에 관해서
[새창]
2016-02-01 0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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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물론 훌륭한 정치인임에는 분명하고 촉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것도 맞지만, 제갈량 한명 죽었다고 촉이 금방 무너지지는 않죠.
무슨 제갈량을 신격화하는거 같은데 그도 1명의 재능있는 관리일 뿐입니다. 가장 재능있는 인물 1명만 뽑으라면 물론 제갈량을 뽑겠지만, 아무리 재능있는 인물이라도 혼자 모든거를 다 할 수 없죠.
그리고 실제 삼국지연의에 나온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은 대부분 과장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일부는 실제로 제갈량이 한 것 도 있지만 제갈량은 군사적 재능보다 한 나라(세력)의 전체적인 틀을 잡고 운영하는데 적합한 뛰어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고, 오히려 군사적 재능은 방통이나 법정 같은 인물이 더욱 뛰어났죠.
장완, 비의, 동윤은 제갈량 사후 촉의 영토를 보존하면서 나라를 잘 지탱했는데, 벼슬은 장완-비의-동윤 순이었고, 234년 제갈량이 죽자 그 역할을 장완이 했고 장완이 병들자 (246년 장완 사망) 그 역할을 비의가 맞았으며, 비의가 하던일은 동윤이 했는데 동윤은 과로로 죽었다고 해요 (비의가 워낙 엄청난 양의 일을 빠른 시간내에 다 끝내다보니 그대로 업무를 인계받은 동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장완이 죽은 246년에 동윤도 죽음) 동윤 후임에 진지가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죠. 동윤은 환관의 발호를 막고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부정부패를 못하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동윤이 죽자 환관세력이 서서히 힘을 키웠다고 합니다.
253년 비의가 위의 장군 곽순의 거짓투항에 속아 신년하례식에서 술마시다 암살당하면서 사실상 촉의 운명은 결정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비의가 살아있을때만해도 강유가 북벌을 하려고 하면 무리하게 군세를 일으켜 싸우지 못하게 조정하면서 나라를 지탱했는데 비의가 죽으면서 강유의 국력소모를 심하게 만든 북벌이 시작된거죠. 그리고 비의 후임격인 진지는 환관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황호같은 무리들이 세력을 키울 빌미를 제공했죠. 그나마 진지는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그의 사후에 조정을 이끄는 관리들의 능력은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지게 되죠.
결론 : 촉 역사상 가장 훌륭한 관리는 제갈량이 맞다. 제갈량은 군사적 재능보다 행정가, 정치인으로서 능력이 탁월했다.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의 조정을 이끈 장완, 비의, 동윤은 제갈량만큼은 아니지만 나라를 충분히 이끌만한 능력이 있던 정치인이었고 이들이 살아있을때는 촉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영토 확장은 못했지만 영토를 지킴) 비의 사후 강유의 무모한 북벌을 막을 만한 인물도 없었고 황호 같은 환관의 무리들이 발호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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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촉한에 열조 소열제 유비에 관해서
[새창]
2016-02-01 00: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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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에 기록되기를 위의 인구가 440만명, 오의 인구가 230만명, 촉의 인구가 94만명이었다 합니다. 넓은 중국대륙에 인구가 너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인구로 등재되지 않은 숨은 인구까지 하면 더 늘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수천만명씩 되지는 않은듯 하죠.
암튼 형주를 잃은 촉의 국력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는데 문제는 내부 외부적으로 더 약해질 우려가 있었다는 겁니다.
외적으로는 관우가 죽고 형주 4군을 잃게 되어 많은 인구가 사라지죠. 지금도 비슷하지만 인구 = 국력이기 때문에 많은 손실을 보게 되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영토확보가 필요하죠. 또 촉의 힘이 약해지면 위가 한중 방면으로 오가 영안 방면으로 양동공격을 감행하게 되므로 양쪽을 다 막기 어렵죠 (산악지역의 강력한 방어선이라 할지라도 일정부분 영토를 잃을수밖에 없음) 그래서 선제 공격을 감행해 강력한 군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데 위는 너무 강했고 오는 상대적으로 해볼만한데다 관우의 복수라는 측면에서 적합했죠. 더군다나 오의 군권을 쥔 대도독 여몽이 죽은 시점에 막을 만한 장수가 별로 없다고 판단되기도 했겠죠.
내적으로는 형주의 함락으로 흔들리는 내부갈등을 봉합하려면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죠. 유비의 활동무대가 유주의 탁현 -> 기주의 평원 -> 서주의 소패,하비 -> 예주의 여남 -> 형주의 신야, 강릉, 강하 등 -> 익주의 성도로 옮겨다닐 만큼 한군데 정착한 세력이 아니다 보니 익주의 호족들을 장악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익주를 다스린것도 불과 5,6년에 불과(214년 익주정벌, 관우 219년 겨울 사망, 유비 220년 거병의 뜻 밝힘, 신하들 만류로 잠시 보류후 황제즉위, 221년 거병의 뜻 재차 밝힘, 장비 암살, 222년 오로 진격)이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약한데 형주를 잃은 상황에서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안됬기 때문에 거병을 했죠. 물론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도 한 원인이 되었지만 유비처럼 산전수전 다 겪고 한나라의 주인이 된 노회한 정치인이 단순히 관우의 죽음때문에 전쟁을 했다는 것은 그 이면을 잘 보지 못하는 겁니다.
결론 :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차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부갈등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영토수복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음
* 유비가 실제로 동원한 병력이 몇만에 불과했고 (사마가 등의 이민족의 군세가 합세하긴 했지만 그래도 10만은 안넘는게 정설) 그에 대항하기 위해 육손과 휘하 장수들의 병력 역시 유비 못지 않은 숫자였기 때문에 이릉과 효정의 전투에서 이겼다고 해도 오의 중심부인 무창이나 건업까지 점령하기는 어려웠을듯. 병력부족도 그렇고 보급선이 길어지다보니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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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에서 얼어버리면 어떻하죠?
[새창]
2016-01-31 20: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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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케이스(예전 카세트테잎 케이스 같은)로 긁어내리면 쫙쫙 밀리면서 1분이면 출발가능해요.(좀 단단히 얼면 시간이 좀더 걸리지만) 히터트는것도 시간 오래 걸리니 수동으로 긁는게 장땡임(신용카드 같은 플라스틱 카드는 약해서 긁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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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표직 사퇴 선언의 숨겨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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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9 13: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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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을 두둔하는거는 아니지만 박영선이 김한길을 데려왔다니.... 뭔가 잘못 알고 있는것 아닌가요?
김한길은 새정치국민회의 시절인 1996년에 15대 국회의원(전국구)로 정계에 들어왔고, 그때 박영선은 mbc 재직중이었는데 (2004 총선을 앞두고 들어와 17대 국회의원이 되었음)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네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치적인 글을 올릴때에 내 주장에 신뢰를 주려면 사실관게를 확인하고 글 쓰는게 좋을듯 합니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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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21: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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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조선시대 왕들중에서 최고로 정통성 짱짱이었죠.
맏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것을 일반적으로 정통성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왕들중 맏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가 5대 문종,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0대 경종, 27대 순종 정도네요.
나머지는 첫째가 죽어서 왕이 된 둘째, 셋째... 왕의 동생, 왕의 조카 등 이었고요.
문종의 경우 아버지 세종의 치적중 상당수에 세자시절부터 관여하며 정통성에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재위 2년만에 사망. 단종도 2대에 걸친 맏아들로 정통성에는 문제가 없으나 너무 어린것이 문제....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아들(즉 죄인의 아들)이었고, 인종은 새어머니가 대비이고 그 아들이 대군으로 있던 것이 문제, 현종도 장자라 정통성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예송논쟁등 남인과 서인의 대립, 기근, 질병 등으로 장악력 부족, 경종은 친모인 장희빈이 사사되고 지지세력의 몰락,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이라...
결국 제대로 된 정통성을 바탕으로 전권을 휘두른것은 숙종밖에 없네요. 아버지 현종때부터 2대에 걸친 맏아들, 재위 46년간의 치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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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사도세자를 왜그리도 싫어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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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4 0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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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이 되 가는 사도세자는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의대사건이나 평안도유람사건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일삼는 행동을 하게 되고, 평소에 사도세자를 미워하던 노론의 집중공격과 영조의 아들에 대한 미움이 결합되어 사도세자를 죽음에 몰게 되죠. (1762)
그러면서 영조는 또 영특한 손자를 예뻐해 다음 보위를 넘겨주고자 사도세자의 아들에서 먼저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기도 하죠 (정조가 됨)
결론 :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노론의 입장을 대변할 수 밖에 없었던 영조와 반노론을 외치던 사도세자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대결이었다는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34
영조는 사도세자를 왜그리도 싫어한걸까요?
[새창]
2015-11-04 0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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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아버지인 숙종때부터1당이 집권하면 다른 당을 몰살시켜버리는 정치풍토가 결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소외되었던 남인과 소론까지 등용하게 되는데, 말이 탕평책이지 실제 권력은 노론이 장악하고 남인과 소론은 곁가지에 불과하죠.
영조에게는 원래 효장세자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죽게 되죠. 그리고 42이라는 늦은 나이에 한명의 아들을 보는데 이 아들이 바로 장헌세자(사도세자)입니다. 영조는 아들이 영특하고 늦은 나이와 봐서 그런지 굉장히 예뻐했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아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노론이 자기 멋대로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감을 갖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소론, 남인 세력과 가까워집니다.
영조입장에서는 아무리 탕평책을 펼친다해도 자기가 왕이 되는데 큰 공헌을 한 노론을 배제할 수 없고, 사도세자의 의견을 따른다면 자신이 왕이되느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친 노론정책을 펼수 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아들은 사도세자와 부딪히게 되죠. 그나마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가 살아있을때에는 사도세자가 친아들이 아님에도 아껴주고 방패막이가 되주었는데 1757년 정성왕후가 죽게 되자 왕실내 사도세자를 지켜줄만한 인물이 없게 되죠. (영조와 정성왕후간에 사이가 안좋아서 오랜세월을 거의 별거상태로 지냈다고 함. 그래서 정성왕후가 죽었을때 영조는 눈물도 안흘렸다는....)
게다가 사도세자와 혼인한 혜경궁홍씨의 집안도 노론세력이라 나중에 혜경궁홍씨는 남편을 지키는것보다 아들(후일 정조)과 가문을 지키는데 힘쓰게 되죠. 혜경궁홍씨의 숙부인 홍인한 같은 경우는 대놓고 사도세자를 축출하는데 앞장선 경우니 더 말할 것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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