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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사ㅤ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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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사ㅤ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241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6-11 15:58:49 12 삭제
    싸움구단 // NL이니 PD니 구분한다는 자체가 학생운동의 계파와 역사를 인지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나름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역사를 알고 계시는 분이,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은 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 의아합니다.

    NL이니 PD니 모두 학생운동가라 아우를 수 있냐는 문제는 개개인의 사상과 철학에 기반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되리라는 생각에 굳이 어떠한 주의 주장을 개진하지 않겠습니다. 과격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어떤 개혁을 이끌어 냈냐느니, 주한미군 철수시켰냐느니, 자주통일 이룩했냐는 반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괜시리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시 대학생들의 대정부 저항이 없었다면 군부독재와 반민주적 부정부패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극심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제가 댓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지금 무력투쟁을 하자는 선동도 아니고, 당시의 폭력성이 정당했었으니 감사히 여겨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당시의 시대상황이 그만큼 열악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강변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학생운동도 거부감을 느꼈던 사람들은, 당시에도 동참하지 않았어요. 모두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기반으로 한 판단과 선택에 기반하여 행동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또 당시 시국의 소용돌이 안에서 수많은 고민과 나름의 판단에 의한 결정과 행동을, 지금의 잣대에 맞추어 무작정 반대하고 까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지도부를 빼놓고는, NL과 PD의 개념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 학생운동의 주요 계파는 NL이었음이 분명하고, PD나 청년공동체 등을 위시한 노동운동계파도 학생운동과 궤를 같이 했습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서로 수많은 토론을 거쳤으며,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온건한 개혁론과 혁명을 거론하는 과격파들이 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올바른 사회, 정의로운 국가를 꿈꿨던 대다수의 젊은 대학생들은 김일성을 우상화하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조국의 현실을 답답하게 여겨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지요.
    (특히 광주와 같은 경우는 5.18민주화운동의 여운과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불의에 분개할 수밖에 없는 지역적 특성 또한 갖고 있습니다.)

    80년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권마저 박탈당한 시점에서, 동학들은 꾸준히 죽어나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저기 권력과 돈을 쫓던 비양심적인 행태가 판을 치고,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젊은 청춘의 혈기가 다소 과격하게 표출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요즘과 같은 시대였다면 다른 방식으로 학생운동을 이끌었겠지요. 80년대에 광화문에서 촛불들고 침묵시위했다면 어땠을까요? 장담하건대 전원 연행에 군대 강제징집 당했을 겁니다.
    그때 학생들은 간디를 몰랐을까요? 마틴 루터 킹이 누군지 몰랐을까요?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로가 막히고 억압과 굴복을 강요당하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다른 방식의 저항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또한 산발적으로 흩어진 민주인사들의 힘보다, 하나로 조직된 대학생들의 단결력이 보다 큰 힘을 발휘하고 사회적 이슈로 재생산되던 시대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작용도 물론 많습니다. 대학의 군대문화와 조직문화 역시 우리나라 대학 깊숙이 남아 있는 운동권 문화의 잔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통합진보당을 위시한 경기동부연합과 같은 극렬인사와 한 묶음으로 평가된다는 것이지요. 앞선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임종석, 안희정 등은 물론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정치인들 모두 종북좌파로 매도된다는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학생들과 시위현장에서 함께 했으니, NL의 군중선동에 자의적 판단없이 이끌려 나온 분인가요?
    극소수의 지도부를 제외하곤 조국을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통의 대학생들이었음을 상기하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끄적이는 저도 통진당에는 별로 정이 가질 않습니다. 뭐 제 댓글이 어찌 보일지는 모르겠으나(나름의 자의적 판단들을 하겠지요), 통진당 까라는 글을 쓰라면 다른 분들보다 훨씬 신랄하게 까댈 수 있습니다.
    다만 90년대까지 이어졌던 학생운동의 흐름에 동참했던 한 사람으로서, 한때 오월대 마스크를 쓰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던 ‘과격시위분자(?)’로서, 내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이 ‘멍청한 NL의 하수인’으로 폄하되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항변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 줄 끄적입니다.

    더 이상의 댓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읽는 이들 모두 나름의 철학과 사상을 기반으로, 또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바탕으로 제각각의 판단을 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40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6-11 13:12:52 13 삭제
    폭력 시위는 옳지 않은 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대화와 토론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소통과 화해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음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으시는 것 같네요.
    요즘처럼 인터넷이라도 있었다면 트위터든 SNS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맨션을 리트윗 하는 식으로라도 민의를 보여줄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시에는 '민의'라는 것 자체가 묵살되던 시기였습니다. 폭력시위라는 방법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유일한 벙법이었던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식민지 시대 광복군과 독립투사에게 왜 폭력을 쓰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학생운동을 독립운동에 비유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 할 수 있겠으나, 당시의 군부독재 시절은 그만큼 암울하던 시기고, 통제된 언론 덕분에 정보와 진실이 왜곡되는게 당연하던 시대였습니다.
    잊힐만 하면 한 번씩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고, 노태우 정권이후 삼당합당은 군부독재의 잔영을 지울 수 없는 비민주국가적인 사회분위기로 형성되어 있었지요.
    그때 기득사회를 견제하는 세력이 있었나요? 야권은 힘이 없었고, 재야인사들은 구금되거나 감옥에 있던 시기입니다.
    유일한 저항운동이 바로 시위였고, 또 강력한 시위진압에 저항할 수 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거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영원히 폭력시위로 낙인지워질 뿐입니다.

    또,
    학생운동을 하면 무조건 이석기 잔당인가요? NL은 물론 PD도 함께 어우러졌던 것이 바로 과거의 학생운동이었습니다.
    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임종석, 안희정 등 과거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종북 주사파라고 단정짓는 발언입니다.
    대부분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상식이 통하고, 사회가 정의로운, 일반적인 민주국가를 지향하며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석기를 위시한 통합진보당의 틀에 가두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지금도 반값등록금, 반값아파트를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시대입니다. 통상노동임금, OECD평균근로시간을 주장해도 빨갱이 때려잡아야 한다고 묵살당하는 시대입니다.
    80년대, 90년대는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도 힘든, 종북 빨갱이 프레임과 언론공작이 횡행하던 시기입니다.
    그 프레임 그대로 과거 학생운동을 바라보면, 결국 종북좌파, NL주사파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꿨던 보통의 대학생들의 저항이, 빨갱이 역적으로 덧씌워지는 것은, 안경에 빨간색 코팅을 했느냐 안했느냐의 아주 작은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238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06-11 12:10:25 13 삭제
    아... 진달래... 진달래 중대는 전남대 인문대의 오월대 깃발이랍니다.

    저는 학생운동의 거의 마지막 세대인 95학번입니다. 96년도 연대사태 이후로 한총련이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지만, 5.18특별법제정문제나 등록금투쟁... 기타 여러 중차대한 문제들로 90년대 중반까지 시위가 그칠날이 별로 없었죠. 특히 광주는 더욱 그랬구요.

    원글에서는 전남대 오월대를 상시전투부대나 무슨 특공대처럼 묘사를 하고 있는데, 사실 저희들도 똑같은 일반 학생이었습니다. 수업도 듣고, 연애도 하고, 나름의 대학생활을 하는 평범한 학생인 것이지요.
    다만, 시위일정이 잡혀있을 경우에는, 총학과 예비역학생회 등으로부터 단과대, 각 학과로 시위일정이 전해집니다. 학과동아리나 단대동아리 중앙동아리에도 동아리연합회 차원에서 일정이 전달되구요.
    당시에는 어떤 동아리(써클)이든간에 여러가지 세미나를 하곤 했는데, 동아리 특성과는 무관하게 꼭 사회과학세미나도 함께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동아리면 역사학 세미나를, 영문학 관련 동아리라면 영어원서읽기 세미나 등이 필수였고, 기타 근대사나 사회문제 세미나도 꼭 함께 했던 것이지요. 보수층에서는 이러한 학생들의 세미나를 사상교육, 세뇌교육이라 통칭하는데, 사실 언론이나 제도권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참 역사를 선후배들 간에 배우고 토론하는 자연발생적인 교양학습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교양학습 세미나라 불렀구요.)

    암튼 이런 세미나 등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와 진실을 알게 된, 젊은 청춘이라면 피가 끓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왠만하면 집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나 대학분위기가 그러했고, 또 그것이 정의를 바로 세우기위한 유일한 방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 동기들 중 쇠파이프 한 두번 잡아보지 않은 남학생은 없습니다. 몇 번 나갔다가 오월대의 조직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위에 불참하거나, 나름의 확고한 의식이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오월대에는 들어가지 않고, 여학생들과 함께 후위에서 가투(가두투쟁)를 하곤 했지요.
    저같은 경우도 상시 전투조직이니 뭐니 할만한 오월대에 귀속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원 리스트같은 것도 따로 없었고, 필요에 따라 인원이 부족하면
    즉각 충원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다만 각 단대에 중대장이라 불리우는 예비역 선배들이 한 명 씩 있었는데, 나름의 전설을 가진 분들이었죠. 혼자 전경 몇 명을 상대했네. 전경 방패를 빼앗아 눈내린 언덕에서 썰매를 탄 분이네.. 어쩌네 하는.. ㅎㅎ
    이런 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운동을 계속 하던 열혈분자에 속했습니다. 중대장 포함 단대 예비역 학생회실에 상주하는 열 댓 명에서 스무 명 정도가 소위 말하는 조직화된 오월대 대원이었고, 저같은 비상주 예비동원 인력은 2000여명의 단대 학생들 중 남학생들의 절반 정도라 생각됩니다.

    뭐 해마다 행해졌던 한총련 출범식이나 전학대회(전국학생대표자회의) 때의 시위 일화는 굳이 풀어낼 필요도 없고, 연대사태와 같은 사건도 무용담을 펼쳐내는 듯하여 언급하기 주저됩니다.

    다만 전설처럼 회자되는 오월대와 녹두대의 창설배경에 대해 몇 마디 첨언하고자 합니다.
    사실 오월대와 녹두대는 전문시위를 위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어두운 사회상과도 연계되는데, 광주에 사시는 분이나 몇 번 가보신 분들은 조선대의 지리적 위치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조선대는 당시 광주의 최대 번화가인 충장로(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호에서 이름을 따온 거리)와 가깝지요.
    걸어서도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라 조선대 학생들은 학교 앞에서도 행사 뒷풀이를 많이 하지만, 충장로에도 많이들 나가 놉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지역이나 똑같겠지만, 당시 광주에도 뒷골목이나 유흥가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자릿세를 뜯어먹으며 자생하고 있었는데, 충장로의 '국제PJ'라는 다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뻗은 조폭들, 뒤에 국제PJ파라고 불리는 조직들이 굉장히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충장로의 행동반경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이 조폭들이 술김에 대학교내까지 침입하게 되고, 저녁무렵에는 폭력을 행사하여 대학생들에게 금품을 뺏아가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여학생이 이 국제PJ파 조폭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총학생회에서 고민 끝에 예비역 몇 명을 중심으로 한 교내 자치방범대를 조직하게 되고, 이 방범대와 조폭들이 교내에서 몇 번 부딪히게 됩니다. 크고 작은 몇 번의 싸움으로 일이 커지게 되고, 보다 더 조직화된 학생방범대가 충장로까지 도망가는 조직들을 쫓아가 당시 조폭 중간보스급까지 집단린치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국제PJ파와 조선대 총학생회 간에 비공식적인 협약이 맺어지는데, 그게 학생들은 충장로에서 소위 '술쳐먹고 깽판'을 부리지 않기로 하고, 국제PJ파도 조선대 교내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룰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 때 만들어진 학생조직 방범대를 그냥 해산시키기 아쉬웠던 총학은 시위에 이 조직화된 방범대를 적극 활용합니다.
    이 조선대 방범대가 바로 '녹두대'입니다. 다만 이 때는 녹두대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만들어진게 아닌 비공식적 조직이었다는 것이죠.

    한편 충장로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던 국제PJ파는 새로운 신흥세력이었던 광주서방파와 부딪히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광주의 가장 큰 유흥가인 충장로에서 세력다툼을 하게 된 것이죠. 한 조직이 독식하던 구조에서 나눠먹게 되다보니 이익은 줄고,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서 조직의 피해도 막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새롭게 떠오르는 유흥가로 주목받던 '전대후문(전남대 후문 방면 유흥가)'이 이들의 눈에 들어옵니다. 학생들이 즐겨찾는 술집과 당구장 등의 업소가 점점 많아지다보니 주변에 경쟁적으로 동종업소가 생겨나게 되고, 전대후문 인근은 거대한 유흥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더불어 소위 삥을 뜯기 좋은 업종의 가게들이 몰려있다보니 조폭들도 이쪽에 관심을 두고 진출하게 되지요.
    전남대 총학생회에서는 조선대에서 일어난 강간사건과 국제PJ와 조선대 총학간의 일화를 인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전남대에서도 학생자치방범대를 조직합니다. 네 다섯명씩 교내를 순찰하며 음주로 인한 분쟁(패싸움)이나 소위 깽판치는 조폭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죠.
    이 전남대 방범대 역시 총학을 통해 시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오월대'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죠.
    (정확히 언제 녹두대, 오월대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오월대는 오월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녹두대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 밖에... )

    아무튼 이런 대학생들의 저항(?) 또는 반발로 국제PJ파와 서방파는 광주에서 이득사업에 한계를 느낍니다. 가장 큰 물고기가 대학생들 조직 때문에 견제를 받게 되어 짜증이 나지요. 이 때문에 이 조직들이 서울로 상경을 많이들 하여 서울을 장악하게 됩니다. 서울에 호남출신 조폭들이 맣은 이유는 7,80년대 무조건 서울로 상경한 무학의 청년들이 뒷골목에 투신한 까닭도 있으나, 80년대 후반 국제PJ와 서방파의 조직적인 상경이 주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조직들의 수도권 점령은 나름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자구책이었겠으나, 이른바 전국구로 거듭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녹두대'와 '오월대' 때문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물론 지금까지의 조폭 관련 썰은 정확하게 확인된 바 없습니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이야기로, 군대도 가기 전이었던 90년대 중반 선배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얻어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국 조폭 역사의 숨겨진 비화로 오해들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아침부터 이 따위 글을 쓴 이유는,
    전남대 인문대의 '진달래' 깃발 때문입니다.

    전남대 인문대 8개 학과의 학생회실은 인문대 2층에 모두 몰려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요.)
    학생회실을 오가며 항상 인문대 2층 단대 총학 입구 옆에 세워져 있던 진달래기가 눈에 익었었는데, 20여년이 흐른 지금 뜻밖의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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