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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까메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351 [bgm]대한민국의 흔한 SLR자게이의 장롱탐험.jpg [새창] 2012-10-25 21:32:00 10 삭제
    을 지나 신막, 신막을 지나 한탕강(漢灘江)을 건너 38선에 도착 하였다.
    한탄강을 건넌 즉시 하루종일 호파기를 하고 대오를 정비 하였다. 1950년 12월 31일은
    암호가 세번 바뀌었다. 다음날은 설날 선물도 받았는데 먹을 시간이 없었다.

    1951년 1월 1일 새벽 중공군의 총 공격으로 38선이 무너졌다. 장교 사병 할거 없이
    앞다투어 서울을 향하여 퇴각 하였다.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9월 28일에 수도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고 평양에 입성 하고
    압록강이 있는 초산까지 진군 하였는데 별안간 중공군이 개입 함으로 또 다시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강을 건너 산을 넘으며 피난하는 1.4후퇴를 경험하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아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다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한강 이남으로 후퇴는 못한다 한사람이라도 후퇴하면 총살이다
    라는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아군은 없었다.

    1.4 후퇴로 남으로 가면서 경북 영덕 시내에 국민학교 시설에서 더이상 앞으로
    못 나갔다. 당시에 도로에는 각종 차량이 포차 수레 등이
    일렬종주차장을 이루고 있었다. 길에는 7사단 또 6사단 마크를 단 병사들이 보인다. 우리
    처럼 낙오 되어 철수하는 타단 부대 전우 등 오합지졸이 모여 약 40명이
    되었다. 우리들은 찬촌을 지나 중공군의 포위망 속을 6번의 적의 기습을 받으며
    8일만에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강을 건너 산을 넘으며 어느 시골 농가에 다섯집
    있는 곳에 첫집을 수색하고 들어가니 한 50대 가량 된 여자와 20대 여자들이 다섯명
    살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자기들은 북쪽에서 인민군이 침입으로 피난 왔다고
    원주민은 남쪽으로 피난 갔다고 하니 믿어진다. 그래서 우리 일행을 그 집에 방금 세개를
    빌려 쉬게 하였다. 밖에는 비가오고 한참 잠들어 자는데 꽹가리 소리와 떼놈 소리가
    나더니 중공군들이 꽹가리 소리를 요란하게 치니 일행은 무작정 동서남북
    으로 다 도망쳤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 중에 손들어 하는 소리에 손들고
    포로병이 되었다. 혹독한 기합과 굶주림에 분함과 억울함은 말이 아니었다.
    밤중에 강을 건너라는 명령에 따라서 초겨울 살얼음이 덮힌 강을 나는 군복을
    벗어 머리에 이고 알몸으로 강을 건넜다. 군복을 입은채로 건넜던 사람들은 모두 동상이
    걸렸다. 알몸으로 건넌 나는 이고간 옷을 입었기에 춥기는 하지만 동상은 면했다. 원수의
    중공군 놈들아 너희들은 벼락을 맞아 몰살당하라고 악담을 한다. 허기에 먹을것을 찾아
    등겨 가마니를 발견하여 등겨를 끓여 먹기도 하였다. 구석진 곳에 땅을 파고보니
    이북 사람이 여름에 먹을것을 저장한 짬무가 있었어 솥에 삶아 먹의면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겨우 목숨만 살아 있다. 중공군들의 기합에 시달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혹독한 기합속에 포로병으로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후에 포로병들의 교환이 있어서 이남으로 오게 되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어지러웠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는 육군 야전병원에서 한달간 입원 생활 하였다. 그 후 부산역에
    도착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도 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하였다.
    남들의 소개를 받아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은 평화로웠으나 집을 떠난 6년 동안
    훼손된 나의 건강을 회복하는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집에서 소식으로 죽을 먹고
    보약도 먹고 하면서 겨우 3년만에 점차 회복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을 하면 아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지낸 세월이 흑백의 전쟁 영화 처럼
    내 눈앞에 펼쳐지고 포로병 교환이 없었더라면 포로병으로 죽음을 당했을 것 이었다.
    나의 전우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사내대장부라 하지만 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아! 원수의 6.25 전쟁 죽을때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350 [bgm]대한민국의 흔한 SLR자게이의 장롱탐험.jpg [새창] 2012-10-25 21:32:00 220 삭제
    을 지나 신막, 신막을 지나 한탕강(漢灘江)을 건너 38선에 도착 하였다.
    한탄강을 건넌 즉시 하루종일 호파기를 하고 대오를 정비 하였다. 1950년 12월 31일은
    암호가 세번 바뀌었다. 다음날은 설날 선물도 받았는데 먹을 시간이 없었다.

    1951년 1월 1일 새벽 중공군의 총 공격으로 38선이 무너졌다. 장교 사병 할거 없이
    앞다투어 서울을 향하여 퇴각 하였다.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9월 28일에 수도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고 평양에 입성 하고
    압록강이 있는 초산까지 진군 하였는데 별안간 중공군이 개입 함으로 또 다시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강을 건너 산을 넘으며 피난하는 1.4후퇴를 경험하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아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다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한강 이남으로 후퇴는 못한다 한사람이라도 후퇴하면 총살이다
    라는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아군은 없었다.

    1.4 후퇴로 남으로 가면서 경북 영덕 시내에 국민학교 시설에서 더이상 앞으로
    못 나갔다. 당시에 도로에는 각종 차량이 포차 수레 등이
    일렬종주차장을 이루고 있었다. 길에는 7사단 또 6사단 마크를 단 병사들이 보인다. 우리
    처럼 낙오 되어 철수하는 타단 부대 전우 등 오합지졸이 모여 약 40명이
    되었다. 우리들은 찬촌을 지나 중공군의 포위망 속을 6번의 적의 기습을 받으며
    8일만에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강을 건너 산을 넘으며 어느 시골 농가에 다섯집
    있는 곳에 첫집을 수색하고 들어가니 한 50대 가량 된 여자와 20대 여자들이 다섯명
    살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자기들은 북쪽에서 인민군이 침입으로 피난 왔다고
    원주민은 남쪽으로 피난 갔다고 하니 믿어진다. 그래서 우리 일행을 그 집에 방금 세개를
    빌려 쉬게 하였다. 밖에는 비가오고 한참 잠들어 자는데 꽹가리 소리와 떼놈 소리가
    나더니 중공군들이 꽹가리 소리를 요란하게 치니 일행은 무작정 동서남북
    으로 다 도망쳤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 중에 손들어 하는 소리에 손들고
    포로병이 되었다. 혹독한 기합과 굶주림에 분함과 억울함은 말이 아니었다.
    밤중에 강을 건너라는 명령에 따라서 초겨울 살얼음이 덮힌 강을 나는 군복을
    벗어 머리에 이고 알몸으로 강을 건넜다. 군복을 입은채로 건넜던 사람들은 모두 동상이
    걸렸다. 알몸으로 건넌 나는 이고간 옷을 입었기에 춥기는 하지만 동상은 면했다. 원수의
    중공군 놈들아 너희들은 벼락을 맞아 몰살당하라고 악담을 한다. 허기에 먹을것을 찾아
    등겨 가마니를 발견하여 등겨를 끓여 먹기도 하였다. 구석진 곳에 땅을 파고보니
    이북 사람이 여름에 먹을것을 저장한 짬무가 있었어 솥에 삶아 먹의면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겨우 목숨만 살아 있다. 중공군들의 기합에 시달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혹독한 기합속에 포로병으로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후에 포로병들의 교환이 있어서 이남으로 오게 되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어지러웠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는 육군 야전병원에서 한달간 입원 생활 하였다. 그 후 부산역에
    도착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도 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하였다.
    남들의 소개를 받아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은 평화로웠으나 집을 떠난 6년 동안
    훼손된 나의 건강을 회복하는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집에서 소식으로 죽을 먹고
    보약도 먹고 하면서 겨우 3년만에 점차 회복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을 하면 아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지낸 세월이 흑백의 전쟁 영화 처럼
    내 눈앞에 펼쳐지고 포로병 교환이 없었더라면 포로병으로 죽음을 당했을 것 이었다.
    나의 전우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사내대장부라 하지만 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아! 원수의 6.25 전쟁 죽을때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349 [bgm]대한민국의 흔한 SLR자게이의 장롱탐험.jpg [새창] 2012-10-25 21:30:44 13 삭제
    뒷부분에 한자가 꽤 많아 다시 써봤습니다. 바뀐 문법에 맞게 보기 쉽게 수정해 봤습니다.

    나의 625 전쟁을 회상하며...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돌이켜 생각하기는 싫었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구나 1983년 6월 30일 KBS뉴스
    뉴스에 방송된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눈시울이 젖도록 지켜 보다가 더욱 더 지난
    날이 회상되어 옛 추억(한자로는 추억인데... 기억 내지는 과거로 보시는게..)을 더듬어 가면서 몇 자 적어볼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8시 정각 라디오뉴스 시간에 북쪽 인민군이 38선을 침공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 당시만 해도 38선에서는 왕왕 쌍방에서는
    충돌사고가 있었기에 또 충돌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여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번에는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뉴스를 통하여 들은 바에서 불과 3일만에
    서울 중심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 갔으니 소련제 탱크를 인민군이 앞 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 차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서울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소란하였다.
    이때 부산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부산 앞바다는 군수물자를 실은 외국 상선들이
    정박 해 있었고 수영 비행장은 군수물자로 가득 차고 피난 온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해매었고 국군 징병이 실시 되는 등 정말 어수선한 세상이다.

    그 해 7월 중순으로 기억 되는데 동회에서 징병 명령서가 내게 하달 되었다.
    동회에 집합하니 현역 군인이 대충 들어본 후에 우리에게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다음 날 역 앞에서 집결하여 유락 군민학교로 이송하였고 그날 부터 맹훈련이
    시작 되었다. 나와 같이 일제시대 때 징병을 경험한 사람들은 훈련이 익숙하다 하면 본부
    2중대 조교로 임명 되었으며 1개 소대를 가르쳐야 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라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80%가 넘어서 많은 신병들이 오전에 배운 것을 오후에 잊어먹고 하였다.
    훈련의 고달픔과 기합을 참지 못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도망 갔으니
    인원이 부족하여 길거리에서 다시 나와 잡아오곤 하였다. 이러하는 동안 몇날이 지났다.
    몇일을 생각 하여도 조교를 계속 할 수 없을것 같아서 전방으로 가기를 지원했다.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방으로 가겠다는 결심으로 전방에 가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구청
    앞으로 지나 명륜학교로 가는 길에서 이웃사람을 만나 우리는 전방에 간다고 집에 전해
    달라고 부탁 하였다. 명륜학교 교정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전차 3대가 동래 중학교 앞에
    도착 하였다. 전차를 타러 가는데 어머니와 처는 기복을 업고 달려와서
    먹을것을 주면서 잘 갔다 오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긴 인사 말은 나눌 틈이 없었다.
    멀어져 가는 어머니와 처 그리고 기복이의 얼굴을 보면서 희미한 모습의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다가 보산진역 광장에서 내려 다시타고 갈 차를 기다렸고
    밤 11시가 넘어서 군 트럭을 타고 구조국민학교에 도착 하였다. 새벽 2시 정각에
    저녁식사를 끝내고 내무반에서 군복 총 및 기타 장비를 지급받고 그 날 아침부터
    맹 훈련에 땀을 흘렸다. 5일 째 되는날 호명을 하기에 나가보니 면회 왔다는
    소식이었다. 정식 면회는 못하고 비공식 면회라 후문으로 빠져나가 기복이를 업고
    만덕고개를 넘어 왔다는 어미니와 처 그리고 기복이를 콩 밭에서 만났다. 그 때 쯤 기복은
    겨우 한 발 정도 걸었지. 입소한지 1주일 만에 후배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구포역에서 열차를 타고 북으로 향해 처음 도착한 곳이 구마산 역이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속에서 군트럭에 옮겨타고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마산시내를 지나
    어딘가 분간 할 수 없는 큰 창고 같은 곳 이었다. 그 곳에서 잠깐 휴식한 후 실탄
    50발을 지급 받았다. 언제인가부터 꽝꽝하는 대포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하천 제방을 따라
    2시간 정도 행군을 하고 나니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낮에는 훈련 밤에는
    잠복근무를 한다. 3일 지나서 최전방 중대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되었다. 낮에는 전화선 깔고
    밤에는 잠복근무를 하는 고된생활이 지속되었다. 함안 그리고 군북 그리고 진주로 이동하였다.
    진주에 입성하니 남강다리가 없어졌다.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시내에 들어가니 어제의 인민재판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하루밤을 묵고 다시 산청 그리고 함양으로
    진군하였다. 운봉 고개에서 풋감 홍시로 주린배를 채우면서 휴식을 취하였고 다시 운봉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남원 전북 이리 전주 그리고 인삼의 고장 금산까지 진군하였다.

    금산은 전국에서 가장 인삼이 유명한 곳이었다. 진산면 학교 주변 교정에 야포 4문 장갑차
    2대가 우리중대 병력 200명을 밤중에 교대하고 막 잠이 들까 말까 할 때에
    인민군 만세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사방에서 요란한 신호탄과 대포소리가 요란했다.
    장갑차의 포성이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동이 트면서 여기저기 무수히 흩어져 있는 시체들
    속에서 수색대와 교신중 갑자기 교신이 중단 되면서 통신이 두절 되었다. 한 세시간 후에
    피투성이가 된 군복을 입고 빵구난 구멍난 철모를 쓴 수색대원 2명이 도착 했다. 수색대가 몰살
    당했던 것이다. 아군 2개 소대가 현장에 파견되어 적을 물리쳤으나 군수물품이 태산같이
    실려 있는 차는 우리가 후퇴한 뒤에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인민군이 도망가면서 아군 시체의 옷을
    모두 벗겨 가 버렸다. 차마 두 눈 뜨고는 알몽이 된 시체들을 볼수가 없었다.
    다시 강을 건너 38선에 도착하여 즉시 대전땅까지 진군한 뒤에 하루 쉬고 트럭 편으로
    충북 영동으로 향했다. 소백산맥을 향하여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손들고 내려오라고
    밤낮 목이 쉬도록 투항을 권유 하였지만 성과가 별로 없었다.

    다시 대전 큰다리 밑에서 6사단 2연대로 배속되어 서울로 진군 임진강을 건너서 북으로 갈때는
    1950년 10월이었다. 북으로 향하여 계천 덕천 그리고 초산에 이르렀다. 아! 압록강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는 살았구나 이제는 통일이 되는구나 이제는 굶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모두 흥분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개미떼와 같이 밀고 오는 것 아닌가
    한참 싸우다 보니 옆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가깝게
    들려왔다. 적군에게 빼앗긴 구급차에는 아군들의 날 죽이고 가라는 고성이 들렸다.
    아차 늦었구나 하는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다리야 날 살려라 막 뛰고 또 뛰었다. 이번에는 북으로
    진군하던 길이 정반대로 남으로 남으로 가야만 했다. 이리하여 다시 평안도 덕천으로
    향하였다. 덕천에 도착하기 거의 이삼십리 전에서 중동서와 만나 같이 있었는데 적군의
    폭격으로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폭격으로 죽었구나 생각하며 덕천 땅에
    도착하니 미 고문관이 탄 경비행기가 막 이륙할 찰나였다. 허기를 면할까 싶어 두리번 거리니
    트럭위에 건빵이 가득 실려있어 실컷 먹었다. 덕천은 이미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포위망을 빠져
    나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나 소용이 없었다. 남쪽에서는 나팔 징 호루라기 북 꽹가리 사람소리
    포소리가 진동하였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빠져 나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퇴양난이란 이럴 때 쓴느 말인가를 실감하였다. 배고픈데 건빵을 잔뜩 먹은지라 목이
    갈증으로 타는 것 같았다. 물은 없고 주위에 있는 눈을 뭉쳐 먹으니 목은 더 마르는 것 같았다.
    죽을 지경이다. 덕천은 작은 읍 정도의 산골마을 이었다. 마을보다 들판이 넓은 편 이었다. 몇일만에
    이르는 아군과 몇십대의 군 트럭이 엉켜서 이리밀리고 저리밀리는데 어이가 없었다.

    후일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뒷 집 문도(文度 이름 일까요?)가 19연대에 있다가 덕천에서 잡혀갔다.
    충성소리는 고막을 울리고 사람들이 고함소리 중공군 떼놈들의 징소리도 나고 나팔소리 호루라기소리
    총소리 계속 공격하면서 고함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밤중에 공방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살짝 개울 둑을
    타고 덕천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다시 평안도 순천으로 빨리 가야지 생각하고 쉼 없이 뛰었다.
    그러던 중에 민가에 들어가서 물을 먹고나니 잠이 소나기 처럼 밀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눈 위에
    앉아서 잠시 쉰다는것이 잠들어 실컷 잤다. 누군가 깨우기에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같이 동행하며 건빵을 나누어 먹으며 평안도 순천으로 향하였다. 순천에 도착하니
    헌병들이 부대 집결지를 알려주었다. 집결지에 오니 제주도 신병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날 저녁은 대우가 좋았다. 고기국에 밥도 많이 먹고 담배도 배급 받았다. 다음 날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우리 소대원은 7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대장 중대장도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운산으로 갔다. 운산에 가니 아군이 전멸 당했다. 다시 평양으로 후퇴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해삽(바다海서른
    348 [bgm]대한민국의 흔한 SLR자게이의 장롱탐험.jpg [새창] 2012-10-25 21:30:44 319 삭제
    뒷부분에 한자가 꽤 많아 다시 써봤습니다. 바뀐 문법에 맞게 보기 쉽게 수정해 봤습니다.

    나의 625 전쟁을 회상하며...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돌이켜 생각하기는 싫었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구나 1983년 6월 30일 KBS뉴스
    뉴스에 방송된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눈시울이 젖도록 지켜 보다가 더욱 더 지난
    날이 회상되어 옛 추억(한자로는 추억인데... 기억 내지는 과거로 보시는게..)을 더듬어 가면서 몇 자 적어볼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8시 정각 라디오뉴스 시간에 북쪽 인민군이 38선을 침공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 당시만 해도 38선에서는 왕왕 쌍방에서는
    충돌사고가 있었기에 또 충돌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여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번에는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뉴스를 통하여 들은 바에서 불과 3일만에
    서울 중심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 갔으니 소련제 탱크를 인민군이 앞 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 차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서울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소란하였다.
    이때 부산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부산 앞바다는 군수물자를 실은 외국 상선들이
    정박 해 있었고 수영 비행장은 군수물자로 가득 차고 피난 온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해매었고 국군 징병이 실시 되는 등 정말 어수선한 세상이다.

    그 해 7월 중순으로 기억 되는데 동회에서 징병 명령서가 내게 하달 되었다.
    동회에 집합하니 현역 군인이 대충 들어본 후에 우리에게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다음 날 역 앞에서 집결하여 유락 군민학교로 이송하였고 그날 부터 맹훈련이
    시작 되었다. 나와 같이 일제시대 때 징병을 경험한 사람들은 훈련이 익숙하다 하면 본부
    2중대 조교로 임명 되었으며 1개 소대를 가르쳐야 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라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80%가 넘어서 많은 신병들이 오전에 배운 것을 오후에 잊어먹고 하였다.
    훈련의 고달픔과 기합을 참지 못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도망 갔으니
    인원이 부족하여 길거리에서 다시 나와 잡아오곤 하였다. 이러하는 동안 몇날이 지났다.
    몇일을 생각 하여도 조교를 계속 할 수 없을것 같아서 전방으로 가기를 지원했다.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방으로 가겠다는 결심으로 전방에 가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구청
    앞으로 지나 명륜학교로 가는 길에서 이웃사람을 만나 우리는 전방에 간다고 집에 전해
    달라고 부탁 하였다. 명륜학교 교정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전차 3대가 동래 중학교 앞에
    도착 하였다. 전차를 타러 가는데 어머니와 처는 기복을 업고 달려와서
    먹을것을 주면서 잘 갔다 오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긴 인사 말은 나눌 틈이 없었다.
    멀어져 가는 어머니와 처 그리고 기복이의 얼굴을 보면서 희미한 모습의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다가 보산진역 광장에서 내려 다시타고 갈 차를 기다렸고
    밤 11시가 넘어서 군 트럭을 타고 구조국민학교에 도착 하였다. 새벽 2시 정각에
    저녁식사를 끝내고 내무반에서 군복 총 및 기타 장비를 지급받고 그 날 아침부터
    맹 훈련에 땀을 흘렸다. 5일 째 되는날 호명을 하기에 나가보니 면회 왔다는
    소식이었다. 정식 면회는 못하고 비공식 면회라 후문으로 빠져나가 기복이를 업고
    만덕고개를 넘어 왔다는 어미니와 처 그리고 기복이를 콩 밭에서 만났다. 그 때 쯤 기복은
    겨우 한 발 정도 걸었지. 입소한지 1주일 만에 후배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구포역에서 열차를 타고 북으로 향해 처음 도착한 곳이 구마산 역이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속에서 군트럭에 옮겨타고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마산시내를 지나
    어딘가 분간 할 수 없는 큰 창고 같은 곳 이었다. 그 곳에서 잠깐 휴식한 후 실탄
    50발을 지급 받았다. 언제인가부터 꽝꽝하는 대포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하천 제방을 따라
    2시간 정도 행군을 하고 나니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낮에는 훈련 밤에는
    잠복근무를 한다. 3일 지나서 최전방 중대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되었다. 낮에는 전화선 깔고
    밤에는 잠복근무를 하는 고된생활이 지속되었다. 함안 그리고 군북 그리고 진주로 이동하였다.
    진주에 입성하니 남강다리가 없어졌다.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시내에 들어가니 어제의 인민재판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하루밤을 묵고 다시 산청 그리고 함양으로
    진군하였다. 운봉 고개에서 풋감 홍시로 주린배를 채우면서 휴식을 취하였고 다시 운봉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남원 전북 이리 전주 그리고 인삼의 고장 금산까지 진군하였다.

    금산은 전국에서 가장 인삼이 유명한 곳이었다. 진산면 학교 주변 교정에 야포 4문 장갑차
    2대가 우리중대 병력 200명을 밤중에 교대하고 막 잠이 들까 말까 할 때에
    인민군 만세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사방에서 요란한 신호탄과 대포소리가 요란했다.
    장갑차의 포성이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동이 트면서 여기저기 무수히 흩어져 있는 시체들
    속에서 수색대와 교신중 갑자기 교신이 중단 되면서 통신이 두절 되었다. 한 세시간 후에
    피투성이가 된 군복을 입고 빵구난 구멍난 철모를 쓴 수색대원 2명이 도착 했다. 수색대가 몰살
    당했던 것이다. 아군 2개 소대가 현장에 파견되어 적을 물리쳤으나 군수물품이 태산같이
    실려 있는 차는 우리가 후퇴한 뒤에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인민군이 도망가면서 아군 시체의 옷을
    모두 벗겨 가 버렸다. 차마 두 눈 뜨고는 알몽이 된 시체들을 볼수가 없었다.
    다시 강을 건너 38선에 도착하여 즉시 대전땅까지 진군한 뒤에 하루 쉬고 트럭 편으로
    충북 영동으로 향했다. 소백산맥을 향하여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손들고 내려오라고
    밤낮 목이 쉬도록 투항을 권유 하였지만 성과가 별로 없었다.

    다시 대전 큰다리 밑에서 6사단 2연대로 배속되어 서울로 진군 임진강을 건너서 북으로 갈때는
    1950년 10월이었다. 북으로 향하여 계천 덕천 그리고 초산에 이르렀다. 아! 압록강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는 살았구나 이제는 통일이 되는구나 이제는 굶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모두 흥분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개미떼와 같이 밀고 오는 것 아닌가
    한참 싸우다 보니 옆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가깝게
    들려왔다. 적군에게 빼앗긴 구급차에는 아군들의 날 죽이고 가라는 고성이 들렸다.
    아차 늦었구나 하는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다리야 날 살려라 막 뛰고 또 뛰었다. 이번에는 북으로
    진군하던 길이 정반대로 남으로 남으로 가야만 했다. 이리하여 다시 평안도 덕천으로
    향하였다. 덕천에 도착하기 거의 이삼십리 전에서 중동서와 만나 같이 있었는데 적군의
    폭격으로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폭격으로 죽었구나 생각하며 덕천 땅에
    도착하니 미 고문관이 탄 경비행기가 막 이륙할 찰나였다. 허기를 면할까 싶어 두리번 거리니
    트럭위에 건빵이 가득 실려있어 실컷 먹었다. 덕천은 이미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포위망을 빠져
    나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나 소용이 없었다. 남쪽에서는 나팔 징 호루라기 북 꽹가리 사람소리
    포소리가 진동하였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빠져 나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퇴양난이란 이럴 때 쓴느 말인가를 실감하였다. 배고픈데 건빵을 잔뜩 먹은지라 목이
    갈증으로 타는 것 같았다. 물은 없고 주위에 있는 눈을 뭉쳐 먹으니 목은 더 마르는 것 같았다.
    죽을 지경이다. 덕천은 작은 읍 정도의 산골마을 이었다. 마을보다 들판이 넓은 편 이었다. 몇일만에
    이르는 아군과 몇십대의 군 트럭이 엉켜서 이리밀리고 저리밀리는데 어이가 없었다.

    후일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뒷 집 문도(文度 이름 일까요?)가 19연대에 있다가 덕천에서 잡혀갔다.
    충성소리는 고막을 울리고 사람들이 고함소리 중공군 떼놈들의 징소리도 나고 나팔소리 호루라기소리
    총소리 계속 공격하면서 고함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밤중에 공방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살짝 개울 둑을
    타고 덕천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다시 평안도 순천으로 빨리 가야지 생각하고 쉼 없이 뛰었다.
    그러던 중에 민가에 들어가서 물을 먹고나니 잠이 소나기 처럼 밀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눈 위에
    앉아서 잠시 쉰다는것이 잠들어 실컷 잤다. 누군가 깨우기에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같이 동행하며 건빵을 나누어 먹으며 평안도 순천으로 향하였다. 순천에 도착하니
    헌병들이 부대 집결지를 알려주었다. 집결지에 오니 제주도 신병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날 저녁은 대우가 좋았다. 고기국에 밥도 많이 먹고 담배도 배급 받았다. 다음 날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우리 소대원은 7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대장 중대장도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운산으로 갔다. 운산에 가니 아군이 전멸 당했다. 다시 평양으로 후퇴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해삽(바다海서른
    347 기획사와 결합한 성매매 등장…유명 여가수와 1시간 1000만원 [새창] 2012-10-23 15:01:15 2 삭제
    존나 쪽팔리다 진짜. 너넨 절대 해외진출 하지 마라.
    346 기획사와 결합한 성매매 등장…유명 여가수와 1시간 1000만원 [새창] 2012-10-23 15:01:15 15 삭제
    존나 쪽팔리다 진짜. 너넨 절대 해외진출 하지 마라.
    345 [스압]말하기 힘든 얘기지만 닉네임 까고 당당하게 얘기해볼래요. [새창] 2012-10-23 09:08:35 2 삭제
    정말 공부가 하고싶은거라면 연락해요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장학금 지원받으면서 외국에서 유학중 이예요.
    정말 공부가 하고싶으면 메일한통 보내요
    이야기좀 합시다.

    [email protected]
    344 쳇...결계인가? [새창] 2012-10-18 21:16:28 1 삭제
    이정도면 쳇...결계인가 가 아니라

    앜씨밖결곜았ㅆ.. 정돈 되야 할 듯
    343 터키쉬앙고라는 단모종이 없나요? [새창] 2012-10-01 23:59:54 0 삭제
    어차피 한국에 있는 터키시 앙고라는 순혈종은 전혀 없다고 보시는게 맞습니다. 윗분 말씀대로 페르시안과의 혼혈종이 굉장히 많구요 단모종 터키시앙고라는 해외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나 국내에선 터키시앙고라 종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342 고양이를 분양받았는데 [새창] 2012-10-01 23:57:01 0 삭제
    고양이가 숨을만한 박스를 만들어주세요. 가능한 빛이 들어가지 않고 작게 만드세요. 바깥에서 쉽게 안을 살필 수 없는 구조로 하실수록 좋아요. 고양이가 '내가 여기 숨으면 아무도 못찾아' 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시면 쉽게 안정감을 찾고 다가올 겁니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고양이가 숨어있는곳을 들추지 마세요. 고양이가 그곳에 숨으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신뢰를 주시고 기다리시면 고양이 쪽에서 먼저 다가올 겁니다.
    341 알바냥 [새창] 2012-10-01 23:52:57 21 삭제
    더럽게 재미없네

    고양이는 원체 냄새에 민감하고 안전을 살피는 동물이라 쉴새없이 스스로를 깨끗한 상태로 유지합니다. 이를 그루밍이라고 해서 털을 핥고 빗같이 생긴 앞니로 뜯어서 털에 붙은걸 떼어내요. 그리고 자신의 냄새를 만들어내는 분비선이 목뒤와 겨드랑이 아래쪽에 있어서 익숙치 않은 냄새가 나는곳에는 분비선을 부비적대 냄새를 뭍히려 하는거예요.
    이는 일단 습성의 문제고 심적으로 들어가보자면 잘 놀다가 문득 사람과 조금 거리를 두고 등을 핥는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행동이에요. 사람도 당황하면 머리를 긁는다던지 하는 공통적인 습관이 있잖습니까. 앉아있는 방향은 그다지 심리적 표현과는 상관없지만 일단 공격의사는 없는게 확실하네요. 추가하자면 앉았을때 발 모양에 따라 고양이가 느끼는 안정감을 알 수 있는데 바로 뛰어나갈수 없는 무방비한 자세 일수록 안정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눈을 마주쳤을때 귀의 모양과 동공의 크기 움직임으로도 사람과의 신뢰도를 알 수 있는데 귀를 앞으로 향하고 동공을 크게하여 눈한번 깜짝이지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다면 상당한 경계를 하는 상태이며 눈을 돌리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상태 눈을 작게 뜨고 감았다 떳다를 반복하며 꼬리를 세우고 다가온다면 친해지고 싶어하는 상태입니다.

    혹시나 가까이 다가와 배를 보이고 눕는다면 같이 놀아달라는 신호이며 간단한 장난감을 준비해 놀아주면 좋아하겠네요.

    스킨쉽은 배나 등부분은 피하시고 목덜미와 경계하지 않는다면 콧등을 가볍게 긁어줬을때 좋아합니다. 목덜미는 상황을 보셔서 벅벅 긁는 수준까지 긁어줘도 좋아합니다.
    340 알바냥 [새창] 2012-10-01 23:52:57 6 삭제
    더럽게 재미없네

    고양이는 원체 냄새에 민감하고 안전을 살피는 동물이라 쉴새없이 스스로를 깨끗한 상태로 유지합니다. 이를 그루밍이라고 해서 털을 핥고 빗같이 생긴 앞니로 뜯어서 털에 붙은걸 떼어내요. 그리고 자신의 냄새를 만들어내는 분비선이 목뒤와 겨드랑이 아래쪽에 있어서 익숙치 않은 냄새가 나는곳에는 분비선을 부비적대 냄새를 뭍히려 하는거예요.
    이는 일단 습성의 문제고 심적으로 들어가보자면 잘 놀다가 문득 사람과 조금 거리를 두고 등을 핥는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행동이에요. 사람도 당황하면 머리를 긁는다던지 하는 공통적인 습관이 있잖습니까. 앉아있는 방향은 그다지 심리적 표현과는 상관없지만 일단 공격의사는 없는게 확실하네요. 추가하자면 앉았을때 발 모양에 따라 고양이가 느끼는 안정감을 알 수 있는데 바로 뛰어나갈수 없는 무방비한 자세 일수록 안정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눈을 마주쳤을때 귀의 모양과 동공의 크기 움직임으로도 사람과의 신뢰도를 알 수 있는데 귀를 앞으로 향하고 동공을 크게하여 눈한번 깜짝이지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다면 상당한 경계를 하는 상태이며 눈을 돌리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상태 눈을 작게 뜨고 감았다 떳다를 반복하며 꼬리를 세우고 다가온다면 친해지고 싶어하는 상태입니다.

    혹시나 가까이 다가와 배를 보이고 눕는다면 같이 놀아달라는 신호이며 간단한 장난감을 준비해 놀아주면 좋아하겠네요.

    스킨쉽은 배나 등부분은 피하시고 목덜미와 경계하지 않는다면 콧등을 가볍게 긁어줬을때 좋아합니다. 목덜미는 상황을 보셔서 벅벅 긁는 수준까지 긁어줘도 좋아합니다.
    339 알바냥 [새창] 2012-10-01 23:45:28 1 삭제
    이런! 암컷인가 보군요! 그럼 더더욱 조심해야합니다. 인간의 공격수단인 손가락을 물어 반격을 막은 후 출산을 위한 영양분 섭취를 위해 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가능한 빨리 멀리 도망가십시오. 도망만이 살길입니다.
    338 알바냥 [새창] 2012-10-01 23:45:28 0 삭제
    이런! 암컷인가 보군요! 그럼 더더욱 조심해야합니다. 인간의 공격수단인 손가락을 물어 반격을 막은 후 출산을 위한 영양분 섭취를 위해 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가능한 빨리 멀리 도망가십시오. 도망만이 살길입니다.
    337 알바냥 [새창] 2012-10-01 23:00:49 36 삭제
    발정났네요 님을 덥치려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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