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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아빠는 엊그제 엄마와 함께 읍내 미용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꽃집을 들렀다. 집 근처 농협에서 저렴한 카라 몇 송이를 샀는데 홀로 두기에는 허전해 곁들인 친구들을 찾았지. 조팝나무 한 가지를 사서 나누어 잘라 넣고 군데군데에는 빛바랜 살구와 분홍, 잿빛 사이 어디쯤 있어 보이는 카네이션 몇 송이를 장식했지. 우리는 네가 식사하는 자리 바로 뒤에 그 화병을 올려두었단다. 열심히 밥 먹는 네 모습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금 더 화사하게 보고 싶어서. 갈아입히면 곧바로 범벅투성이가 되어 버리는 네 옷가지를 보아도 이제는 덜 화가 나더라.
아빠는 요즘 매일 같이 꽃을 보면서 산다. 벚꽃도 지천이거니와 동다헌에는 작약도 피었다 떨어지고, 수선화도 가득하지. 능수매화는 흐드러졌다가 꽃비가 내렸다. 기억나니. 며칠 전 할머니와 산책하러 가던 길에, 할아버지와 킥보드 타러 가던 길에 너는 꽃비를 맞았어. 정작 너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뭐 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꽃 그 자체는 아닐 테니까. 꽃은 어디에 두는지, 무엇과 함께 있는지가 중요하고 아빠는 네가 꽃잎 사이에 서 있어서 행복했단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화병이고, 그림이고, 대지니까.
꽃병은 꽃을 돋보이게 한단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지. 꽃병은 꽃을 품어서 지키고, 꽃의 언어를 우리가 들을 수 있게 풍족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꽃병은 산과 들과 대지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서 예로부터 자연을 굳이 내 몸 가까이 두려고 갖은 힘을 들였지. 예술이란 단어의 예(藝)는 본래 한자로 꽃과 나무를 잘 가꾸는 일을 뜻했다. 저 먼 산에 서 있는 꽃과 나무가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굳이 그걸 파 와서 내 정원에 심어야만 성이 풀렸다. 하지만 살던 곳이 바뀌면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모든 생물이 매한가지라 예나 지금이나 식물을 살리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던 듯해. 그래서 예술이란 작게는 저 먼 곳에 있던 식물을 죽이지 않고 잘 살리는 일이었고, 크게는 자연의 완벽함을 내 영역 안으로 옮겨와 인위적으로 훌륭히 살려내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꽃병은 후자를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고, 우리 가족이 하는 찻일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단다.
얼마 전 남해에 잠깐 내려와 쉬고 계시는 네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던 길에, 카페에 들렀는데 거기에 예쁜 꽃을 그리는 화가 한 분이 사시더라. 아몬드꽃 같기도 하고, 목련 같기도 한데 무슨 꽃인지 묻지는 않았어. 그냥 그 그림이 네 놀이터 근처에 두면 어울릴 것 같아서 갖고 싶었지. 그림을 살 돈은 없고 그래서 포스터를 주문해 두었단다. 엊그제 도착했다고 하니 조만간 가져와서 심심한 액자에 넣어 꽃이 다 지는 늦은 봄에 거실에 걸어 두어야겠다. 아이야. 너는 청명에 태어난 사람이니 평생 꽃과 나무와 함께 살아갈 운명이겠구나. 한 송이의 꽃으로 천지에 봄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되어도 좋지만, 네가 그 세계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담는 소박한 꽃병이 되어도 아빠는 좋겠다. 이미 너는 우리 가족에게 세상에 핀 단 하나의 꽃이니까.
청명날 앞에서,
우리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아빠로서 많은 이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어
야심한 밤에 분위기에 한껏 취해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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