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조선의 아나스타샤
게시물ID : history_99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4
조회수 : 85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08 23:48:40

요승(妖僧) 처경(處瓊)이 복주(伏誅)되었다. 처경은 평해군(平海郡)의 아전 손도(孫燾)의 아들이다. 용모는 자못 청수(淸秀)한 듯하나, 성질이 간교(奸巧)하고 사특하였다. 


신해년1563) 에 그 스승을 버리고 기전(畿甸)을 떠돌아 다니면서 자칭(自稱) 신승(神僧)이라 이르고 궤변(詭辯)으로 ‘곡식을 끊었다.’ 하고는 밤에 암혈(岩穴)에 들어가서 가만히 떡과 고기를 먹었으며, 또 여거사(女居士)1564) 로 나이 젊은 자를 꾀어서 불경(佛經)을 가르친다 칭탁하고 간음(奸淫)을 자행하였다. 


또 작은 옥(玉)으로 만든 불상(佛像)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전하여 말하기를, ‘무릇 빌어서 구(求)하는 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이 물결처럼 달려가 생불(生佛)이라 일컬었고, 여러 궁(宮)의 나인(內人)들이 공불(供佛)하기 위해 사찰(寺刹)에 왕래(往來)하는 자들도 존신(尊信)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혹은 그와 더불어 사통하는 자도 있었다. 


여거사로서 묘향(妙香)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곧 경성(京城) 사부(士夫) 집의 여종이었다. 일찍이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유복자(遺腹子)가 물에 던져졌다는 말을 듣고는 곧 처경에게 말하기를, ‘소현 세자의 유복자가 혹은 물에 던져졌다고도 하고, 혹은 생존해 있다고도 말하는데, 이제 스승님의 얼굴이 매우 청수하여 왕자(王子)·군(君)의 얼굴 모습과 비슷하니, 혹시 그렇지 않습니까?’ 하였다. 


처경이 이를 듣고 간사한 마음이 싹텄는데, 뒤에 복창군(福昌君)의 집안의 사람으로 공불 오는 자로 인하여 그 때의 일을 자세히 들었고, 또 요술(妖術)을 끼고 소민(小民)들의 미혹함을 얻고는 마음속으로 국가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드디어 왜능화지(倭菱花紙)를 일부러 더럽히고 언문으로 글을 써서 이르기를, ‘소현 유복자, 을유 4월 초 9일생’이라 하고, 그 아래에 또 ‘강빈(姜嬪)’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그리고 나서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의 집에 가서 울면서 그 종이를 보이고 말하기를, 


‘이는 곧 강빈의 수적(手迹)입니다. 매양 외구(畏懼)하는 생각을 품고 감히 내어놓지 못하였는데, 지금 성대(聖代)를 만나서 감히 와서 뵙니다.’ 


하니, 때마침 허적(許積)은 병으로 정고(呈告) 중에 있었고, 좌의정(左議政) 권대운(權大運)이 청대(請對)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작일(昨日)에 영상(領相)이 여러 재신(宰臣)과 더불어 그 글을 보고 그 사람을 힐문해 보았는데, 모두 다 말하기를, 「소현의 상(喪)이 4월 26일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4월 초 9일에 낳았다 하고 유복(遺腹)이라고 일컬었으니, 이미 크게 틀렸고, 또 강빈이라는 칭호도 그 당시에 일컬었던 바가 아니며, 그 글씨의 자획(子劃)도 분명히 상한(常漢)이 쓴 것인 데다가 그 음(音)을 따라 오서(誤書)한 것이 많아서 더욱 의심스러웠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2품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의 회합을 명령하고, 처치할 방도를 물었던 바, 모두 시험삼아 추문할 것을 청하므로, 곧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삼사(三司)로 하여금 훈련 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에서 회동하여 추핵(推覈)하도록 하니, 이는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모두 듣고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 


처경이 공술(供述)하기를, ‘당초에는 거짓 물에 던졌다고 속이고 다만 담았던 궤(櫃)만을 던지고는 가만히 내 몸을 뽑아내어 궁인(宮人) 정씨(丁氏)로 하여금 묘향에게 내주어서 숨겨두고 기른 지 10여 년에 묘향이 체발(剃髮)케 한 것입니다.’ 하였고, 묘향은 공사(供辭)에서 이르기를, ‘처음에 처경을 보니, 당시에 처경은 이미 삭발하여 중이 되어 있었고, 그가 신이(神異)하다는 말을 듣고 스승으로 섬겼으며, 이름을 묘향이라 한 것도 역시 처경이 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함께 면질(面質)을 시켰더니, 처경이 말이 막히는 데도 오히려 불복(不服)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유혁연(柳赫然)이 포청 군관(捕廳軍官)으로 하여금 그의 바랑 속을 뒤져서 그의 친척(親戚)과 서로 통한 편지에서 성명(姓名)을 상고할 수 있는 것을 얻어내고, 또 능화지에 위서(僞書)할 때의 초본(草本) 수건(數件)을 얻어내어 간사한 정상이 모두 드러나서 비로소 실토(實吐)하므로 드디어 그 친척과 서신을 통한 자들을 잡아와서 그가 손도의 아들인 것을 물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생년(生年)은 임진년1565) 이었다. 


손도와 그 아내는 이미 다 죽었고, 처경의 외삼촌[舅父] 및 그의 스승 지응(智膺)을 잡아다가 처경으로 하여금 보게 하였더니, 처경이 눈을 감고 보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시켜서 그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하고 물으니, 처경이 비로소 응답하기를, ‘과연 스승이요, 과연 외숙(外叔)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목을 베었는데, 묘향은 형신(刑訊)받다 죽었으며, 처경과 더불어 교결(交結)하고 용접(容接)한 자는 모두 유배(流配)시켰다. 그리고 포도 군관으로 바랑 속에서 글을 찾아낸 자는 논상(論賞)하였다.


-숙종 5권, 2년(1676 병진 / 청 강희(康熙) 15년) 11월 1일(기묘) 1번째기사 요승 처경을 복주하다.




소현세자는 부국 강병을 꿈꿨던 그 찬란한 이상에 대비되는 참담한 죽음 만큼이나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커다란 사건 특히나 불운한 일에 곁다리로 붙어 떠도는 소문을 이용하여 큰 이득을 보고자 하던 사기꾼들도 당연히 조선에도 종종 있었겠지만 이와 같이 왕실과 사대부를 농락하며 벌인 사건은 참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찾아본다 할지라도 몇이나 될까 싶은 대단한 일입니다.


또한 생년월일이나 시호, 필적 위조등 결정적인 부분에서의 문제는 있지만 왕실에서나 쓰이던 귀한 왜능화지 즉 일본에서 직수입한 종이까지 구해다 쓸 정도로 치밀한 점이나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백성들이라는 지지기반을 굳혀나가며 차근차근 그러나 대범하게 실행했던 계획은 높게 사줄만 하지 않나싶습니다.


더불어 이와 같은 조선 전체를 뒤흔든 사기꾼이 출현한 상황 이면에 대로大老 송시열로 대표되는 신권의 급격한 대두에 따른 왕권의 약화와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에 따른 민심의 이반을 엿볼수 있기도 하며 무엇보다 소현세자의 손자인 만일 숙종이 아니라면 왕이 되었을 임창군이 살아있을때의 일이라 러시아 제국의 아나스타샤 공주의 생존설과 자칭 아나스타샤들의 이야기 처럼 IF를 생각할수 있어 흥미롭고 재밌는 것 같습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