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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 에 대한 반박 / 에 대한 반박
게시물ID : history_99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촌놈색이
추천 : 6/8
조회수 : 805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6/08 18:52:24

우연히 옛날 외장하드를 뒤지다가 재미있는 걸 받아놓은 게 있어서 올려봅니다.

 

상당히 흥미롭군요.

 

아 출처는 너무 오래되서 잘 모르니 그냥 제 외장하드라고 하면 안될까요? ㅎㄷㄷ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 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있어야한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 있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라는 고문헌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北崖子의 서문 中에서.


-----------------------------------------이 글의 반박------------------------------------------------------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에른스트 폰 헤쎄-봐르테크의 라는 책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존 로스는 중국 선교사다. 문제는 저런 말은 그 책에 있지 않다는 것 뿐이다. 국내신문의 보도내용은 이렇다.
[간도를 되찾자]동북공정에 반격 시작됐다
저 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중국 사신들이 봉황성문과 의주 사이를 왕래할 때는 조선측이 관할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런 말이 하북성이 근대 조선 것이라고 옮겨지는 것이다. 신촌에서는 기침한 사람이 동대문에서는 죽은 격이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중국고금지명사전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금과옥조다. 저 사전은 중국지명에 대해 각종 사서의 기록을 모두 옮겨놓은 책인데, 시대를 따지지 않고 자기 주장에 유리하면 다 채용해서 견강부회하여 자기 주장에 이용해먹고 있다. 당연히 저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글쓴이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다는 것, 이해한다. 역사공부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는 함정이 있다. 이라는 말을 넣어서 특정한 품종을 얻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몽골은 제주도라는 섬을 통째로 목장으로 만들어버린 것 뿐이다. 이런 간단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현혹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들의 실상이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중국 측에는 실제 연구결과를 적용하고 우리나라 쪽은 최치원이 써놓은 기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수법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런 것을 이중잣대라고 부른다. 수양제가 동원한 백만대군(여기에 보급병력까지 합하면 2백만이 된다.) 이런 것은 왜 예로 들지 않을까?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반도에서 그게 왜 불가능하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옛날에 내가 증명해 준 적이 있다. 또한 올해(2005년) 호남지방에만 폭설이 내린 것도 한번 생각해 봐라.
홍수기록으로 본 삼국의 강역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저 주장은 처음에 정용석에 의해서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은 증거로 쓰였다. 그후에 고려, 조선에도 메뚜기 피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다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논리적인 귀결로 고려, 조선도 다 중국 땅에 옮겨놓게 된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는 삼국사기와 같은 메뚜기 피해 사례가 숱하게 적혀 있다. 제발 찾아나 보고 이야기하기 바란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근거없는 이야기.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일뿐이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이런 시각이 이런 자들이 역사를 보는 자세다. 세월이 변해도 언어가 변하지 않고, 지명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라도 읽어보기를 바란다. 중국의 지명도 한반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중국의 대표적 수도로 모든 이들이 말 들어봤을 만 해도 , , ,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저 은 경상남도에 있는 지명이니 장안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겠는가?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수양제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넌 뒤 평양성에서 물러나다가 일격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청천강 설은 그런 기반 하에 나온 것이다. 평소에는 김부식을 있는대로 깔아뭉개다가 이럴 때는 권위있는 척 이야기한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그래서? 남한에 아파트가 서 있으니 미국 땅이라고 주장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서울에 관제묘가 있으니 중국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경상남도에 왜식 성이 세워져 있으니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더구나 저 이야기는 내몽골자치구와 요녕성의 경계 부근에서 발견된 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도에서 내몽골 자치구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또 요녕성과의 경계라면 어딘지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저 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 몽골의 어디쯤인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 저런 말이 나온 근거는 이 기사다. 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닮은 부분도 있고, 닮지 않은 부분도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고구려칸이라니? 이런 헛소리는 처음 본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치우를 중국에서 고리국 황제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처음 본다. 황제라는 개념 자체가 진시황때 만들어진 것인데 무슨 헛소리인가?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련도 없다. 헛물 켜지 말기를. 저런 주장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인데, 우리가 거기에 장단맞춰주는 셈이다. 제발 정신차리기 바란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중국에도 없다.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거짓말이다. 박혁거세의 무덤은 경주에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다. 경주는 땅만 파면 신라 유물이 나온다. 대체 그 유물은 뭘까? 중국에서 파와서 거기다 묻어두었겠냐? 그럼 석가탑, 다보탑은 왜 안 묻어두었겠냐? 무구정광다라니경이나 석가탑에서 나와 그동안 보관해 두었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해독하게 된 불국사중창기(고려때 기록)는 뭘까 생각해 보기 바란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역시 거짓말이다. 대체 뭘 수출했는지는 대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품목도 대지 않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길 보라.
박창범-나대일의 삼국시대 일식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참고로 이것도 같이 보면 좋겠다.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위의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문항 수만 불려놓는 것도 파렴치한 짓이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각도별 인구를 합산한 뒤에 내놓은 결론이다. 그렇게 세면 조선 시대 인구가 형편없이 줄어든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착안한 발칙한 아이디어다. 이런 결과 어떤 이는 중국의 장안은 페르시아에 있다는 등의 헛소리를 하게 된다. 최근에는 중국의 장안은 티벳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았다. 나는 중국의 장안이 경상남도 함양군이었다는 말을 차라리 믿겠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있어야한다.

저 인간들은 성이 중세 유럽에 나오는 거대한 규모인줄만 알아서 저런 소리를 한다. 경주 시내에만 성이 6개 있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18번에서 이미 다뤘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최치원이 한 말을 증거로 하는 이중 잣대까지 동원하고 있다. 재야학자 중 어떤 이는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과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끼리 싸워서 결론을 좀 낸 뒤에 와줬으면 좋겠다. 조선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사람 이야기로는 얄타회담 때 전승국들이 한국의 힘을 무서워해서 한민족을 한반도로 보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 (이런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와 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중국 대륙내의 요동이란 수나라때 설치된 요산현을 가리킨다. 지도에서 자만 나오면 요동이라 우기고 있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어떤 지돈지 나도 보고 싶다. 지난번 유조변 지도같은 황당한 내용일 것이 분명하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칠 때 군인들이 징병된 곳이 저곳들이다. 그곳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왜곡을 하다니 한숨만 나온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우리 서울을 한자로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서울이 중국 땅이었나 보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5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손은 한국말 하던가? 고구려 역사가 중국 것이라는 증거로나 이용될 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증거나 제출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역시 25, 26번과 같은 말로 문항수 부풀리기의 수법에 불과하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지명에 대한 부분은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모두 설명이 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위 항목과 마찬가지다. 위 항목과 같이 이 역시 문항 수 부풀리기.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위 항목과 마찬가지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양립이 되지 않는 사서다. 규원사화 진본을 믿고자 한다면 환단고기는 폐기해야 한다. 더불어 규원사화의 원본이라는 것은 그것이 숙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무슨 고문헌일까? 저 주장은 반절로 한자를 읽는데 우리나라가 가장 정확하다는 주장이며, 그런 주장을 통해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다고 우기기 위한 것이다. 중국인을 몽땅 우리민족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에 어떤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 중국 땅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자의 주인공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 말의 어순대로 쓰인 자료가 없다는 말을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우리 말에서 빼먹을 수 없는 과 같은 글자는 한자도 없다. 우리가 만든 한잔데, 우리가 자주 쓰는 발음의 한자가 왜 없는지는 생각이나 해봤을까? 이런 글자가 한 두개가 아니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토함산 뒤에 함월산이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다. 토함산이 화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에 토함산에 구덩이가 생기고 불이 3년간 탔다는 기록(삼국사기 태종무열왕 4년)에 의거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화구로 보기에는 너무나 작다는 것을 지적해도 못 알아듣는다.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토함산 화산론의 허구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중국 기록이 대체 어디 있을까? 이런 식의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다. 중국의 문헌? 이름조차 대지 않고는 있다고 우기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저런 문헌을 가져올 수 있는가?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아래 37번에 나오듯이 애신각라는 여진어로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청은 본래 나라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했다. 이것은 본래 아골타가 한 말에서 기인한다. 아골타는 와 원수지간이었다. 요를 멸망시키고자 맹세하면서 요는 빈철=좋은 철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나라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는 아니다.) 그래서 쇠보다 강하고 변하지 않는 금을 자기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금사에 나온다. 그런데 금사 지리지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금이라는 국호는 여진 완안부의 고향인 按出虎水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여진어로 按出虎는 금이라는 뜻이다. 이 물에서 금이 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것으로 나라 이름을 취했다고 한다. 신라 성씨가 거기에 왜 끼겠는가?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그렇다. 그리고 청 태종이 인조에게 삼고구두배를 시킨 뒤에는 자신들이 부모의 나라라고 했다. 옛날 동아시아는 부모-형제의 관계로 나라 관계를 정립했었다. 힘이 약한 쪽이 자식 나라가 되거나 아우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역사학의 기본에 속한다. 즉 기본도 모르는 소리인 것이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다. 왕의 출신에 따라 나라의 역사가 바뀐다는 한심한 생각에 기인한 이야기다. 영국 왕실은 독일에서 왔다. 그러면 영국은 독일땅인가? 노르만인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면 영국 역사는 노르만의 역사로 변하나?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원문 제시라도 하면서 이런 주장을 해줬으면 좋겠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39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39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족보에는 공자를 조상으로 삼는 사람도 있으며, 중국의 유명 인물을 시조로 삼는 집안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그런 상식으로 생각해도 백제 북쪽은 대방에게 막혀 있어야 한다. 말갈 문제는 복잡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백제가 중국 땅에 있었다고 한들 지리 공간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더불어 설명한 것도 본 적이 없다. 고대의 지리 주장은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다. 그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설명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늘날 우리처럼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도 없었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재야학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대목만 뽑아내서 자기들 주장에 이용한다. 사료를 자기 목적에 맞춰 취사선택하는 것인데, 결론을 내린 뒤에 취사선택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는 역사학이 금기로 삼는 방법이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그렇다. 유주자사가 관직이었으니 태수들을 거느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자들은 이런 것을 증거로 고구려가 유주를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려면 자사라는 관직이 고구려의 관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대개 이 대목은 요서백제설과 연관짓거나, 고구려의 오기라고 본다. 기록이 북쪽에 정통하지 못한 남중국에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고려도경에는 이렇게 나온다.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로는 2천여리, 남북으로는 1,500여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쪽과 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 여기서 옛날이라 함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이라는 부분을 똑 떼어놓고 있다. 재야학자들이 사료를 인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식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사기치는 것에 불과하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 정말 알고 싶다. 이것은 칭기즈칸의 조상인 알랑-고아가 임신을 한 내용이 고주몽의 신화와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그 부족 이름 중에 "코리"가 들어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오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칭기즈칸의 어머니와 아내로까지 이야기가 변한 모양이다. 신촌에서 재채기한 사람이 동대문에서는 죽었다고 소문나는 격이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면서 꼬투리를 하나하나 잡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보면 한국전쟁도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중국 지명도 상당수 한반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세상에는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 여럿 있는 법이다. 본인이 한문 실력이 안 되는 것을 저렇게 변명하나?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어느 기록일까?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1번과 동일하다. 그리고 서쪽으로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하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그래서?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을 뺑돌았을 때의 거리라고 명기되어 있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 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어디에 나온 말인지도 적어놓지 않았다. 이 말도 대동여지도에 적혀 있는 이라는 단어 하나를 보고 상상한 내용이다. 한문을 읽을 줄 모르면 떠들지나 말았으면 싶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때 종군 신부다. 무슨 책에 나오는 이야긴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대체 이자들은 조상이 남긴 기록은 하나도 믿지 않으면서 어디선가 줏어들었다는 이야기에는 목을 맨다. 저 타타르라는 말은 일본에서 여진족을 부르던 이름에 불과하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루이스 프로이스도 임진왜란 때 종군한 신부다. 이 사람의 책에는 이렇게 조선이 나온다. 마술사의 마술처럼 그 본질을 알게 되면 저런 주장은 매우 초라해지는 것이다.

21번 항목에서는 조선 인구가 37만명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조선 인구를 근거로 조선과 삼국은 같은 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48 - 58번 주장은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는 근거 아래 만들어진 내용이다. 서로 간에 모순되는 주장이 이 글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부분을 재야학자들끼리 정리 좀 하고 떠들어 주기 바란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이것은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다. 일제는 20만권의 사서를 태웠나를 읽어보기 바란다. 더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겨두었다고 하니 견강부회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고려시대 역사기록으로는 제왕운기와 동국이상국집, 익재난고 등이 남아있고, 조선초기에 제작된 삼국시대 역사서들도 많이 남아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이 글의 반박에 대한 반박--------------------------------------------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이는 기상대 자료만 꼼꼼하게 따져봐도 당장 거짓임을 알수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15~20년정도를 주기로 이런 현상이 한반도내(더더군다나 남한만 따져도!!!)에서도 일어납니다. 몇년전 경상도쪽에서는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같은날 충청도와 전라도쪽은 가뭄으로 논이 갈라지는 장면등이 뉴스에서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 이 글을 쓴 사람은 과거의 홍수 기록과 현재의 홍수 기록을 혼동하는 것 같군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시대는 대기오염, 환경오염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 상이라도 경상도에 홍수가 전라도에 가뭄이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지요. 위의 기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위도와 경도가 다른 드넓은 중국 대륙입니다. 글쓴이가 과연 옛날 기상학 기록을 보고 반박을 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 근거없는 이야기.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일뿐이다.

==>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오늘날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족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

"개원(開元) (당나라 현종 713 ~ 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구주(九州)의 설치는 동쪽으로 길림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에 이른다"

그렇다면 만주원류고에 있는 위 기록은 구라란 말인가? 글쓴이의 무지를 알수 있게 한다. 과연 반박문을 쓴 이가 제대로 된 사서는 읽었는지 궁금하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 그래서? 남한에 아파트가 서 있으니 미국 땅이라고 주장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서울에 관제묘가 있으니 중국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경상남도에 왜식 성이 세워져 있으니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더구나 저 이야기는 내몽골자치구와 요녕성의 경계 부근에서 발견된 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도에서 내몽골 자치구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또 요녕성과의 경계라면 어딘지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저 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 몽골의 어디쯤인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 저런 말이 나온 근거는 이 기사다. 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이건 사실이다. 2~3년전 국내학자들이 몽골로 고구려 성터를 확인하기 위해 내몽골 지역으로 가서 고구려전통의 성곽 축성기법과 일부 고구려 유물을 확인하였다. 다만 단지 땅위로 들어난 것만 확인했을뿐 구체적인 유물발굴등은 하지 못한 상태이다. 몽골과 더 긴밀하게 협조한다면 자세한 유물조사가 가능하겠지만 실상 정부나 학계에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하는 눈치다. 이 고구려 성터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 고구려의 영토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영토보다 배 가까이는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만주뿐이 아닌 몽골지역의 초원도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어 당시 실크로드의 하나인 '초원의 길'이 고구려의 영향력아래 있었는지를 밝힌수도 있는 유물들임에도 강단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깨질까봐 나서지 않고 있고 정부는 일부러 나설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이후 연구는 답보상태로 알고 있다.(당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이를 방영한적도 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 닮은 부분도 있고, 닮지 않은 부분도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고구려칸이라니? 이런 헛소리는 처음 본다.

==> 정재승 선생의 글은 못 보았나?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이런 헛소리를 하니 참 한심하다. 바이칼 호수 주변부족에 전승되는 신화와 우리의 신화가 일치되는 부분이 있고, 그들의 풍습이 우리와 같다. 게다가 우리의 전래동화인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발원지가 바로 이 곳이다. 이는 적어도 우리와 이들간의 풍속, 문화가 옛날에는 공유했음을 뜻한다. 고구려칸에 대해서는 본인 역시 의문점이 있지만 한번쯤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옳지 못하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치우를 중국에서 고리국 황제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처음 본다. 황제라는 개념 자체가 진시황때 만들어진 것인데 무슨 헛소리인가?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련도 없다. 헛물 켜지 말기를. 저런 주장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인데, 우리가 거기에 장단맞춰주는 셈이다. 제발 정신차리기 바란다.


==> 중국 사서 사기는 읽어보았는지 의문이다. 사기를 보면 치우를 구려의 군주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려가 바로 고리국을 뜻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중국의 서욱생 교수는 치우가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동이족 계열이었다. 그러니 결국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치우가 중화족보다는 우리민족과 연관이 높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 이것에 대해서는 여길 보라.박창범-나대일의 삼국시대 일식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참고로 이것도 같이 보면 좋겠다.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를 무시하는가? 그리고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이라는 논문은 나와 동명이인인 전남대의 수준떨어지는 대학생이 어줍잖은 지식으로 나불댄 글이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대해 강단의 평가는 들었는지 궁금하다. 강단 중 일부 학자들은 박교수의 연구 결과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고대 천체기록은 매우 과학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 오차는 0.007%로 이는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가 사실임을 증명한다. 이를 부정하는 그대는 과연 진정 학문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위의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문항 수만 불려놓는 것도 파렴치한 짓이다.

==> 한단고기가 현재 위서 시비에 휘말리고, 게다가 증산도측에서 종교 교리 전파하는데 사용한다고 증산도 측에서 나온 종교경전이라 곡해를 한다. 물론 한단고기가 위서 시비에 휘말리고 있지만 그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단고기 영인본이 발견되었는데 영인본이 있다는 것은 한단고기가 무조건적인 거짓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서문을 보면 한단고기는 단 하나의 책이 아닌 옛 여럿 기록들을 하나로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가지 꼬투리를 잡고 위서다, 진서다라고 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검토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중국 대륙내의 요동이란 수나라때 설치된 요산현을 가리킨다. 지도에서 자만 나오면 요동이라 우기고 있다.

==> 현재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요동 요서 개념은 거란족 요나라 때 확립된 것이다. 현재의 요동과 요서와 고대의 요동과 요서가 같을 수 없다. 수경주를 비롯한 고대 중국 사서에는 요하가 지금의 랴오허 강이 아닌 베이징의 난하였다는 기록이 무수히 존재한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 고구려를 칠 때 군인들이 징병된 곳이 저곳들이다. 그곳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왜곡을 하다니 한숨만 나온다.

==> 과연 위 글을 쓴 자가 산동성의 향토지는 읽어봤을까? 지난 역사스페셜에서도 위 전설과 관련해서 중국 향토사학자가 자기네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연개소문 전설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럼 이 지방에 내려오는 연개소문 전설은 무엇이란 말인가? 향토사학자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건가?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 우리 서울을 한자로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서울이 중국 땅이었나 보다.

==> 아주 웃기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고려성터는 존재한다. 그것도 고구려 양식이다. 이는 고구려가 적어도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상당기간 동안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지배했음을 뜻한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5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 신채호 선생은 중국 베이징 일대를 답사해서 고려영진을 발견했고, 고려성터가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성 역시 고구려 양식 계통이다. 그리고 문헌상으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했음을 증거한다. 위 반박문을 쓴 이는 중국인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철저히 우리 역사를 깔아뭉개고 있다. 고구려가 북경지역까지 진출했음은 삼국사기, 진서 등의 문헌이 증거한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중국 기록이 대체 어디 있을까? 이런 식의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다. 중국의 문헌? 이름조차 대지 않고는 있다고 우기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저런 문헌을 가져올 수 있는가?


==> 중국 사서인 사기를 보면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사군을 설치했다 기록했다. 그런데 그 사군이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 아니라 날양, 추저, 홰청, 평주 4군이라 한다. 그리고 이 4군의 제후로 봉해진 자는 위만 조선 유민이다. 조한전쟁에 참가한 한나라 장수들은 대개 사형 같은 극형에 처했다. 그리고 낙랑, 진번, 임둔, 현도 소위 한 사군은 후한 대 이후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당대 기록인 사기의 기록이 정확할까? 후대 기록이 정확할까? 당연히 당대 기록이 정확하다. 결국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한사군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가?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다. 왕의 출신에 따라 나라의 역사가 바뀐다는 한심한 생각에 기인한 이야기다. 영국 왕실은 독일에서 왔다. 그러면 영국은 독일땅인가? 노르만인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면 영국 역사는 노르만의 역사로 변하나?

==> 그럼 위 반박자의 논리대로라면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네... 이 땅의 사학자, 엣 실학자들이 구라를 까고 있겠네... 국사 교과서에는 발해의 지배계층이 고구려인,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 유장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위 반박자의 논리라면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겠군....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 이런 원문을 보여주시죠...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원문 제시라도 하면서 이런 주장을 해줬으면 좋겠다.


==>원문 보여드리죠 ㅎ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 그렇다. 유주자사가 관직이었으니 태수들을 거느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자들은 이런 것을 증거로 고구려가 유주를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려면 자사라는 관직이 고구려의 관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다.


==> 진이 거쳐간 벼슬을 아는가? 그 벼슬 중에 국조대형이라는 벼슬이 있다. 국조대형이 어느 나라 벼슬인 줄 아는가? 바로 고구려의 벼슬이다. 간혹 위의 반박자와 같은 인간들은 진이 유주자사를 지냈는데 고구려가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으므로 진은 망명객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오늘날 베이징인 연군 지방을 습격했다는 기록과, 이 곳에 발굴되는 고려성터, 고려 관련 지명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고구려가 유주 까지 지배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못했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대개 이 대목은 요서백제설과 연관짓거나, 고구려의 오기라고 본다. 기록이 북쪽에 정통하지 못한 남중국에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남중국계 사서에 백제의 대륙지배가 들어있으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아는가? 북중국 계열 사서에 백제의 대륙지배를 암시하는 구절이 있음을 간과하는 것 같다.

북조 사서인『북제서』에는 서기 571년 북제의 군주가 백제의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도독(都督)/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사지절은 황제가 신임한다는 표시인 부절(符節)을 지녔다는 뜻이며, 도독은 군사의 최고 책임자이고 자사는 행정의 최고 책임자이므로 이 구절은 북제가 백제의 동청주 지배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청주(東靑州)는 지금의 산동반도 동남부에 있는 땅으로서 오늘날의 청도(靑島) 시인데, 백제가 해로의 요충지인 이곳을 손에 넣고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최치원전」에 나오는 “고구려와 백제가 강한 병사 백만을 이끌고 유(幽)/연(燕)/제(齊)/노(魯)/오(吳)/월(越)로 쳐들어가 중국의 근심이 되었다”는 구절과 맞아떨어져(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산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음) 북조 사서도 백제의 담로를 다루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됨을 덧붙인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백제의 영토에 대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양쯔강 지방)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백제가 황해를 건너 대륙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뜻하는 자료라 볼 수 있지 않을까?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조선사는 역사책이라고 보기보다는 사료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대체 읽어봤으면 저런 무식한 주장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자들의 특징은 읽어보지 않고 비난하는 데 있다.

==> 반박자는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흐름을 알고 하는 말인가? 조선사 날조의 원흉 이마니시 류의 수제자가 바로 진단학회의 이병도이다. 해방 후 한국 국사학계를 이끈 이가 바로 이병도이다. 그의 학풍은 이기백, 신석호, 이기동, 송호정으로 이어졌다는 걸 모르는가? 그리고 그대는 아는가? 1987년 이병도가 죽기 전에 한국사가 일본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발언한 사실을... 그런데 그의 제자들은 이병도가 노망들었다고 평한다.


그대와 같은 얼빠진 사대주의자가 더 이상 이 땅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진게 많다. 사서의 부족, 우리민족의 활동무대가 오늘날의 중국이라는 점 등으로 우리의 역사 복원이 요원하다. 그럼에도 그대는 왜 우리의 역사를 깎아내리는가?

우리 역사가 일제에 의해 많이 왜곡되고, 일제에 의해 많은 사서를 잃었다.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밝히지 않으면 그 누가 밝힌 것인가?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이 글이 전부가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전부가 거짓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필자는 위 60가지 중 사실로 입증될만한 명제를 추려 뽑은 것이다. 우리의 역사 찾기는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식민사관, 반도사관이라는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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