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안산도, 단원고도, 진도도 팽목항도 아닙니다. 사실 단원고라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건 청해진해운이라는 이름일 겁니다.
단원고는 그냥 큰 사고에 휩쓸렸을 뿐입니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단원고 학생이었고, 단원고 학생들의 유족들이 계속해서 꾸준히 조직적으로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에 단원고가 가장 부각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일반인 생존비율보다 학생들의 생존비율이 현저히 낮았기에 더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고요. 이래저래 단원고는 세월호를 얘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청해진 해운이 아닌, 단원고라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은 청해진 해운이란 이름은 잊혀져가는데 오히려 단원고라는 이름만 계속해서 부각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죽음앞에 슬퍼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외국에서 일본 대지진, 필리핀 태풍, 에볼라 바이러스같은 대참사가 일어났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애도하는 겁니다. 사망한 고인과 남겨진 유가족들, 부상당한 피해자들을 위해 묵념하고, 추모하고, 모금을 하고 그들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거. 그건 사람으로서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그렇게 추모로만 끝낼 일이 아닙니다.
모 놀이공원의 놀이기구에서 대형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놀이기구에 탔던 피해자들이 설비점검 똑바로 하라고 요구하고 있대요. 유족들이 나에게 호소하면 "그러게, 서명 한 번 해볼까"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름 석 자 적고 잊을지도 몰라요.
근데 만약 그 사고난 놀이기구의 다음 차례가 내 차례였으면요? 섬뜩하지 않나요. 놀이공원측에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대충 점검하고 괜찮다고, 다음 분 탑승하라고 하면, "아, 괜찮겠지 뭐~" 하면서 타실 겁니까? 아니면, 그 놀이기구는 영 찝찝해서 안 타지만, 대신 옆에 있는 다른 놀이기구는 괜찮을거라면서 타실 겁니까? 오늘은 사고가 있었어도 다음엔 사고 안 나겠지, 하면서 내일 또 올 겁니까?
성수대교 붕괴 후에 한강에 있는 모든 교량의 대대적인 안전점검과 보수공사가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에 전국의 모든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평가를 실시했고요. 대구 지하철 참사 후에 전국 모든 지하철에서 시트부터 내장재까지 가연성 소재가 싹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사고 후에는, 해경이 해체되고 전국의 모든 중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웃기고 병신같은 조처였지만 그 이후로 아주 훌륭한 프레임이 만들어졌죠.
여전히 사람들은 유람선과 선박여행을 즐기고, 배타고 많이 놀러들 다녀요. 왜냐하면 나는 고등학생이 아니고, 나는 수학여행 중이 아니고, 내가 탈 배는 세월호가 아니니까! 세월호 유족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해요. 나는 그 나이 또래의 애가 없으니까! 내 애는 세월호에 안 탈 거니까!
사람들은 지금 세월호가 나랑은 상관없는, 남의 사고라는 프레임에 갇혀있어요. 왜냐하면 자꾸 "단원고", "수학여행", "고등학생" "학부모"라는 단어에만 주목하기 떄문이죠. 어느 새, 세월호 사고는 단원고의 사고, 수학여행 가다 난 사고, 어린 고등학생들이 죽은 사건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유족이라는 말은 단원고 학부모, 자식잃은 부모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요.
심지어,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사람조차도 "자식 잃은 부모들이 불쌍하니까 원하는 대로 해주면 좋겠어."에서 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엾고 딱하니까 도와줘야겠다는 식으로 동정을 베풀듯 말하기도 합니다. 유족들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도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남의 일이니까 그 쯤 했으면 된 거 아니냐,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뭐가 그렇게 특별히 불쌍하냐 반감을 갖는 거죠.
그런데 사실 그 자리엔 단원고 몇학년 몇반 누구누구들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랜만에 같이 동창들이랑 여행가는 노인분들도 있었고, 세 살, 다섯 살 아기도 있었습니다. 제주도로 이사가기 위해 함께 탄 가족도 있었고, 신혼부부도 있었고, 커플도 있었습니다. 승무원도 있었고, 교사도 있었고, 트럭운전수도 있었고요.
내가 고등학생이 아니어도, 나이가 어리든 늙었든 그 사고를 당했을 수 있고, 앞으로 비슷한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뜻이예요. 내가 수학여행 중이 아니어도, 가족여행이나 커플여행을 가다가, 또는 이사를 가다가도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뜻이고요.
일본 대지진, 필리핀 태풍, 에볼라 바이러스에 휩쓸려서 죽은 사람도 다들 안타깝고 가여운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러가다가 사망한 남편보다 세월호에 타고 있다 익사한 학생이 더 가엾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혼자 외롭게 사망한 아이나, 가족여행을 가다가 사망한 아이가 수학여행 가다 친구들과 함께 죽은 아이보다 덜 불쌍한 것도 아닙니다. 혼자 죽은 사고가 아닌 여럿이 죽은 사고라 더 불쌍한 게 아니고, 인생 살아볼 만큼 살아본 노인네가 아닌 창창한 고등학생이라 더 불쌍한 게 아닙니다.
자꾸 초점을 불쌍하고 억울하다는 데에 맞추지 마세요. 모든 죽음의 무게는 다 똑같습니다. 누가누가 더 불쌍하고 힘든지 싸우자고 광화문에 나가는 게 아니잖아요. 유족들이 나 힘드니까 동정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세월호가 조금 큰 교통사고가 아닌 이유, 모두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서예요.
누구든지 거기에 있을 수 있었고, 누구라도 비슷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일어난 사고는 어쩔 수 없어도 앞으로 일어날 사고는 충분히 지금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진상조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식잃은 부모 심정이 어떻겠냐, 안타깝다며 자꾸 감정에만 호소할 일이 아니예요. 불쌍하니까, 억울하니까 유족들 마음 달래주고 싶으니까 진상조사를 해줘야 된다고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은 유족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족들에게 필요한 건 진상조사이지, 그런 동정의 눈빛이 아니예요.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일이 의미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추모는 당연히 필요해요. 그런데 그냥 거기서 끝내면 안 되잖아요. 그냥 추모만 하고 돌아설 게 아니라면, 그것보다 더 큰 목표를 생갹해야 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