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너에게,
다신 가지 못한다
잠수함/최금진
씨줄과 날줄로 엮은 스웨터를 입고 있다. 풀리지 않는 당신은 영원히 따뜻하다.
오해/천서봉
너는 웃으며 말했지
좋아해
다정하지 않을 뿐
보통의 존재/이석원
"다들 썩었어."
내 외침이 잔디밭을 건너갔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그렇게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쁘다.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네가 잠드는 소리가 오리나무 잎사귀를 밟고
산을 넘어올 때
나는 평화 뒤에 오는 불행도
발톱이 길어진 재앙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만질 수 없는 평화/이기철
그러게, 나도 용서해 줄게 영원인 척 하는 순간과 순간인 척 하는 영원 속으로 표절의 표절과 아류의 아류들을 읽으며 우리 어깨동무나 할까 우리라니 우리가 누구지 이토록 자명한 실패
관계들/김박은경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수몰지구/전윤호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총천연색으로 시위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멀리 하늘의 별을 비웃고
딸꾹질하듯 저녁에 어이없이 넘어가는데
지난 날의 들뜬 노래와 비명을 매장한 뒷골목을 순례하며
두리번거린다
조각난 상념들을 꿰맞추며 두리번거린다
아,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불면의 일기/최영미
처음 만난 날부터 당신을 조각내었다
함께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당신을 온전히 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매일 밤 당신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울었다
불한당들의 모험/곽은영
우리가 만난 곳을 생각해
내가 기대어 한숨을 쉬었던 그 벽에서
너는 두 손을 모아 균열에 대고 소원을 말했지
언 귀를 비빌 때마다 우리가 만난 곳을 자주 생각해
악몽을 피처럼 낭자하게 흘리며 네가 쪽잠을 자던
알 깨진 가로등 같은 몰골로 내가 마중을 나갔던 골목
새벽 세 시의 네가
오후 세 시의 나를
찾아왔던 날을 자꾸자꾸 생각해
언 발을 나무처럼 심어두고 싶었지만
어쩐지 흙에게 미안해서 그만두었어요
쓰러져 누운 모든 것들이
이불로 보이던 그 동네를 생각해
쓰러지며 발열하는 별 하나와 불빛 없는 상점들
같은 악몽을 사이좋게 꾸던
같은 소원을 사이좋게 버리던
실패의 장소/김소연
사진: 양지의 그녀, 사춘기 메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