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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으로 본 조선시대 붕당의 이해 해석본
게시물ID : cook_987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난다~
추천 : 13
조회수 : 1723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4/06/20 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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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 출처
http://pgr21.com/pb/pb.php?id=freedom&page=1&divpage=8&no=42883
 
 
장난삼아 써본 탕수육으로 본 조선시대 붕당의 이해가 뜻밖의 대박이 났네요.
호응과 관심을 가져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전글은 재미에 초점을 둬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쳐내고 최대한 요약해서 썼는데
이번글은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쪽으로 작성했습니다. 따라서 딱딱하고 지루할수 있습니다.



1. 주리론과 주기론

탕수육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당시 세력을 잡은 사림파는 탕수육을 먹는 방법을 가지고 둘로 나뉘었는데 이는 유치한 말장난이 아닌 고도의 사상이 바탕이 된 철학적인 논쟁이었다.

퇴계학파의 창시자로 주리론적 경향을 중시했던 이황은 리는 정신과 관념 즉 절대선이며 기는 환경과 기질이라고 설명했다.
즉 리로써 기를 누름으로서 참된 도덕적인 삶을 누릴수 있다는것인데 이러한 사상이 탕수육 먹는데도 바탕이 된다.
즉 탕수육을 먹을때 리는 탕수육을 만든 요리사의 의도와 탕수육의 근본적인 요리법이고 기는 배달로 인한 환경적 제약을 말하는데 원래 탕수육은 소스가 부어져나오는 음식이 원형이며 배달시 눅눅해지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고기와 소스를 따로 나눠서 가지고 왔을뿐이라는 것이다.

배달로 인한 제약보다 요리사의 의도를 더 중시한 이 사상은 근왕주의로 발전되어 요리 그자체 그리고 요리사를 중시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동인의 주된 주장이 되어 동인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어 요리사의 의도를 그대로 살리는게 좋다고 주장한다.
훗날 퇴계학파의 이러한 근왕주의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메이지유신시 근왕주의의 핵심사상이 된다.


반면 율곡학파의 창시자인 주기론적 성향의 이이는 기가 발동하면 리는 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며 기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즉 환경과 제도를 중요시하였는데 배달로 인한 배달부의 민생고충을 안타깝게 여기며 탕수육이 설령 처음에는 부어먹었던 음식이라고 해도 배달로 인한 환경의 제약이 있으니 탕수육과 소스가 따로 배달되는 현실에 맞춰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 더 맛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이는 그만큼 현실을 중요시했고 서인은 그의 그런 주장을 받아들여 이이를 종주로 모시고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걸 정통으로 보았다.





2. 임진왜란

일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통일되어 평소 조선의 탕수육에 관심이 많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조선도 이를 간파한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대표적인게 이이로 현실의 개혁과 사회경장을 주장한 그답게 십만 요리사 양병설을 주장하며 일본이 침략하여 탕수육을 뺏아갈때 요리사가 많으면 탕수육을 지킬수 있다고 역설하였으나 붕당싸움에 휘말려 그의 주장은 흐지부지된다.

한편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온건파인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을때 적어도 동의는 구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주장했고 그렇기에 서인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서인도 남인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과격파인 조식을 중심으로 한 북인은 탕수육을 소스에 부어먹는게 옳은데 구태여 뭘 물어보느냐라고 주장하고 동의없이 소스를 부었고 그렇기에 서인과 계속 크나큰 마찰을 빚었다.

이런 북인의 과격한 성향은 임진왜란때 빛을 발해 일본과 싸운 많은 의병장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즉 왜군이 탕수육에 손을 대기전에 먼저 빨리 소스를 탕수육에 부어버리는것으로 저항한다.

임진왜란이 터져 한때는 조선영토 대다수가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조선은 패색이 짙었지만 바다에서 이순신이 맹활약하고 의병들이 활약하며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3. 북인천하와 인조반정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광해군을 밀던 대북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는데 당시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어진다.
소북이나 대북이나 상대 동의없이 탕수육을 붓는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소북은 상대가 뭐라고 하면 미안한척이라도 했지 이이첨을 중심으로한 대북은 상대가 뭐라고 해도 이렇게 먹는게 당연한거다라면서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대북의 행태는 많은 서인들을 분노케 하였고 이러한 서인의 감정을 더욱더 자극시킨것이 바로 짬뽕국물 투하사건이다.

식사때 이이첨은 허균을 시켜 탕수육에 소스를 붓게 하는데 성급했던 허균은 소스대신 짬뽕국물을 탕수육에 부어버렸고 이에 이 탕수육은 못먹겠다고 하며 유폐를 시켜버린다. 이때 북인도 여러 파로 나뉘게되는데 짬뽕은 버려야한다가 골북, 탕수육도 같이 버려야한다가 육북, 둘다 버리는건 안된다가 중북이다.

당시 사대부들에겐 그 귀한 탕수육에 짬뽕국물을 쏟고 탕수육을 버릴려고 하는건 인륜을 저버린 패륜적인 행위로 인식되었으며 서인은 광해군과 대북을 반인륜적인 무리로 규정하여 인조반정의 명분을 찾게된다.

그리고 분노에 찬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북을 몰아냈고 그 뒤부터 상대의 동의없이 탕수육에 소스를 붓는 행위는 패륜적인 짓으로 매도당한다.






4. 예송논쟁

북인이 사라지고 서인과 남인이 남아 이제는 두 세력이 키보드 배틀을 벌이게 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게 현종때 있었던 예송논쟁이다.

서인이 권력의 중심에 있어 찍어먹는것이 대세가 되었고 남인도 원래 서인에게 우호적이어서 찍어먹는것에 대해서 그렇게 강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예송논쟁에서 서인을 이끌던 송시열은 한번 찍어먹는것이 예법에 맞다라고 주장했고 윤후와 허목은 세번은 푹 담궈서 소스를 듬뿍 묻혀 먹어야 예법에 맞다라고 주장했다. 이와중에 송시열에게 맞섰던 남인 윤선도는 그렇게 먹을거면 그냥 생으로 먹지그러냐 라는 과격한 발언으로 귀양을 가고 그 와중에 서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이 예송논쟁은 단순히 탕수육을 소스에 얼마나 찍어먹는가를 가지고 다투는 단순한 입배틀이 아닌 정치적, 학술적 상징성이 관련된 정통성에 관한 논의였다.


즉 요리사가 손님과 같은가 다른가 라는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대결이 있었다.

요리사나 손님의 중요성이 같다면 요리사가 원래는 소스에 푹담겨진 탕수육을 먹게끔 원했을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먹는 핵심은 손님이니 한번찍어먹는것으로 요리사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했다고 주장하는것이 이기일원론이고
음식은 요리사가 주도하는것이고 손님은 그에 맞춰 먹으면 된다라는 이기이원론에선 요리사와 손님의 중요성은 다르니 요리사의 의도대로 탕수육은 소스에 푹 담궈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인이 주장했던 사회는 손님이 직접적으로 요리에 개입하여 가장 맛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회였으며 즉 서인은 누구나 다 요리사이며 요리사나 손님이나 근본적으로 다를게 없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남인이 주장했던 사회는 요리사의 권위를 존중하여 요리사의 힘으로 요리의 맛을 결정하고 이를 각각의 손님에게 배당하는 사회였으며 즉 남인은 요리사는 손님과 다르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이 예송논쟁에서 밀리는건 붕당의 기반이 되는 학맥의 정통성의 문제로 귀결되었으며 서인과 남인의 중요한 핵심적 화두였다.







5. 숙종의 환국과 서인의 분파

현종때까지는 그래도 붕당이 그럭저럭 다툼없이 잘 굴러갔다. 예송논쟁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숙종이 들어서면서 붕당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숙종은 입맛이 상당히 오락가락하는 왕이었는데 숙종의 왕비는 인현왕후였고 인현왕후는 서인쪽 계열로서 탕수육을 찍어먹는걸 더 선호했다. 숙종도 인현왕후를 따라 그렇게 탕수육을 먹었으나 어느순간 남인계열의 장희빈이 준 소스를 듬뿍 부은 탕수육을 먹고 그 맛에 매료되게 된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만들고 인현왕후를 내쫒았으며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것을 정통으로 삼았다.

이에 권력을 잃고 쫒겨난 서인은 분노하였으며 복수의 날을 기다리게 된다.

이후 숙종은 다시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어본후 이게 더 맛있었구나 라는걸 깨닫고 인현왕후를 내쫒은걸 후회한다. 그리고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불러들이고 남인을 내쫒는 경신환국을 단행한다.

이 경신환국에서 서인은 남인들에게 복수를 하리라 맘먹었는데 이 와중에 송시열을 중심으로 남인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쪽이 노론이 되고 윤증을 중심으로 남인에게 유화적인 쪽이 소론이 된다.

노론은 탕수육은 소스에 조금만 찍어먹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론의 대표 아가리 파이터 송시열은 그외의 방법은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송시열은 성격이 괄괄한 확고한 원칙주의자로서 내가 먹는 방법이 정통이고 그외 다른 방법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배척했다.
애시당초 그렇게 소스를 푹 찍어먹으면 소스를 부어먹는것과 뭐가 다르냐라는게 송시열과 노론의 의견이었다.

소론은 탕수육을 소스에 여러번 찍어먹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다.

이후 송시열은 숙종의 심기를 거슬려 사사되고 사후 서인과 노론이 장기집권하면서 송시열은 집권세력들에게 탕수육의 참된 식사법을 전파한 성인으로 추대되게 된다.







6. 영조의 탕평책과 사도세자

숙종이후 붕당은 지나치게 과격해졌으며 상대를 존중하기 보다는 상대의 탕수육먹는법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저질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상대를 물리치면 아예 상대를 밟아 그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으며 지나친 당파싸움으로 인해 조정은 어지러웠고 민생은 파탄이 나기 시작했다.

이에 영조는 탕수육의 반은 소스를 부어먹고 반은 찍어먹는 탕평책을 제시했다. 탕은 탕수육의 탕이고 평은 평안하다의 평으로 탕수육 논쟁을 평온하고 평등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영조자신이 노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만큼 노론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고 소스를 부어먹자는 남인은 그렇게 힘을 내지 못했다. 소론역시 역모에 휘말려 많이 죽어나가며 세력이 꺾였다. 그로인해 탕평책 말기에는 다시 노론천하가 되고 만다.

이와중에 사도세자는 소스를 찍은 탕수육을 간장에 찍어먹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되고 결국 뒤주에 갇쳐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지고 정조이후 시파와 벽파가 나타나는데
시파는 사도세자에 동정적인 당파로서 탕수육에 간장 좀 찍어먹을수 있지 뭘 그거가지고 그러냐 라고 주장했고
벽파는 소스를 찍은 탕수육을 어떻게 간장에 찍어먹느냐 그건 미친놈이나 할짓이다라고 주장했고 사도세자의 추승또한 반대했다.

그리고 벽파는 탕수육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탕수육을 이상하게 먹는 역적의 무리인 남인, 소론과는 같이 한 조정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7. 정조의 탕평책 그리고 서학의 유입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역시 영조처럼 탕평책을 내세웠는데 영조처럼 표면적인 구색맞추기 탕평이 아닌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면 밀어주는 준론탕평을 내세웠다.

영조의 탕평은 완론탕평으로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드느냐에 따라 붕당을 지원하는것이다. 즉 탕평으로 탕수육을 반을 갈라 반은 소스를 부어먹고 반은 찍어먹더라도 소스를 붓다가 소스가 조금이라도 찍어먹을 탕수육에 튀기라도 하면 기분나쁘다고 식사에서 배제시켜 버렸다.

반면 정조의 탕평은 준론탕평으로 합리적이거나 왕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의견을 내는 쪽이라면 밀어주는 탕평으로 완론보다 유연하였고 이때문에 남인, 소론, 노론등은 다양한 탕수육 먹는법을 자연스럽게 제시할수 있었다.

이와중에 탕수육을 생으로 먹는 서학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사대부들은 소스도 찍어먹지 않고 그냥 생으로 탕수육을 먹는 이 서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많은 신하들이 서학은 금수의 학문이니 서학을 믿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정조에게 말했지만 정조는 소스를 맛있게 하면 백성들은 알아서 소스에 찍어먹을테니 서학은 자연스레 사라질것이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면 이 와중에 배달시키지 않고 직접 탕수육을 해먹는 실학이 발달되게 되는데 실학의 대가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을 가면서 직접 탕수육을 만들어보고 조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수많은 요리책을 남겼다.

그 후 정조는 병으로 앓아눕고 어린 순조의 안위를 위해 노론 시파였던 김조순을 중용하여 그에게 순조를 맡기게 된다.







8. 세도정치

정조가 죽고 처음 정권을 잡은것은 수렴청청을 하던 정순왕후와 이를 뒷받침한 벽파세력들이었다. 벽파는 서학을 금수의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지 않고 그냥 생으로 먹는 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후 김조순과 시파세력은 벽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게 되는데 평소 김조순은 안동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켜먹었고 김조순 이하 신 안동김씨는 안동 중국집을 중요시 여기게 된다.

김조순은 처신이 부드러운 사람이라 지나치게 남에게 안동 중국집을 애용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세도도 부리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김좌근때부터 안동김씨 세력은 조정의 주요직을 독점하며 안동 중국집만을 애용하라고 횡포를 부린다.

그결과 많은 중국집들이 경영난으로 문을 내리게 됐으며 나라는 무너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이와중에 흥선대원군은 탕수육을 먹을때 고기는 안먹고 서비스로 주는 군만두만 먹으며 안동김씨를 안심시킨후 뒷통수를 쳐 고종을 즉위시키고 안동김씨를 몰아낸다. 이후 개혁을 진행시켜 나름 성과를 보았으나 서울에 경복루를 짓느라고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민비에게 뒷통수를 맞아 결국 물러난다.

이후 각종 해외 열강들이 조선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다. 피시앤칩스를 들고온 영국, 푸아그라를 들고온 프랑스, 곰고기를 들고온 러시아, 스테이크를 들고온 미국.... 그리고 일제가 나가사끼 짬뽕을 들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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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대전제
 -   제대로된 중국집가서 홀에 앉아서 탕수육 시키면 볶아서 나옵니다.   볶먹이 원조
    그러나 한국적인 배달 문화에서  볶먹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스와 탕수육을 따로 가져다줌
 
 
 
 
1. 원류,원조문화에 맞도록 부어서 먹는다. 
 
   배달로 인한 제약보다 요리사의 의도를 더 중시한 이 사상은 근왕주의로 발전되어 요리 그자체 그리고 요리사를 중시하게 된다.
 
  퇴계이황
 
 
 
 
2. 한국적 현실때문에 따로 가져다주는데 기왕 이렇게된거 찍어먹어보자
 
탕수육이 설령 처음에는 부어먹었던 음식이라고 해도 배달로 인한 환경의 제약이 있으니 탕수육과 소스가 따로 배달되는 현실에 맞춰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 더 맛있다
 
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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