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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를 위한 변명
게시물ID : baby_70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arrow
추천 : 12
조회수 : 1305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5/04/05 01:57:03

글이 너무 공감되서 안하던 퍼옴을 해봅니다
글이 기니간 주의하시고 보세요


나는 원래 시를 쓰는 사람. 그런데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시인입네, 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상황.자연스레 나는 주부가 되었다. 해서 어느 날 머릿속에 띄워보게 된 낱말 주부, 시인. 징검다리 쉼표를 지우면 주부 시인... 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란히 붙여 놓은 두 낱말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친구처럼 다정해 보였다. 가끔 강연을 가‘주부 조기영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사람들이 농담인 줄 알고 웃는다. 농담 아닌데...

  요즘 배우 차승원 씨가 <삼 시 세 끼>에서 주부의 일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칼솜씨,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의 화려함에 취하지 않고 일상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그곳에서도 삶을 멋지게 요리해내고 있는 것 같다. 차승원 씨가 보여주는 일상과 주부가 보여주는 일상, 사실 그리 다르지 않다. 차승원이니까, 라고 말하지는 말자. 그 또한 차별의 시초가 될 수 있니까. 나는 다만 그가 밖에서 받을 융숭한 대접을 안에서는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에 주목했다. 밖에서 배우거나 모델이지만 집에서마저 배우이거나 모델이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집 안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요, 남편, 그것이면 된다.

  어느덧 결혼한 지 10년. 결혼 후 주부로 생활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남자의 눈으로 보던 것들을 여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이제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매일 아침 더 자려는 녀석을 어린진, 학익진법에 진지전, 고지전, 텔레비전(?)으로 전투를 치러 깨우고, 겨우 씻겨 대충 아침을 때운 뒤 녀석을 그녀와 함께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그 사이사이 돌이 된 둘째 이유식과 분유를 먹이고, 가족의 반이 빠져나간 집에서 놀던 둘째가 잠들면 옳거니 하며 냉큼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깨면 다시 시간을 봐 이유식과 분유를 먹이고, 그 분을 뵈면 닦고 씻기고, 때로 그 분이 나오기를 주저하시면 외람되게 비닐장갑을 끼고 마중 나가 모셔오기도 하고, 열이 나거나 콧물을 내놓으면 병원에 다녀오고, 약을 먹이고, 설거지 하느라 아이를 울리고, 달려가 달래고, 청소를 하고, 게을러 청소를 거르기도 하는, 나는 전형적인 주부. 밥하기, 설거지, 청소, 빨래 중 하기 싫은 일은 가끔 잊은 척 그녀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그러면 모르는 척 넘어가줄 때가 많으나 때로 세상의 아내들처럼 지청구를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별 문제는 없다. 부부란 완벽한 존재 둘이 만나 완벽한 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두 사람이 부족한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주며 사는 거니까. 세상에 완벽한 부부의 완벽한 부부 생활이란 없다. 아웅다웅, 알콩달콩하는 하루들 속에 어제보다 낫고자 하는, 울음보다 웃음을 피우려 애쓰는 시간들이 있을 뿐.

  사내인 내가 주부의 삶을 얘기하면 페미니스트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겠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페미니스트가 보기에 좀 우습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나는 남자. 내게는 아직 남자의 본능이 저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걸 잘 안다. 언제 느닷없이 활동을 재개할지 몰라 다급하게 쓸모가 있지 않는 한 그 남성들을 깨우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내가 모르고 있던 주부라는 세계, 애써 외면해왔던 이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며 배워가고 있다.

  주부의 눈으로 보는 바깥세상이란 대개 남자들의 세계.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과도하게 자부하는 남자들의 세계는 대체로 좀 빠르고 시끄럽다. 반대로 세상의 안쪽, 집 안은 대체로 고요하고 느리다. 그 정적이고 고요한 세계 한가운데에 주부가 있는 것.

  가족들에게 주부라는 존재는 일상의 공기 같은 것일 게다. 그래서 주부의 부재란 일상의 죽음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은 주부의 부재가 가져오는 필연적 현상들을 보면 알게 된다. 먼지가 잔디처럼 깔리고, 빨래가 산을 이루며, 개수대엔 그릇들이 파산한 회사 서류뭉치들처럼 널브러져 있고, 배달음식 MSG가 내장에 아스팔트를 깔아대는 세계가 죽음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주부가 집을 돌보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남편은, 아이는 불편하다. 좀 산다는 나라일수록 번성하는 서비스업이 대개 개개인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직업 아닌가. 그런데 밖에서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건 직업이고, 집에서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건 직업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 여전히 많다. 밖에서 하는 요리는 사업이지만 집에서 하는 요리는 끼니 때면 자판기처럼 나오는 밥일 뿐이고, 유아원, 유치원 선생님은 직업이지만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건 잡지에 딸린 부록 취급이니 주부들은 당황스럽다. 그리 말하는 사람 대부분이 남자... 그들 모두 엄마 손에 자란 사람들일 텐데도 그렇다. 그들을 위해 밥해주고, 입혀주고, 아플 때 밤을 새워가며 곁을 지킨 이는 분명 엄마... 그래서일까. 남자들, 감히 어머니까지 부정하려들지는 않는다.아니 입버릇처럼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주부인 어머니는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같은 일을 하는 아내는, 여자는 자꾸 가볍게 보고 폄훼하려 한다는 것.
  남자들에게 박혀 있는 그 이념(?)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유교의 영향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만 타자를 밟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사회 분위기와도 그리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근래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별해지기보다는 타자를 밟아 존재감을 키우려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다. 왕따가 그렇고, 같은 일을 하고도 차별받는 비정규직이 그렇고, 먼 나라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을 보는 눈길들이 그렇고, 땅콩 회항과 같은 무수한 갑질들이 그렇고, 특정 지역을 비하하기 위해 난무하는 말들이 그렇고, 부유한 집과 가난한 집으로 줄을 세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이 그렇다. 정상적인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 되고,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이 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는 주부를 대하는 우리 모습과 본질에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계의 주류라 믿는 남성들이 여성의 역할을 폄하하려 드니 여성들도 그런가, 하며 밖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드는 경우가 많다. 집안일은 일이 아니라는 논리, 세계의 역사는 남자들이 이루었다는 과도한 자부심이 뼈대가 된 논리가 여성들에게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리라. 여성들이 세상으로 나가 직업을 갖는 것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연히 꿈을 좇아나서야 한다. 다만 세상으로 나가 일을 하되 집안일을 작게 보지는 말자는 얘기다. 남자들이 만들어낸 희한한 논리에 휘둘릴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화려한 성공이 주목받고 돈이 주인이 된 시대...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꽃과 열매만 보고 거름과 뿌리는 보지 못하는 경우 허다하다. 뿌리, 줄기도, 가지도 없는, 사과만 있는 사과나무는 세상에 단 한 그루도 없다. 성공한 사람들의 황혼으로 종종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그것은 성공 논리에 지나치게 매몰돼 곁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바깥세상뿐만 아니라 안쪽 세계에도 정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거나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세상의 절반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을 것이다. 분투에도 그들은 결국 세상의 반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 한 친구가 전해준 말 중 가슴에 와 닿았던 말이 있다.
  "직업이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계란 껍질 같은 것이다."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누군가에게는 돈을 벌어 오라 하고, 누군가에게는 돈을 먹을 수는 없으니 돈으로 요리를 해내라는 게 생명의 요구. 그렇게 돈은 요리로 재구성되어 삶의 동력을 제공한다. 먹는다는 것은 공기로 호흡하는 일과 비슷하지만 무한에 가깝게 자연에서 제공되는 공기와 달리 예비하고 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주체가 주부. 생을 누군가의 객체로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주부도 마찬가지. 영화는 필요에 의해 주연, 조연, 단역이 정해져 있지만 조연, 단역도 삶이라는 영화에서는 모두 주인공들인 것처럼, 가족의 구성원인 주부도 아이도 남편이나 아버지의 부속품이 아니라 제 삶의 주인공들이다. 모두 생의 독립적 주체라는 얘기다.
  현대인은 부와 명성에 큰 가치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전부인 양 포장되고 있는 게 현실. 삶이 계속되도록 동력을 제공하는 집안일들이 부와 명성에 예속되기 시작한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집안일보다 부와 명성이 더 큰 것이라는 주장은 남자들의 논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남자들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알아주고, 격려하고, 축하해주는 것과 달리 주부의 일을 알아주고, 아껴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어쩌다 부정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일까.
  중학교 때 어머니는 매일같이 형과 나, 여동생과 남동생의 도시락 여섯 개를 싸주셨다. 그때는 어머니의 일이니 그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것은 작고 평범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들이 생명을 지탱하고, 삶을 지속시키며, 생의 무언가를 이루는 뿌리요 거름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한 일일 수만은 없게 된다. 그 일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나는 비슷한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사는 주부가 되고나서야 알았다. 인간에게 높은 세계가 있다면 깊은 세계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높은 세계는 어느 곳에서나 잘 보이는 반면 깊은 세계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닐 터. 땅 속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세계는 아니지 않은가.
  집에서 수행(?)을 하다 보면 어머니의, 아내의, 여자의 일은 변함없이 항상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기보다는 숱한 고민과 실수와 체험이 축적된 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 남자들에게 집에서 애보고 밥하라 하면 모두 이 핑계 저 핑계로 도망치는 모습 많이 본다. 남자들이 집안일로부터 도망치듯 달아나곤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고민과 실수와 체험이 축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집안일이 허드렛일이라는 것도 남자들이 밑돌을 놓은 논리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영어에 exploit,‘착취’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exploit는 고귀한 사람들의 ‘공훈, 공적, 위업’과도 어원이 같다. '착취'라는 개념으로도 '공훈, 공적, 위업' 개념으로도 쓴다는 말이다. exploit와 주부의 일, 남자들의 일을 비교해보면‘남성들의 공훈, 공적, 위업'을 위해 '여성의 일'이 적절치 않게 착취되어 온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성과 남성,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을 놓고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같은 내용, 같은 일을 남자들은 전혀 다른 내용, 다른 일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어머니의 일은 희생과 헌신으로 간주하면서도 같은 내용인 주부의 일은 허드렛일이라는 게 그렇다. 모순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남자들은 저 높은 전설적, 신화적 공간으로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비판을 불가능하게 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전설적, 신화적 존재를 누가 비판할 수 있겠는가. 남자들은 어머니를 전설적 주인공으로 상정해 그 줄거리를 읊어대며 감동하고 듣는 상대도 감화되기를 기대한다.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을 감동적으로 읊어 대는 것은 사실 자기와 아버지 몫일 수도 있었던 일들을 대신 짊어져 온 어머니의 삶을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재현해 달라는 말... 남자들은 모른다. 남자들에게 감동 그 자체인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여자들에게는 고단한 노동의 맨얼굴로 직접적, 실제적, 구체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십중팔구 어머니의 삶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 고단한 삶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안다면 그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여성들을, 여성들이 하는 일을 보는 남자들의 시각은 조선을 대하는 일본 제국주의나 인도를 대하는 대영제국, 아프리카 원주민과 아메리카 인디언을 보는 서구 열강들의 시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제가 조선을 밟고 그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했던 말이 '2등 국민'과 같은 종류의 말이었음을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모순투성이 논리를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은‘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종류의 이미 내면화된 인식들을 기반으로 한 폭력뿐이다. 그래서‘북어와 여자는 삼일에 한번씩 패야 한다.'는 폭력적 논리가 등장하는 법.
  몇 해 전까지 나는 외출 후 벗은 겉옷들을 의자나 소파 팔걸이 같은 곳에 걸쳐놓곤 했다. 옷가지들이 세 겹 네 겹 쌓이다 보면 그녀의 불만이 봉수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누군가 정리하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 속 누군가는 엄마이거나 아내일 터. 그녀가 지펴대는 봉화 연기에 지난날의 습관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게 불과 몇 해 전. 종종 고향에 가보면 아버지 역시 나나 매한가지. 하루는 아직 철없는(?) 아버지에게 선배(?)로서 훈수를 뒀다.
  "아버지, 옷 벗어 옷걸이에 거는 데 저 40년 걸렸어요. 아버지는 지금 시작해도 70년 걸리는 거예요."
  아무리 엄살을 떨어도 이 사회 남자들은 아직 특별하다. 기득권자로서 누리는 편리와 우월한 지위, 가사 노동 열외 같은 많은 유형, 무형의 제도들이 남자들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그 특별한 지위란 사실 여자들이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써 가능한 것들이다. 어떤 남녀가 특별하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스스로 불편을 감수함으로서 상대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남녀평등이 별 건가. 매순간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물 보듯 허투로 보는 주부의 일을 남자의 일과 동등하게 봐주는 것, 특별했던 과거를 회수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행동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편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한쪽의 편함이 한쪽에 고통이라면 그 편함은 자제되어야 마땅할 터.

  남자들이 오랜 세월 축적된 낡은 사고의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은 너무 불편해서 수천 년 동안 외면하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천 년을 이어와 유전자화 된 습관을 청산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잘하고 사는 듯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나 역시 많이 모자란 사람. 그 중에 남자. 편함에 대한 향수로 언제 퇴행할지 몰라 퇴로를 아예 차단해버리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아시는가.


며칠전에 이글을 쭉 읽어보면서 참 공감은 많이 했는데 저도 집안일 귀찮아 하는 평범한 남자인지라..
워킹맘 vs 전업주부 이렇게 이분법 조장하는 시대에 어느쪽이든 충분한 존중을 받기를..

출처 - 시인과 아나운서 (조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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