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조국근대화’의 기수라 하지만,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조국군대화’라 부르고 싶다. 전쟁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60만이 넘는 대규모 상주군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었지만, 민간인인 이승만이 지배했던 시기와 군인인 박정희가 지배한 시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 박정희가 집권했던 18년에서도 후반기인 유신 시절은 군대도 비상이 걸린 군대였다. 역사에서 보면 군대는 꼭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권력자들은 국방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징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데 적합한 인간형을 육성해내는 교육장으로 군대를 이용했다. 한창 전쟁을 치를 때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유지해온 한국도 그런 경우였다.
‘단 한명의 열외’도 없는 병영국가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병역기피자 수를 보면 그 규모가 전체 징병 대상자의 15~20%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직 국가의 행정 능력이 개개인을 철저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한데다가, 분단과 전쟁으로 호적 등 병사서류가 완비되지 않았던 탓에 매년 수만에서 십수만명의 병역기피자가 나왔던 것이다.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내각 공고 제1호로 병역의무 불이행자의 자수를 받았는데 1, 2차에 걸쳐 자진신고한 병역기피자가 무려 40만을 넘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은 1962년 병역법 개정을 통해 지방의 병무청을 신설하고 병무행정의 책임자를 국방장관으로 일원화했다. 원래 병무행정이란 민간인을 소집하여 군인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현역입대 후에는 국방부가 관리하지만, 민간인 신분일 때는 내무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대만의 경우도 한국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역정사는 국방부 소속이 아니라 내정부 소속이다. 지방병무청이 만들어지고 병무행정이 국방장관 책임으로 일원화되면서 지방병무청장은 병무행정에 관한 한 지방행정부서와 경찰관서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갖게 된 것이다. 1968년 이북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병영국가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병무행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1968년에 도입된 주민등록증은 개개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한 철저한 감시체제의 확립을 상징했다.
박정희는 “부정과 불신으로 얼룩진 병무행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1970년 8월 국방부 병무국을 해체하고 국방부의 외청으로 중앙에도 병무청을 창설했다.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박정희는 이듬해 2월 중앙병무사범 방지대책위원회를 열어 국가비상사태에서의 강력한 병역기피자 단속방침을 밝혔다. 그럼에도 병역비리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집권당인 공화당 의장 백남억, 산업은행 총재 김민호 등 병역비리 연루자들을 사직시키고, 장성급 10여명을 구속했으며, 병무청장 전부일을 해임한 뒤 자신의 육사 동기인 김재명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20일 박정희는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기존의 병역법이나 형법에 비해 처벌 규정을 강화한 것이 ‘병역법 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었다.
입영 및 소집 기피자는 기존의 병역법으로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나, 새 법으로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병무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병무청만이 아니라 유관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1973년 2월26일 대통령 훈령 제34호로 ‘병무행정 쇄신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병역기피자는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비국민’(히코쿠민)이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쟁책동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체제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흉포한 언어였다.
유신정권이 병역기피 일소 방침을 강력히 밀고 나가고, 또 이 무렵부터 행정의 전산화가 급속히 진전된데다가, 정전 이후 남쪽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징집연령에 도달하면서부터 병역기피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병무청에 따르면 1970년 13.2%에 달하던 병역기피율은 1973년 3월 특별조치법 발효 이후 0.3%로 급감했으며, 1974년에는 0.1%가 되었다.
5·16 직후의 병역기피자 수가 40만을 넘었던 것에 비한다면 10여년 뒤 병역기피자가 0.1% 이하인 200여명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병역기피가 근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단 한 명의 열외’도 없는 총화단결을 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공무원들을 달달 볶았다. 병역기피자가 발생할 때에는 “지방병무청과 구·시·군·읍·면·동에 있어서는 기피자 색출 책임자를 지정하고 철저한 색출 고발과 고발지연 또는 누락이 있을 때에는 관계 직원을 엄중 문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검찰 및 경찰서 단위로 병무사범 전담 검사 및 경찰관을 지명하고 각 경찰서 단위로 색출책임을 부여하여 그 검거 실적을 지검 검사에게 보고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붉은 페인트로 쓴 ‘기피자의 집’
병무사범단속 전담반의 활동 실적을 살펴보면 1974년 6월1일부터 7월15일까지 한달 반 동안 단속반은 관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업소 1만2584개를 조사하여 병역기피자를 고용한 6개 업소의 허가를 취소했고, “6284곳의 직장에서 539명의 병역기피자를 색출, 17개 업체는 병역기피자 고용 금지 위반 혐의로 사직 당국에 고발”했다. 이때 고발된 업체는 국제화학, 대성연탄 등 재벌급 대기업에서부터 동네 이발소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크고 작은 업체들이 망라되었다고 한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기피자 539명을 색출하기 위해 1만2500여개의 관허업소와 6200여개의 직장을 뒤졌다 하니 이에 동원된 조사관의 수와 쓰여진 경비가 어느 정도일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고 꼬집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단속이 이루어진 시점은 바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사법원에서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서슬 푸른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직후였다. 유신체제는 병역기피자 단속을 명목으로 개개인에 대한 검문검색과 직장과 마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사회기강 확립’을, 다시 말해서 사회를 길들여갔다.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유신 시절,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멎은 뒤 지금까지 60년 동안 군대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의 수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5000명을 제외하고도 군대 용어로 ‘비전투 인명손실’이 거의 6만명에 육박한다. 한국군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도 매년 1000명의 군인이 죽어나간 것이다. 이라크 전쟁 9년간 미군 사망자 수를 대략 4500명으로 잡으면 연평균 희생자 수가 900명인데, 한국군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이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이다.
죽는 이유도 참 다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병들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고, 맞아 죽고, 자살하고, 교통사고로 죽고, 산사태로 죽고, 눈사태로 죽고, 홍수에 죽고, 일사병으로 죽고, 가지가지로 군인들이 죽어나갔다. 요즘 <레미제라블>을 패러디한 <레밀리터리블>이 인기라지만, 군대에서 제설작업이란 <레밀리터리블> 식으로 낭만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사단장’ 시절에 폭설로 죽은 59명
1956년 2월 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을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에서는 제설작업을 하던 소대장과 사병 8명이 눈 속에 얼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는 등 모두 59명이 폭설로 사망했다. 당시만 해도 군대에서 후생사업이란 명목으로 숯을 만들어 내다팔아 간부들의 월급을 보충했는데, 숯 굽던 임시건물이 무너지거나 눈에 파묻혀 그 안에 있던 장병들이 질식사한 것이다. 인명 피해의 규모만 따진다면 천안함 사건보다 더 큰 피해가 났음에도 사단장은 인사조처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설에 고생이 많았다며 표창장을 받았다. 그때 만일 제대로 된 인사조처가 내려졌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박정희도, 박근혜도 없었을 것이다.
2006년 군의문사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위원회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식이나 형제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위원회에 사건을 접수한 사례는 600건에 불과했다. 군대에서 죽음을 당한 사례 중 겨우 1퍼센트 정도만이 뒤늦게라도 진상 규명을 요구한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군대에서 발생한 모든 죽음이 있을 수 없는 죽음이고, 의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건 중 1건 정도만 진상 규명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나머지 사건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결과를 기다릴 수가 없는데 괜히 수십년 전의 일로 다시 한번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식 곁으로 일찍 떠난 결과,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풀어 달라고 하소연할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600건의 사망사고 중 중복, 병합, 각하된 사건을 제외한 579건 중 58퍼센트인 334건이 비교적 최근인 1980년대 이후 사망자였다. 그 전체 인원수는 1만1180명으로 1954년 이후 전체 사망자 6만1424명의 18퍼센트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대중강연을 다닐 때면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금방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 버린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면 이명박, 박근혜가 연달아 집권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면 민주화돼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은 없단 말인가. 우리는 민주화가 남긴 가장 중요한 성과를 잊고 살아왔다. 군대 간 자식들을 부모 가슴에 묻어야 했던 죽음의 시대를 끝나게 했다는 점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8년 민주정권 출범 이후 군 사망자 수는 계속 줄어들어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르면 120~130명 수준으로 떨어져 현재에 이른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에 비하면 민주화는 군대 내 사망자 수를 10분의 1 이하로 줄였다. 강제징집된 병사들을 대상으로 밀정 노릇을 강요하다 6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낸 녹화사업 같은 것이 중단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는 꼭 데모하다 잡혀간 것이 아닌 매년 1000명이 넘는 평범한 젊은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냈다.
군사정권 시절 군대 내에서 엄청난 죽음의 행진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이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직후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제정한 대표적인 유신악법인 ‘군사기밀보호법’은 사실상 군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기밀 범주에 묶어놓았을 뿐 아니라, “신문·잡지 또는 라디오·텔레비전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죄를 범한 자는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할 수 있도록 하여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다.
군대 내에서의 사망사고가 크게 줄어든 데에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한 맺힌 몸부림이 크게 작용했다. 여전히 군 출신 노태우가 집권하던 1990년 11월에는 1987년 6월 군에서 의문사한 아들(이진동)을 둔 철거민 이충원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991년 2월에는 1987년 9월 군에서 의문사한 최우혁씨의 어머니 강영임씨가 한강에서 투신자살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가면서 자식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호소하면서, 군의문사 문제를 공론화하려 하였지만 당시의 언론이 군에서는 으레 너무나 많은 사람이 덧없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군의문사의 공론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사망자 확 줄고 사고는 드러나고…
군사독재 시절 군대는 성역이었다. 그때는 군대에서 사람이 떼로 죽어나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내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에야 군대에서의 사건과 사고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민주화 이후 군대 내에서 사고가 갑자기 급증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민주화를 비방하는
수구세력들은 민주화 이후 인권이니 뭐니를 찾다 보니 군대에서 군기가 빠져서 사고가 빈발한다 하고, 남북화해니 민족공조니 떠들다 보니 주적 개념이 사라져 사고가 급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군기가 바짝 들고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목 놓아 외쳤던 유신군대에서는 군기 빠졌다는 민주군대에 비해 열 배도 넘는 젊은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군사정권 시절과 민주화 이후를 비교해볼 때 한국군의 병력 수나 구조가 크게 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달라진 것은 민주화에 따라 군이 더 이상 성역이 아니게 되어 민간사회가 군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군대에서 사람이 죽으면 개 값만도 못했던 것이 이제 이등병의 죽음에 대해서도 경우에 따라 지휘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이 줄줄이 옷을 벗을 수도 있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사망사고를 적당히 덮을 수 없게 되자 실효성 있는 구타 및 가혹행위 근절이나 자살방지 프로그램 개발 등에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고, 실제로 사망사고 발생 건수는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한국군에서 수십년에 걸쳐 엄청난 비전투 인명손실이 발생한 역사적 뿌리는 초기 한국군의 상층부가 거의 대부분 일본 ‘황군’과 ‘황군’이 육성한 괴뢰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된 데서 찾을 수 있다. 후발자본주의 국가로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화를 추진한 군국 일본은 단체생활의 조직적 규율과 근대식 시간개념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전근대적인 농촌 청년들을 하루빨리 근대화된 군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단체생활의 경험이 없고, 시계를 볼 줄 모르고, 근대적인 시간개념이 아예 없고, 기계를 다뤄본 적이 전혀 없고, 문맹인 농촌 청년을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군인으로 만드는 작업은 당연히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내에서의 고질적인 구타와 가혹행위는 이런 필요성 때문에 상부에서 단순한 묵인을 넘어 조장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총력전의 시기에 후발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열악한 경제력을 만회하기 위해 일본군은 일찌감치 ‘화력주의’를 포기하고 정신력을 내세웠다. ‘육탄 3용사’ 등 몸으로 때우면서 ‘하면 된다’, ‘까라면 까라’의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일본 청년들조차 두들겨 패서 황군을 만들었는데, 하물며 총을 거꾸로 들지도 모를 식민지 청년들이야 몇 배 더 두들겨 패야 했다. 일본인들 밑에서 장교로 출세하고 싶었던 조선 청년들은 식민지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조선인 사병들에게 더 폭력을 휘둘러야 했다. 신생 한국군의 주역이 된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은 ‘황군’의 군사문화를 고스란히 한국군에 이식했다. 한국군의 겉모습, 전술교리와 편제와 무기는 미군을 닮았지만, 한국군의 의식구조와 작동방식은 일본군의 악습을 이어받은 것이다.
학살자 전두환이 그나마 박정희보다 나았던 점은 5공화국 시절의 군대 사망자 수가 유신군대 시절의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1981년 1월에 강제징집된 내가 자대에 배치되어 제일 많이 들었던 것은 군대 많이 좋아졌고, 지금은 유신군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새까만 졸병이었던 내가 보기에도 전두환이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분명했다. 전두환 시절 군대 사망자가 크게 줄어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은 자신이 나쁜 놈인지 아는 나쁜 놈이었다. 손에 묻은 학살의 피를 씻어내는 방법 중 하나가 군대 사망자 수를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전두환이 대일본제국의 마지막 군인이라 불린 박정희와는 달리 그래도 일본군 물을 먹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두환 세대도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세게 받은 세대이지만, 그래도 일본 군복을 입어 보았느냐 입은 적이 없느냐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사병을 ‘개’ 취급한 독거특창, 그리고 1만원
단 한 명의 열외도 인정하지 않고 병역기피율 제로를 꿈꾸었던 박정희 정권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무조건 군대로 끌고 갔다. 이제 이들은 민간인으로 병역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군대에서 항명죄를 범한 것으로 처벌받게 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논산훈련소로 끌려오자 훈련소장 김영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호와의 증인을 ‘교화’시켜라”라고 헌병대에 지시했다. 물론 때리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만 여호와의 증인이 늘어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며 “잠도 재우지 마라. 밤에도 놀리지 마라. 뼈 빠지게 일도 시키고, 반드시 교화시켜 재복무시켜라”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1975년 11월14일 여호와의 증인 김종식이 집총을 거부하다 중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쓰러졌다가 며칠 후 숨졌다.
김종식이 죽은 뒤 여호와의 증인으로 군대에 끌려간 박종욱은 장정 신분으로 김영선 훈련소장에게 불려갔다. 그에 따르면 김영선 소장은 다시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래서 논산훈련소에 설치된 것이 ‘독거특창’이다. 독거특창이란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증거로 전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특별 구금시설이다. 독거특창의 크기는 가로 1m, 세로 0.6m, 높이 2m의 벽돌로 지은 공간으로 논산훈련소 헌병대 영창의 일부 시설을 개조하여 설치한 것이다. 일반 교도소의 독방에 비해 훨씬 작은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공황장애 등 심리적 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다
. 독거특창에 수감된 사람들의 손은 뒤로 결박되었다. 누군가 잠이 들려 하면 헌병이 벨을 눌렀고 수감자들은 다시 벨을 눌러 답해야 했다. 손은 뒤로 결박되었으니 입으로 벨을 눌렀다. 식구통으로 밥을 넣어주면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입으로 밥을 먹었고 용변도 옷을 내리지 못한 채 그대로 보아야 했다. 개가 따로 없었다. 논산에서는 그래도 사망사고가 더 이상 나지는 않았지만 1976년 3월 39사단에 방위 소집된 이춘길, 1976년 3월 해병1사단에 방위 소집된 정상복 등 여호와의 증인이 ‘변사’ 처리 되었다. 이춘길의 유가족에게는 부대장 명의로 현금 1만원이 위로금으로 전달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을 포함한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약 3만4000명, 유신시대만 해도 무려 1만1000명 이상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신시대에 박정희는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이토록 많은 사망자가 군대에서 발생한 중대한 이유는 군대에 갔다 온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 죽음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 부모가 되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며 전전긍긍한다. 군대에서 살아 돌아와 군복무를 했던 쪽을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고 살아온 이 땅의 예비역들이여! 채 피지 못하고 쓰러져간 6만의 젊은이들에게 “받들어총!” 자식을 가슴에 묻은 12만의 아버지 어머니께 “받들어총!” 통곡을 하며 통곡을 하며 “받들어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