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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으로 생각해본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갑옷
게시물ID : history_201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미세린
추천 : 11
조회수 : 4850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03/25 01: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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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의 포졸복  VS  명량의 갑옷.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복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뭔가 힌트를 얻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에 잠시 다녀올까 합니다.

최고의 명군이라는 세종대왕 치세 때. 
조선군의 무장에 대해 추론 가능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ㅡㅡ

세종 6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16일(병술) 5번째기사
각도의 갑사와 별패도 군기와 갑옷을 사사로 장만하게 하다

전라도 도절제사가 계하기를,
“도내의 각색 군정(各色軍丁)은 군기(軍器)와 옷·갑옷을 모두 사사로 장만하는데, 홀로 갑사(甲士)와 별패(別牌)는 사사로 준비하지 않고 상번(上番)301) 할 때 군기감에서 받습니다. 하번(下番)302) 하여 시골에 있을 때 국경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맨손으로 전장에 나갈 것이 뻔합니다. 전일에 동으로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도 각색 군사는 모두 사사로 군장(軍裝)을 준비하였는데, 유독 갑사와 별패 등은 선군의 것을 빼앗아 갔으니 실로 미편합니다. 갑사와 별패도 사사로 군장을 준비하게 하고 하번할 때마다 엄하게 점검하여 뜻밖에 일어나는 변고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좇고, 이어 다른 도에서도 이 예(例)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6장 B면

ㅡㅡ 

상번 즉 입대할때는 국가에서 갑옷과 투구를 비롯한 무장을 지급하는데, 하번 즉 제대할때는 이 무장을 국가에 반납하고 가므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맨손으로 소집되어야 해서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과 같이 보급체계가 발달하였다면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교통도 불편해 중앙군이 즉각즉각 달려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무기를 사서 집에 보관하고 비상시 이것을 들고 전장에 나가라는 이야기지요.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니 돈으로 K2 사서 집에 놔뒀다가 전쟁나면 그거 들고 튀어오거나 싸워라" 라는거죠.

ㅡㅡ

세종 69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8월 9일(무신) 2번째기사
병조에서 잡색군의 무기를 통일할 것을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각도의 잡색군(雜色軍)이 자기가 무기(武器)를 갖추게 되매, 서로 같지 않음이 있게 되니, 뒷날 일에 임해서는 실로 절제(節制)가 없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기병(騎兵)·보병(步兵)을 매 5인마다 오(伍)를 삼고, 매 오마다 활 3개, 창 2개를 갖추게 하고, 이내 모두 갑옷과 칼을 갖추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상정소에 내려 이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69권 14장 A면
ㅡㅡ

세종 69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9월 1일(기사) 4번째기사
잡색 군정에 갑주와 병장기를 준비하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인하여 여러 도(道)의 백성의 생계가 염려스러우니, 지금 잡색 군정(雜色軍丁)의 갑주(甲胄)와 병장기(兵仗器)를 상고하되, 한꺼번에 다 점검(點檢)한다면 소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재산을 다 팔아서 반드시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니, 잠정적으로 매 1호(戶)마다 투구 한 개, 갑옷 한 벌, 칼 한 자루만 준비하도록 하고, 그 활·화살과 창은 반드시 다 준비하지 아니하여도 되며, 매 1패(牌)내에 5분의 3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5분의 2는 창을 준비하게 하여 정수(定數)로 삼아 점차 준비하도록 하되, 매양 1년씩 걸러 한 가지 물건을 더 준비하게 하고 준비하면 곧 점검하도록 하되, 감사·도절제사·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순행 점고(點考)하지 말도록 하고, 다만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고하도록 하여 도순검사(都巡檢使)가 지경에 내려가기를 기다리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2책 69권 20장 B면

ㅡㅡ

잡색군은 당시의 향토 예비군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향토 예비군의 기본 무장은 5명이 기본단위로
전원이 갑옷, 투구, 칼 로 무장을 하고 3명은 활과 화살, 2명은 창을 소지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이걸 100% 갖추게 하는것은 무리였고 이걸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전국이 이를 갖추도록 지도하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중앙에선 무장에 대한 샘플을 각 고을로 내려보내 각 고을에서 만들게 하였기 때문에
큰 형태는 다르지 않으나 각 고을마다 장인마다 그 질에선 차이를 보일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개인이 사사로이 무장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 따지면 누구는 AK-47 하나 겨우 장만했는데 누구는 악세사리 풀로 달아 HK416 장비하고 그런식이었겠지요.
여튼 덕에 세종때는 이런 일도 발생합니다.

ㅡㅡ

세종 114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0월 17일(신해) 1번째기사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대성산의 도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아뢰도록 유지하였다

평안도 도관찰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도내(道內)에 도적이 흥행(興行)하여 대성산(大城山)에 떼지어 모여서, 갑옷을 입고 병기(兵器)를 가지고 공공연히 다니면서 겁략(劫掠)하고, 영리(營吏)와 아전(衙前)들과 내통 공모하여, 관청에서 이를 체포하고자 하나 문득 도망하여 피하게 되니, 이와 같은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세력이 성하여 당여(黨與)가 이루어지면 작은 일이 아니다. 잡는 방략(方略)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비밀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5장 A면

ㅡㅡ

도적 놈들까지 갑옷 입고 설칩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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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조선의 손꼽히는 명군 세종대왕 치세때이고..
이후 긴 평화기를 거쳐 조선의 국방체계는 완전 난장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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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75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6월 27일(무술) 1번째기사
금군도 갑주에 칼을 차고 호위케 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평상시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이 진상(進上)하고 하직하려 숙배(肅拜)할 때 문을 지키는 군사와 데리고 온 사령(使令)은 모두 갑옷을 갖추고 옹위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단지 궐정(闕庭)에서 숙배할 때만 문을 지키는 군사를 두고 있다. 이렇게 하면 왜인이나 야인이 궐정을 엄숙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요, 궐정이 엄숙하지 않으면 경홀히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금군(禁軍)일지라도 모두 갑주(甲胄)에 칼을 차고 호위하고 서서 엄숙함을 보이도록 예조와 병조에 이르라.”
【태백산사고본】 38책 75권 20장 A면

ㅡㅡ

중종 82권, 31년(1536 병신 / 명 가정(嘉靖) 15년) 7월 12일(을축) 1번째기사
대열할 때 백관들도 병기와 갑옷을 갖추라 명하다

전교하기를,
“이달 안으로 선전관(宣傳官)들을 보내어 징병(徵兵)하게 하라. 성종조(成宗朝) 때는 대열(大閱) 장소에서 백관(百官)이 병기와 군복을 갖추고 점검을 받았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 군사들은 병기와 군복을 이미 다 갖추었겠지만 백관들이야 어떻게 다 갖추었겠는가. 폐조(廢朝)17806) 때 첩종(疊鐘)17807) 할 적에도 서울 안이 시끄러웠는데 이처럼 태평할 때에 갑자기 병기와 군복을 갖추라고 한다면 여염(閭閻)에 소요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는 우선 편의에 맞추어 병기와 군복을 갖추는 것은 제외하는 것이 어떨는지를 사관(史官)을 보내어 삼공에게 하문하여 가부를 아뢰라.”
하였다. 영의정 김근사 등이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큰일은 제사(祭祀)와 융사(戎事)입니다. 교련과 열병의 정령(政令)이 법령 전적에 실려 있는데 지금은 태평에 젖어 조정 신하들이 모두 병기와 군복이 없으니 급작스러운 변에 대비하는 자세가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편안할 때에 급난에 대비한다.’는 뜻에 매우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까닭없이 첩종하여 갑자기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만든다면 과연 소란해질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군정(軍政)이 매우 해이해졌기 때문에 처음으로 무사(武事)를 강습하는 판국인데, 또 임시 편의에 따라 병기와 군복을 제외한다면 고식적인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영영 대열의 영전이 폐지되어 끝내 병기와 군복을 갖출 때가 없게 될 것이니 일체 법전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10월 11일 대열할 때에 백관들도 병기와 군복을 갖추는 일로 승전(承傳)을 받들도록 하라.”
【태백산사고본】 41책 82권 14장 A면

ㅡㅡ

중종 91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7월 22일(정해) 1번째기사
무기를 견고하게 소장하고 점검할 것을 당부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군기시(軍器寺)의 무고(武庫)에 소장되어 있는 활·화살·갑옷·투구 등은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려 하는 것이다. 남 북간에 사변이 있으면 당연히 이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경오년의 왜란 때도 무고에 소장된 무기가 모두 파손되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국가가 무기를 미리 수리하여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는 뜻이라 하겠는가. 이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견고하게 소장함은 물론 때때로 점검하여 조금도 허술하지 않도록 하라. 또한 수령들을 불시로 척간(擲奸)하면 실제로 하고자 하는 일에는 이익이 없고 다만 관원만 파직될 뿐이니 지금부터는 우선 법령을 세운 다음에 척간하여 비행이 드러나는 관원이 있으면 법에 의하여 파직해야 한다. 이런 뜻을 본사에 이르라.”
【태백산사고본】 46책 91권 31장 B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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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은 군복과 병기를 구비하지 않고, 그나마 있는 무기는 사용하려하니 다 망가져 사용도 못하고
대궐을 지키는 금군도 그 군기가 예전만 못했습니다.
중종이 이를 걱정해서 검열하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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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89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1월 30일(기해) 2번째기사
간원이 또 군장 점열의 정지를 아뢰니 정지하라고 전교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태평한 날이 오랫 동안 계속되므로 군령이 해이해지니 군장을 점열하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는 것이 곧 안불 망위(安不忘危)18885) 의 뜻입니다. 그러나 지난 해에 천사의 접대와 천릉(遷陵)18886) 역사로 서울 근교의 백성들이 극도로 피곤해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해는 흉년이어서 군민들이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이 때 또 천사를 맞게 되므로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또 군장을 점열하는 일을 일시에 거행하면 지갑(紙甲)18887) 하나의 값이 1동(同)【베 50필.】에 이르고, 말 한 필 빌리는 값이 베 30∼40필을 넘게 됩니다. 다른 장비의 값도 다 이와 맞먹을 터이니 재산이 넉넉한 자는 이미 갖추었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자는 찌든 가난에 울부짖을 뿐인데 어떻게 이들에게 준비하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지갑은 좀먹기 쉽고 빌린 말은 점열이 지나면 즉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군졸만 괴롭게 하고 나라의 방어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만일 국가에 급히 간열(簡閱)18888) 할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급한 경보도 없으며, 하늘마저 재변을 보여 주는 때인만큼 임금이 친히 교외로 나가서 군장을 점열함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대간에게 답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은 중대한 재변이며 병상(兵象)에 속한다. 이와 같은 재변에는 군무 등에 관한 일을 더욱 염려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 천사가 나오게 되어 백성들이 많은 폐를 입을 것이므로 정지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점열 행사를 의논해 정한 지 이미 오래이고 중외(中外)가 모두 다 알고 있어, 무단히 중지시킬 수 없어 기다리던 참이었다. 대간의 말이 지당하니, 정지하도록 하라.”
【태백산사고본】 45책 89권 42장 A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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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급한 일도 없는데, 괜히 검열해서 백성들만 힘들게 하지말라고 개깁니다.
이렇게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은 2차세계대전 말 독일군과 같이 서류상은 수십만 병력에 갑옷,투구,환도,창,활의 기본무장과 화포,기병을 갖춘 막강한 병력이었지만... 실제는 이 모든게 공상에 떠돌고 있었습니다.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오합지졸 수십만에 있어야하는 무기는 없고 있는 무기도 망가져 있는 그런 전형적인 막장 군대의 모습이었습니다.(항시 최전선이던 북방 등을 제외하고)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불멸의 이순신 같은 포졸복 군대는 아니지만 상당수 병력이 제대로 무장하지 못하였을 거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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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조선은 여전히 상당수의 무장과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초기 대표적으로 세차례의 전투에서 소모해 버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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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8번째기사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적변(賊變)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하여 군대를 분배시킨 뒤 여러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에 나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령 밑의 문경(聞慶) 이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邱)로 달려와 둔병하여 원야(原野)에서 노숙하였는데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하여 밤중에 진이 저절로 무너졌는데 수령들이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돌아왔었다.
그 뒤에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곡(山谷)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잡아들여 군대를 뽑도록 당부하였으나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참(斬)하려 하였다.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왜적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자 이일이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참(斬)하였다. 이일의 군사는 척후(斥候)가 없는데다가 백성들이 또한 감히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적병이 벌써 상주 남쪽 20리 되는 냇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였다. 이일이 한창 상주 북쪽 냇가에서 습진(習陣)하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 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므로 이일이 그제서야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시켜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숲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軍人)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다.
적이 마침내 크게 집결하여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호(朴箎)·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입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장 B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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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첫번째로 당시 조선군은 병력이 소집된 뒤 총사령관이 중앙으로부터 내려와 이를 지휘하는 형태였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경상도의 병력이 대구에 집결해 있었는데
이일이 도착하기 전에 오합지졸의 병력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그대로 도주해버립니다.
덕에 이일은 수만의 병력을 지휘해야 했음에도 소수의 병력으로 상주방어에 나서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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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7일(병오) 4번째기사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다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제장(諸將)들은 모두 새재[鳥嶺]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입(砬)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은 포위를 뚫고 달천(㺚川)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장 B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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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신립의 탐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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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일(기축) 1번째기사
삼도의 군사가 용인에서 패하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李洸)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삼도의 여러 장수들이 이광을 맹주(盟主)로 삼고 진군하여 용인에 주둔한 적을 먼저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권율(權慄)이 이광에게 말하기를,
“전로(前路)의 적진(賊陣)은 험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쳐다보며 공격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주공(主公)이 경내의 모든 병사를 징발해 들어와 구원하려고 하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는데 되도록이면 신중히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 한다. 곧장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을 막는 것이 마땅하니, 그렇게 되면 서로(西路)가 자연히 견고해지고 식량을 운반하는 길도 트이게 될 것이니 사기를 축적하여 틈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먼저 수원(水原)의 독산성(禿山城)에 웅거하여 적을 유인하여 싸운 뒤 승리할 때를 틈타 진격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그런데 이광은 당시 지체한다는 비방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진군을 재촉하며 말하기를,
“곧바로 양천(陽川)의 북포(北浦)에 도착한 뒤 진퇴를 의논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세 장수는 실제로 권율의 계책을 따르려 하였으므로 연명(聯名)하여 장계하기를,
“신들이 함께 군사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지금 수원 지역에 이르러 양천의 북포를 경유해서 군사를 도우려 하나 적이 경성에 있으니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듯싶습니다. 조정에서 속히 지휘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선천(宣川)에서 장계를 보았는데, 조신(朝臣)들은 이미 그들이 진취(進取)하는데, 용맹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이광이 선봉장 이지시(李之詩)로 하여금 곽영(郭嶸)을 도와 접전(接戰)하게 하고 백광언(白光彦)과 군사 각 1천 명을 합해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게 하였다. 권율이 또 경계하기를,
“신중하게 하여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우리 대군(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려 싸우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광언은 적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도전하였는데 적은 거짓으로 군사를 거두고 싸우지 않다가 아군의 주의가 해이해졌을 때 불의에 적병이 몰래 숲속에서 흩어져 기어나와 일시에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니 광언과 지시가 먼저 탄환에 맞아 죽었다. 두 장수는 모두 용력(勇力)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그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
군사가 처음 진격할 때에 경성에서 왜장 수십 대가 계속해서 성을 빠져 나갔는데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었다. 아군이 그 소식을 듣고는 우리 군사를 피하여 가는 줄로만 의심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왜장이 광주(廣州)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키고 아군이 강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따라 습격하여 모두 섬멸할 계획이었다고 하였다. 이광 등이 패배하자 상하가 실망하여 모두들 이광이 군율을 실수한 것을 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13장 A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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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반격을 위해 삼도에서 모인 5만 이상의 병력이 그대로 무너진 용인전투.
개전 이래 최대 병력이 동원된 전투였고 이 전투로 상실된 물자 역시 막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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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고작 수개월 사이에 인적, 물적 자원을 그대로 상실해 버리고 이후 전쟁 내내 물량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후로도 갑옷, 투구는 계속 생산하였지만 전란이 길어지면서 생산량이 소비량을 앞지르지 못하였습니다.
이건 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해결되지 못하여서 군사력 회복이 이후 굉장한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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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80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7월 20일(경오) 6번째기사
비변사가 투구와 갑옷의 제작에 대해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이후로 여러 종류의 군기(軍器)들이 남김없이 유실되었고, 이리저리 수습하여 겨우 모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은 활뿐입니다. 몇 년 전부터 조정이 화기(火器)에 각별히 뜻을 두고 갖은 방법으로 제조하였으나 그 수량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투구와 갑옷에 있어서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힘이 미칠 겨를이 없어, 안으로는 무고(武庫)와 밖으로는 열읍(列邑)에 이르기까지 비축한 수량이 매우 적으니 혹시라도 갑작스런 변고가 있을 경우 적을 방어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신들이 지금 우려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 일에 미치니 매우 지당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현재 물력이 탕진되어 대포를 제조할 때에 당연히 들어야 될 물자도 계속 조달하기 어려워 걱정스러우니, 갑옷과 투구도 동시에 제조하기는 사세상 안 될 것으로 여깁니다. 전일 본사가 중국의 양식에 따라 갑옷과 투구를 특별히 제작하여 각도 감사·병사에게 나누어 보내고 그 양식에 따라 제조하여 급박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자는 일로 재가를 받아 해당 도에 지시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지금 그 지시에 따라 시행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적당한 수량을 마련하여 각도의 감사·병사·수사에게 나누어 보내, 시한을 정하여 완전하게 제조하고 최대한 견고하게 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변고가 생긴 지역으로 이송하여 쓰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40장 B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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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해군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군의 생산 우선순위가 각종 화포로 바뀌었기 때문에 물자 부족이 지속되면서
자연히 갑옷이 생산순위에서 밀려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선군은 전쟁 발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갑옷을 생산하여 병사들에게 보급하였으나
물자와 생산력이 부족했고, 생산우선순위도 타 무기에 밀려 충분한 수량이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러니 여전히 많은 병사들은 갑옷이 없은 상태에서 싸웠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근데...






죄다 포졸은 너무합니다. 방송사 여러분. 그래도 나름 열심히 보급했어요.
그리고 갑옷을 포기하면서까지 화포를 만들었는데 삼지창 들고 닥돌은 너무한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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