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니가 농사를 짓던 읍내로 이사나가기 전의 이야기야. 그때 우리집은 농사를 짓고 있었어. 좀 부끄러워서 남에게 말 못할 이야기지만.
어떤이들은 예상 했듯이 우리 부모님은 아주 이른 나이에 연애를 해서 결혼식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나를 낳고, 그냥 살림을 들이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할머니 집에 얹혀 살게 되었고 능력이 없다 보니 할머니가 짓던 농사를 거둘수 밖에 없었겠지 그 시절, 유치원 다닐 무렵엔 아빠손 잡고 읍내에 가면 "삼촌이라고 불러" 엄마손 잡고 읍내에 가면 "이모라고 불러" 라고 시킬 정도로 나에게 엄마 아빠란 사람은 너무나 젊었단 말야. 그러다 보니, 동네에 아빠 친구들, 그러니까 동네 삼촌들은 죄다 장가 들기 전이었기에 내 또래 친구가 몇 없었지.
예전에 이야기 한적 있을거야 아마. 한 학급 친구가 겨우 11명이었다고. 그런데 그 11명도 어떻게 모인거냐면 저~~~~아래 애들 몇 요~~~~아래 애들 몇 저기 너머너머 애들 몇 이렇게 모여서 채운 숫자인지라. 집 근처엔 허허 벌판, 첩첩산중 뿐.
친구는 무슨 친구. 허수아비가 내 친구고 막 그랬어. 얼마나 심심했겠어. 그땐 장난감도 없었거든. 마리인형? 곰돌이? 췟 ㅋㅋㅋㅋㅋㅋ 그딴게 다 무어야.
진정한 촌년의 장난감은 옥수수 인형 아니겠어? 옥수수 인형 아는 사람 손! 생 옥수수 머리 치렁치렁 한거 따다가 머리 빗질 하면서 놀아야 진짜 촌년인거지. 암튼. 그렇게 하루하루가 심심하던 나에게도 베스트 프렌드라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었다고.
우리집에서 한.. 내 걸음으로 15분? 그정도 걸으면 나오는 큰 동네가 하나 있었거든. 그 동네엔 진짜 고래등같은 큰 한옥이 한채 있었어.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큰집이라고 불렀지. 나중에 아빠에게 들은 이야긴데 대대로 우리 마을 대지주? 같은 가문이 살던 양반집이라는거야. 암튼. 그 큰한옥집이 너무 낡고 허그러져서 대공사를 시작했데.
요즘에는 집 공사한다고 하면 건축사무소에서 팀을 꾸려서 막 나오고 그러잖아? 그런데 그때는 음.. 뭐랄까 이름난 목수? 목장? 같은 사람을 부르면 그 사람이 일꾼들을 데리고 우르르 와서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고.
뭐, 지금도 다큐멘터리 보니까 한옥 공사를 할때는 비슷하게 팀이 꾸려지긴 하더만. 그런데 지금이랑 그때랑 다른게 뭐냐면. 그 시절엔 잡일을 하는 (시다라고 하지) 이제 막 초딩 티를 벗을락 말락하는 까까머리 소년들이 잡부로 일을 거들곤 했어.
그때가 80년대 후반. 나라전체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때가 아마 의무교육이 초딩까지였나? 그랬을껄. 그래서 집안형편 때문에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든 소년 소녀 가장들이 많았다고.
동네에 가장 큰 집이 공사를 한다니까 동네 코 찔찔이들은 너나할거 없이 한번쯤은 그곳으로 몰려가서 멀리서 목재들이 들고 나는것을 신기하게 바라 보았지. 특히나 좁은 동네에 외지인의 등장은 언제나 즐거운 요깃거리였거든. 그런데 그런 구경도 하루 이틀이면 재미가 없는지라.
그렇게 기억에 잊혀져 갔지. 큰집 공사가 끝날 무렵이었을꺼야. 대청마루에 벌러덩 누워서 배나 득득 긁고 있었는데 말야 논물 보러 나간 아빠를 따라서 누군가 함께 오더라고. 누군가 봤더니 바로, 큰집 공사할때 분주히 움직이던 시다가 아니겠어.
그때 겨우 초등학교 입학적이었는데 내가 시다라는 개념을 어찌 알았겠어. 지금에야 하는 이야기지만 그냥, 그때 거기서 본 오빤거지. 왜, 어릴땐 낯선 사람 집에 오면 좋잖아 괜히.
그래서 강아지 새끼마냥 그 오빠의 뒤를 졸졸 쫓으며 와 신난다 신난다 까불었지. 아직도 기억이 나. 엄마가 "여보, 쟨 누구에요?" 했더니 아빠가 "응. 한참 바쁘니까 일손좀 도우려고 사람좀 사왔다" 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한참 바쁜 농번기인지라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 큰집 공사가 끝나고 인부들이 놀게되자 아빠는 가장 만만한 그 까까머리 소년을 일당 얼마씩 주기로 하고 데려온거였어. 그날부터 나는 정말 하루하루가 꿀이었다.
늘 혼자 땅에 흙파내면서 놀았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었거든. 일을 마치고 오빠가 돌아오면 내 유치원 숙제도 도와주고 대숲에 가서 대나무 베어와서 달력 종이 붙여가지고 연도 만들어주고 또.. 아, 들꽃 여러개 꺾어다가 화관도 만들어 주고. 내가 정말, 어렸을땐 심각하게 못생겨가지고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 본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랬는가 친절하고 곰살맞게 대하는 오빠가 정말로 정말로 좋았어.
그런데 있잖아. 아무리 어린 나이래도 사람이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 같은가봐. 나는 그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서 있지 그 어린 나이에도 오빠에게 많은 질문을 했었어.
오빤 어디살아?
오빤 이름이 뭐야?
오빤 왜 손가락이 두개 잘렸어?
오빤 왜 운동화 꼬불쳐 신어? 등등.
오빠 무릎에 앉아서 저렇게 막 떠들었던 기억은 있는데 내가 너무 늙어서인지 오빠 목소리는 솔직히 기억이 안난다. 이름은 초등학생때까진 기억했던거 같은데 그 뒤로 까먹었어.
내가 언젠가 저 오빠에 대해서 불현듯 엄마에게 물어봤었는데 그때 엄마는 알고 계셨거든. 그런데 엄마도 나중엔 잊으셨더라고. 암튼. 다른건 거의 다 잊었는데 딱 하나 기억에 남은게 있어. 오빠 손가락이 있잖아 오느 손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검지랑 엄지 손이 잘려있었거든.
그땐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절단된 손가락을 보고도 모른척 해줄수 있는 매너는 없었나봐. 그래서 막 물어봤거든. "이 손은 왜 잘렸어? 왜 그래?" 그랬더니 공장에서 일하다가 잘렸다고 말을 해주더라고. 그때 나는 정말 엄청나게 천진난만하게 "으.. 징그러" 했다고.
참. 왜그랬는지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순진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어. 오히려 집에 있는 동생들 생각이 난다고 머리도 다시 땋아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엄청 예뻐해 줬는데. 우리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일어나니까 정말 나는 오빠가 생긴것처럼 든든했거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갔어. 아마 그 오빠가 한달이 넘게 집에 머물렀던것 같아. 그 오빠가 집에 있음으로서 가장 좋았던건 비오는 날 때문이기도 했거든. 전에는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맞고 가는게 보통이었는데 꼭 비가 오는 날엔 오빠가 우산을 들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모퉁이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사람이 사람을 마중나오는게 얼마나 기쁜일인지 나는 그때 깨달았지. 너무너무 행복했거든. 아마 3번인가 마중을 나왔던 걸로 기억해. 그런데 뭐든지 행복한 때는 끝이 있기 마련이잖아. 바쁜 여름 농번기가 끝나가자 오빠는 내게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며칠을 때를 쓰며 울었지.
엄마 아빠는 그러다 곧 말겠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문득 문득 그 오빠가 참 많이 궁금했단 말야. 하지만 그때당시 거의 떠돌이 생활을 하다싶이 하던 그 오빠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지. 그런데 있잖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게 그런 일일까 싶은게. 너무너무 생각이 나고 그리워 해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린나이에도 있잖아 꼭 비가 내리면 창밖으로 눈이 돌아가더란 말야.
내가 쓸데없이 조숙해서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가을비가 내리고 그 다음 겨울비가 내리면 나는 어김없이 창밖의 학교 모퉁이에 시선이 닿더란 말야. 그럼. 꼭 거짓말처럼 운동장 끝 열린 교문 앞에 우산을 들고 어깨가 반쯤 기울어진채 청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오빠가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그럼 나는 너무나 기뻐서 말도 못할만큼 기뻐서 실내화를 신은채로 우산이고 뭐고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으로 신나게 달려갔단 말야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달려가보면 항상 그곳엔 아무도 없곤 했지.
그럼 어린 나는 그게 포기가 안되서 교문 모퉁이 뒷길도 가보고 비만 내립다 쏟아붓는 운동장도 한번 뒤돌아보고 나서야 풀이 꺾여서 그길로 집으로 울고 가버려서 엄마한테 혼이 나고 그랬어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내가 오빠를 봤다는 말을 하면 할머니고 엄마고 아빠고 간에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제발 그 쓸데없는 말좀 하지 말라고 나를 윽박질렀단 말야 그래서 그 후로 당분간은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어.
자의로 가지 않은게 아니라 엄마아빠가 못가게 했다는 말이 맞겠지. 그때는 몰랐는데 말야. 나중엔가 대목수 아저씨를 통해서 엄마가 그 오빠의 안부를 물어봤다더라고. 우리집 애가 너무너무 궁금해 한다고. 언제한번 집에 들르라 하면 안되겠냐고.
그랬더니 그 아이 지붕에서 떨어져서 허리가 부러져서 보름인가 앓다가 병원에서 객사했다고. 그래서 엄마는 어린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줄수가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자꾸 비가 오는 날이면 오빠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온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것이고.
하필 집안에 우리 고모마저 신이 씌였니 어쨌니 하는 상황인지라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냐면
참. 내가 잊어버릴만하면 엄마한테 "엄마 그런데 있잔아. 나 어렸을때 집에서 일해주던 그 오빠 있잖아.. 진짜 보고싶다. 오빠는 지금은 몇살이나 먹었을래나.."
이렇게 운을 띄웠거든 내가 고등학생때나 되었을라나 제법 어른티가 나자 엄마가 소리를 빽 지르면서 이제 제발좀 그만하라고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이랬었다고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죽은 사람 이야기 자주 하면 좋은거 아니니 너도 이제 그만 그렇게 알고 그만해라고... 물론 내가 걱정이 되서 그랬겠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아직도 엄마가 조금 원망스럽다.
차라리 어린 나에게 죽음이란걸 인지 시켜주고 오빠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오빠에게 인사를 할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