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레 들레 민들레야 상봉동의 민들레야
필 적에는 곱더니만 질 적에는 까맣구나
피우지 못한 노오란 꿈을 안고 다시 태어나거들랑
상봉동에 피지 말고 저 들녘에 피워 보렴
검은 민들레 - 안혜경
나 박길래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정읍의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16살 되던 해에 혼자 힘으로 살아 보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에서부터 직공, 행상에 이르기까지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옷가게를 차렸고,
장사도 제법 잘 됐다.
결혼할 나이는 훨씬 지났지만 그보다도 살 집을 갖고 싶었다.
시내를 좀 벗어나 여기 저기 알아 보니
가지고 있는 돈 액수에 맞는 아담한 집이 있었다.
그 곳은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에 있는 집이었다.
이제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이사한 날 밤 나는 혼자 많이도 울었다.
그러나 그 곳이 죽음의 구렁텅이일 줄이야..
폐암인가요?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진폐증입니다.
진폐증...요?
어디 공기 좋은 데 가셔서 요양을 하십시오.
진폐증은 불치병입니다. 약도 없어요.
이것이 아주머니 폐의 한 부분을 떼어낸 것입니다.
탄가루가 폐에 새까맣게 눌어붙어 있어요. 폐가 마치 탄덩어리 같아요.
거 참... 이상하군요. 탄광촌에서 산 적도 없고
연탄공장 노동자도 아닌데, 평범한 여자가 이런 끔찍한 병에 걸리다니..
혹시... 사는 동네에 연탄공장이 있습니까?
.....있어요. 아주 큰 연탄공장이에요.
대한민국의 첫 공해병 환자.
내 폐를 살려내! 내 폐를...
울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전봇대 밑에 핀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까맣게 변해 버린 민들레였다.
그 동네를 도망쳐 나오다시피 했지만 괴로움은 더 심해져 간다.
폐종양, 위염 같은 합병증이 잇달았고 눈이 아파 거의 감고 지내야 했다.
눈을 감아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억울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아파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번듯한 내 집과 두 개의 옷가게까지 갖고 있던 내게
남은 수입은 쇼핑백 접는 가내부업, 하루 2~3천원.
힘들고 숨이 차오르고 기침이 심해져 그나마 그 일도 못 할 정도였다.
약값은 고사하고 생활비조차도 바닥이 났다.
찢어진 분진망은 그대로 있었고 엄청난 양의 연탄이 덮개도 씌워지지 않은 채 트럭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서울 시내만 하더라도 저런 연탄공장이 17개나 된다고 했다.
서울 시내 17개 연탄공장을 서울 외곽으로 이전시키겠다는 약속은 받아 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저 말고도 상봉동에는 14명이나 되는 진폐증 환자가 이미 생겼고, 또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도..
나를 치료한 적 있던 병원 원장님까지 진폐증에 걸렸다고요.
마침내 서울지방법원은 1989년 박씨의 진폐증 원인이 연탄공장에 있다며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법정에서 인정된 한국 최초의 공해병 사례이다.
그녀는 받은 보상금으로 병원비를 갚았다.
그래도 20만원의 빛이 남았다.
말년에 가서는 진폐증 합병증으로 허리뼈가 무너져 보조대를 찼고
호흡기를 너무 오래 착용해 입이 다 해져 물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박씨는 결국 2000년 4월 29일 숨졌다. 그의 나이 57살 때였다.
진폐증이 작업장 밖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 사례는 연탄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에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았다.
실제 주인공
故 박길래 (1943~2000)
이 사건 이후에도 2008년, 2010년에 각각 시멘트 공장 근처 주민들에게서 진폐증이 발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