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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63.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게시물ID : history_201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3
조회수 : 8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3/24 02:26:35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봉건의 황제국에서 그 지위가 왕이 되었으면 그야말로 황제 말고는 위에 사람이 없다 할 정도 였으니

그 부귀란 말로 다 할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그 권세 또한 하늘 높았다.

 

제국의 번병으로 왕이 되었으면 조실을 위해 충성을 다 해야 하거늘

번왕들의 계속된 모반은 어찌된 이유인가?

그것은 오히려 그 지위와 부귀가 너무도 높았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국량에 넘치는 부귀를 누리다 보니 자연 교만해지고

교만하면 남의 말을 듣지 않게 되니 이는 만화의 근원이라 하겠다.

 

고조의 여덕으로 지극히 귀한 몸이 되었으면서도 스스로 불행의 씨앗을 품었으니

그 결과는 거의 참혹하게 끝난것을 볼수있다.

 

이들의 예를 잘 살펴 분수를 지킨다면 크게 몸을 망치는 일은 피할수 있을터이니

무릇 고귀하게 된 자들은 반드시 이를 잘 살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회남왕 경포가 반역 했을때 고조의 아들 유장이 나라를 평정하고

양자강과 회수 남쪽을 진정 시켰다.

또 유장의 아들 유안은 초의 백성들을 진압해 이곳을 차지 했다.

 

이제부터 회남과 형산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이교고불문 오화지차(吾以驕故不聞 吾過至此)

 

회남의 여왕 유장(劉長)은 고조의 막내아들 이었다.

유장의 어머니는 조왕 장오의 미인 이었다.

 

고조8년.

유방이 조나라의 동원을 통과할때 장오가 유방에게 자신의 첩을 바쳤다.

그때 그녀는 유방의 총애를 받아 임신 하였다.

 

유방이 떠난후 조왕장오는 감히 그녀를 자신의 궁에 두지 못하고

별궁을 지어 조용히 거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조나라 관고등이 백인에서 모반 했다가 발각되자

한에서는 조왕장오는 물론 장오의 모친.형제.첩들까지 모조리 체포해 하내에다 가두었다.

이때 유장의 모친도 옥에 갇혔는데 그녀는 옥리를 불러 이렇게 탄원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몸입니다.

이몸을 함부로 다루지 마십시오."

 

관리가 놀라 고조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그러나 고조는 장오에게 몹시 노해 있었으므로 그녀의 말을 믿지도 않았고

또한 처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급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녀의 남동생 조겸이 벽양후 심이기를 통해 여후에게 탄원 했으나

오히려 여후는 더욱 질투하여 굳이 고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심이기 역시 이런 일로 애써 탄원 하려 하지 않았다.

 

얼마후 그녀는 유장을 낳은뒤 원한을 품고 자살해 버렸다.

관리가 유장을 받들어 들고 고조에게로 갔다.

"무어라?

그런 일이 있었다고?"

고조는 후회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고조는 유장을 여후에게 주어 양육을 명하고 유장의 모친을 진정에다 묻어 주었다.

 

고조11년.

10월에 회남왕 경포가 모반 했다.

고조는 어린 아들 유장을 회남왕으로 세운뒤 경포가 통치하던 구강.여강.형산.예장 등 4군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몸소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경포를 격멸 했다.

 

일찌기 모친을 잃은 여왕 유장은 언제나 여후에게 의지했다.

그래서 효혜제와 여후 모두에게 총애를 받았으므로 그들의 시대에는 해를 입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친의 죽음의 비밀을 잘 알고있는 유장으로서는 원한이 없을수가 없었다.

특히 그는 심이기를 원망 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결코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효문제가 즉위했다.

회남왕 유장은 자신이 황제와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고조의 아들로는 효문제와 자신밖에 살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만해진 유장은 자주 법을 어겼다.

효문제는 그가 친동생 이라는 이유로 그를 항상 너그럽게 용서했다.

 

효문제3년.

여왕 유장이 입조했다.

그는 방자하고 오만불손했다.

황제를 따라 원유로 들어가 사냥할때 그는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탔을뿐 아니라

황제를 큰형 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유장은 힘이 장사였다.

그의 힘은 정을 능히 들어올릴수가 있었다.

 

그는 어느날 벽양후 심이기를 찾아가 면회를 신청했다.

심이기로서는 나와서 만나지 않을수가 없었다.

유장은 심이기를 보는순간 소매안에 감추었던 철퇴를 꺼내어 심이기를 내리쳤다.

그는 즉사했다.

종자 위경에게 명했다.

"이자의 목을 베어라."

그런후 유장은 즉시 궁궐로 달려가 웃옷을 벗은후 사죄했다.

"소신의 어미는 조왕의 사건에 연루되어 아무 죄없이 죽었습니다.

그때 벽양후 심이기는 여후를 설득할만한 힘이 충분 했는데도 힘을 다해 간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조왕 여의가 죽었을때 심이기는 조왕이 무죄임을 잘 알면서도 역시 간쟁하지 않았습니다.

여후는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함으로써 유씨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심이기는 힘써 간쟁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죽어야할 세가지 이유 입니다.

이에 소신은 삼가 천하를위해 적신 벽양후를 주살함으로써 어미의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삼가 궁궐 밑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바입니다."

 

효문제는 여왕 유장의 말을 듣고 모친을 위해 한 일이라 측은하게 여겨

살인죄로 다스리지 않고 그를 용서했다.

그때 박태후와 황태자 및 여러 대신들까지도 모두 유장의 행위를 못마땅해 했지만

감히 입밖에 내어 비판하지는 못했다.

 

유장이 이런 사건을 일으킨후 귀국 해서는 더욱 오만방자 해졌다.

한나라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출입할때는 황제만이 할수있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시켰으며

자신의 명령을 제 라 하고 자신이 법령을 제정하는등 황제와 똑같이 행세했다.

 

효문제6년.

단 등 70여명이 극포후 시무의 태자인 기 와 공모하여 큰 수레 40대를 가지고 곡구에서 모반했다.

물론 유장도 연계된 일이었다.

그들은 민월과 흉노에 사자를 보내 자신들을 돕게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발각되었고

황제는 할수없이 그들의 죄를 다스리고 회남왕 유장을 소환했다.

유장이 장안에 이르렀을때쯤 법을 집행하는 대신들이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ㅡ승상 신 장창.전객 신 풍경.어사대부 대리 겸 종정 신 일.정위 신 하.비도적중위 신 복.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 드립니다.ㅡ

(이하생략.)

 

이 상주문에는 그동안에 유장이 그동안 신하로서 한 월권행위 및

제 멋대로 무고한 백성에게 죄를 주고 또한 죄인을 두둔하여 숨겨준 일등 그가 지은 죄들을 열거하고

유장을 기시에 처할것을 청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효문제는 상주문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영을 내렸다.

"짐은 차마 유장에게 법을 적용할수 없으니

열후들과 2천석 이상의 봉후와 대신들이 다시 상의하도록 하라."

 

장창등이 대신들과 다시 의논한뒤 상주문을 올렸다.

대신들은 이번에도 역시 유장이 모반한것을 용서할수 없음을 아뢰고

의법처단 할것을 상주했다.

 

효문제가 상주문을 읽고 다시 영을 내렸다.

"짐은 차마 회남왕에게 법에따른 죄를 적용할수 없으니

그의 죄는 용서하되 왕위는 폐지하도록 한다."

 

그런데 장창등 대신들의 상주는 집요했다.

대신들은 다시 상주문을 올려 황제가 차마 유장을 죽일수 없다면 그를 촉군으로 귀양보내라고 청원했다.

 

효문제는 하는수 없이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이고

유장에게 매일 고기 다섯근과 술 두말을 지급하게 하고

또 종전의 미인.재인등 유장에게 총애를 받던 여인 10여명을 함께 데려가서 살게하고는

당시 모반에 가담했던 자들은 모두 도륙하도록 명 하였다.

 

이렇게 되어 회남왕은 포장마차에 태워 귀양길에 올랐는데

현에서 현으로 차례차례 호송 되었다.

 

이때 원앙이 황제에게 충고했다.

"폐하께서는 평소부터 회남왕을 교만해 지도록 버려두고

엄격한 스승이나 재상을 파견하지 않으셨던 까닭으로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회남왕은 폐하께서도 잘 알다시피 성격이 괄괄하고 스스로 자신의 강한 성정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그러한 그를 갑자기 기를 꺾어 놓으면 회남왕은 크게 낙심하여 귀양길 도중에 병들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면 폐하께서는 아우를 죽였다는 평을 듣게 될것이니 이는 좋은 계책이라 할수 없습니다."

 

황제는 원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번에 회남왕의 기를 꺾어 놓아야 겠다 생각하고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원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황제는 잠깐동안 이라도 회남왕을 고생시켜 스스로 반성할 시간을 주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회남왕을 전송하는 각 현에서는 아무도 감히 함거의 봉한것을 열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다음 역으로 수레를 급히 전송할 뿐이었다.

그렇게 되니 유장은 한번도 함거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갇혀있을수밖에 없었다.

회남왕은 수레를 따르는 시종을 돌아보고 탄식했다.

"누가 나를보고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냐.

이런 처지를 당하니 속절없을 뿐이로다.

나는 교만했던 탓으로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이 어찌 이리도 구차하게 연명하여 살수 있단 말이냐?"

 

결국 회남왕은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고 말았다.

수레가 옹 땅에 이르렀을때야 옹현의 현령이 함거의 봉인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회남왕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유장의 죽음을 들은 황제는 통곡하면서 원앙에게 말했다.

"짐이 귀공의 충고를 예사로 들었다가 이지경이 되었구려."

원앙은 다시 황제를 달랬다.

"폐하의 실수만은 아닙니다.

부디 마음을 넉넉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천하에 사죄하는일만 남았습니다."

 

황제는 승상과 어사대부 등에게 영을 내려 각 현에서 회남왕을 전송할때

봉함을 열어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문안을 드리지 않은자들을 조사하게 했다.

그런후 죄가 있는 자들은 모두 참형에 처했다.

 

회남왕 유장을 열후의 예우로써 옹현에 매장했다.

묘지기에게 30호를 주어 관리하도록 했다.

 

효문제8년.

유장에 대해 가엾게 생각한 황제는 유장의 아들들을 모두 열후로 봉했다.

네명의 아들들은 모두 7~8세 정도였는데 그래도 황제는

유안을 부릉후.유발을 안양후.유사를 양주후.유량을 동성후 로 봉했다.

 

효문제13년에 민간에서 회남의 여왕에 대해 이런 내용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자의 베라도 꿰매어 입을수 있고

한말의 곡식도 찧어 나눠먹을수 있는데

형과 아우는 서로 용납할줄을 모르네.>

 

황제는 그 노래를 듣고 탄식했다.

"천하의 사람들은 짐이 그깟 회남땅을 탐내어 동생을 죽였다고 하겠구나."

 

황제는 죽은 유장을 추존하여 여왕 이라 시호를 내리고 제후왕의 규정대로 동산을 만들어 주었다.

효문제 16년이 되어 황제는 회남땅을 셋으로 나누어 유안을 회남왕으로,

유발을 형산왕으로,유사를 여강왕으로 봉했다.

유량은 일찍 죽은데다가 후사가 없었으므로 제외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효경제 3년.

 

오초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나라가 사자를 회남으로 보내 회남왕 유안에게 함께 군대를 일으키자고 권유했다.

유안이 이에 응하려 하자 회남의 재상이 말했다.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에 내응할 작정이시라면 저를 장군으로 기용해 주십시오."

 

회남왕 유안은 군사를 재상에게 맡겼다.

그런데 회남의 재상은 병권을 장악하자마자 성을 고수하고 왕명을 듣지 않고 오히려 한나라를 도왔다.

그랬더니 한나라에서도 이를 가상히 여겨 곡성후 충첩을 장군으로 삼아

회남을 구하도록 했다.

그래서 회남은 무사할수가 있었다.

 

오나라는 여강으로도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여강왕 유사는 반란에 불응하고 월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협조를 요청했다.

 

오나라는 형산으로도 사자를 보냈다.

형산왕 유발은 아예 두마음을 품지 않고 굳건히 봉토를 지켰다.

 

효경제 4년 오.초의 반란군이 평정되고 형산왕이 입조했다.

황제는 형산왕이 매우 곧고 믿음직 하다고 노고를 위로한뒤에

형산은 지대가 습하여 좋지 않다고 하여 제북으로 옮겨 제북왕으로 삼았다.

제북왕이 된 유발이 죽었을때는 그를 애도하여 정왕 이라는 시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여강왕 유사는 월나라와 접경해 자주 교제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신경쓰여

형산으로 옮기게 하여 형산왕으로 삼아 양자강 북쪽을 다스리게 했다.

회남왕 유안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유안의 사람됨은 사냥개나 말을 달려 사냥 하기보다는 독서와 탄금을 좋아했다

그리고 음덕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 영예로운 명성을 천하에 떨치려 했다.

그러면서도 부친 여왕의 죽음을 원망하여 반역의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여 기회를 보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건원2년.

회남왕 유안이 입조했다.

그는 평소부터 무안후 전분과 친밀한 사이였는데 그때 전분은 태위로 있었다.

전분이 유안을 패상까지 마중나가 맞으며 엉뚱한 귀띔을 해 주었다.

폐하께는 황태자가 아니계시다는것을 잘 아시지요?

대왕께서는 고조의 친 손자인데다가 또한 인의를 행하여 천하에 명망이 높으십니다.

만일 어느 날 갑자기 황상께서 붕어라도 하신다면

대왕 대신 누가 마땅히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부디 자중자애 하십시오."

 

유안은 매우 기뻐하며 전분에게 황금과 재물을 후하게 선물했다.

그후 유안은 빈객들을 가까이 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가만히 반역을 기도했다.

 

건원6년 혜성이 나타났다.

유안은 혼자 속마음으로만 그것을 괴이쩍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사람이 회남왕에게 말했다.

"옛날 오.초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때도 혜성이 나타났는데

그 길이가 몇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유혈이 천리에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혜성은 하늘을 덮었으니 이는 천하에 큰 병란이 일어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유안은 속으로 곰곰히 생각했다.

ㅡ황제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태자가 없는 상황에 틀림없이 제후들이 일어나 서로 다툴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천하의 패권을 잡으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할것이다.ㅡ

 

그래서 유안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장만하고 금전을 저축하며

변설이 뛰어난 유세객들과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재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었더니 그들은 더욱 요망한 말로 아첨하며 모반을 부추겼다.

 

유안에게는 능 이라는 딸이 있었다.

지혜로운데다가 달변이었다.

그래서 유안은 딸을 장안에 상주시키면서 정탐을 맡겼다.

그러자 능은 엄청난 자금을 풀어 황제의 근신들과 친해졌다.

 

원삭3년.

황제는 회남왕이 이제는 노쇠 하였으므로 입조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면서

기댈상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이것은 엄청난 특전 이었다.

 

회남왕의 왕후 이름은 도 였는데 왕은 왕후를 매우 총애했다.

도 에게서 난 아들이 바로 태자 천 이었다.

천은 왕황태후의 외손인 수성군의 딸을 얻어 태자비로 삼았다.

그러므로 태자비는 한실과 가까웠다.

 

유안은 모반을 위해 무기를 제조하는등 제반모의를 진행하고있었기 때문에

혹시 태자비를 통해 비밀이 누설되지 않을까 몹시 걱정했다.

 

회남왕 유안과 태자 유천은 단둘이 모의했다.

태자 유천이 태자비를 사랑하지 않는척 하여 석달동안이나 잠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이에 회남왕 유안은 짐짓 화를 내며 태자를 크게 나무라고 태자비와 한 방에 가두어 버렸다.

석달동안이나 한 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태자는 태자비를 끝내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난 태자비는 태자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일은 계획대로 되어갔다.

 

회남왕은 황제에게 상서문으로 사죄하고 태자비를 한실로 돌려보냈다.

이제부터는 회남왕 유안의 맘대로 행동할수 있게 되었다.

왕후 도 와 태자 천 과 딸 능 은 왕의 비호를 받으며 국권을 좌우했으며

백성들의 전지와 주택을 맘대로 침탈하는등의 횡포를 부렸다.

이를 불평하는 백성들은 닥치는대로 옥에 가두었다.

 

원삭5년.

왕태자 유천은 검술에 능했다.

천하에 자신과 견줄자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때 낭중관 뇌피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다.

 

태자는 뇌피를 불러 그와 검술을 겨루게 되었다.

뇌피의 검술은 절묘했지만 상대가 왕태자 인지라 짐짓 두어번이나 져 주었다.

그러나 그러다가 실수하여 세번째에는 왕태자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유천은 몹시 노했고 뇌피는 한없이 두려웠다.

 

그당시의 법에는 만일 종군하기를 원하는자가 있으면

무조건 장안으로 보내 흉노정벌군에 종사하도록 했으므로 뇌피는 이를 기화로 종군을 자원했다.

그러나 유천은 왕에게 뇌피를 중상모략하여 자원입대를 내치게 했을뿐 아니라

벼슬까지 떼어 다른사람들이 뇌피를 본받지 못하게 하였다.

할수없이 뇌피는 장안으로 몰래 도망쳐 들어갔다.

거기서 자신의 일을 관청에 상서했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정위와 하남의 관리에게 그 사건을 심리하도록 명했다.

 

하남의 관리가 조사해보니 태자 유천에게 혐의가 있었다.

그래서 유천을 체포하려 했지만 회남왕이 태자를 내 놓을리가 없었다.

유안은 차라리 모반을 일으키는것이 낫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차일피일하며 열흘 이상이 흘러갔다.

 

그러던중에 황실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체포하지는 말고 심문만 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이때 회남의 재상은 수춘의 승이 태자를 비호하여 체포하지 않는것을 보고

크게 화를내며 수춘의 승을 탄핵하려 했다.

 

회남왕이 재상에게 탄핵하지 말도록 청했지만 재상은 회남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

회남왕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오히려 재상을 참소했다.

 

황제는 이 사건이 매우 복잡하다는것을 알게됐다.

그래서 정위에게 명하여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규명하도록 지시했다.

정위가 깊이 살펴보니 역시 회남왕에게도 혐의가 있었다.

 

한편 회남왕은 조정에 사람을 풀어 공경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랬더니 대신들의 대부분이 회남왕을 체포할것을 주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회남왕이 몹시 난감해 하자 태자유천이 꾀를 하나 냈다.

"이쯤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죽게 생겼으니 모반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사자가 와서 대왕을 체포하려 하거든

위사를 시켜 곁에 서있다가 사자를 찔러 죽이게 하십시오.

저는 따로 사람을 데리고 있다가 회남의 중위를 찌르겠습니다.

그런후에 거병해도 늦지 않습니다."

회남왕은 태자 천의 계책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한나라에서 사자가 왔다.

회남왕은 태자의 계책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나라 사자는 온화한 안색으로 다른건 묻지않고

오직 뇌피를 내치게 된 사정만을 물었다.

사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여긴 회남왕은 모의를 중지하고 자객을 동원하지 않았다.

사자는 탈 없이 한나라로 귀환하여 황제에게 상주했다.

 

공경대신들은 뇌피의 일 만으로도 회남왕을 주살해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그렇다면 토지라도 몰수해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역시 황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서 황제와 대신들은 2개의 현 만을 삭감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조정에서는 다시 회남으로 사자를 보냈다.

회남왕은 이번에야 말로 자신을 체포하려 오는줄 알고 바짝 긴장했다.

여차하면 전날의 계획대로 사자를 찔러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사자는 도착하자 마자

ㅡ왕의 죄는 사면 되었고 2개의 현만 삭감되었을 뿐이라ㅡ며 축하를 했으므로

회남왕은 또한번 계획을 중지할수밖에 없었다.

 

회남왕은 내심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한편으로는 2개의 현을 삭감당한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래서 속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반란을 계획했다.

그런 와중에 조정에서 오는 사자마다 어김없이 요망한 말로 회남왕을 부추겼다.

"폐하께서 태자가 없으시니 한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회남왕은 이런말을 들으면 기뻐하며 후한 선물을 주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루는 회남왕이 동궁에 앉아 계책을 의논하려고 장군 오피를 불렀다.

"장군은 당 위로 올라오라."

오피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황제나 할수있는 언행이었다.

 

오피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폐하께서는 대왕을 관대하게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어찌 나라 망칠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들은바로는 오자서가 오왕을 간했는데 오왕이 듣지 않자

ㅡ신의 눈에는 지금 폐허가 된 고소대에서 고라니와 사슴이 노니는것이 보입니다.ㅡ 라고 했습니다.

이제 저도 대왕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의 눈에는 지금 궁중안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이슬이 옷깃을 적시는것이 보입니다."

 

이 말을 들은 회남왕은 크게 분노하여 오피를 묶어 옥에 가두었다.

후에 회남왕이 다시 오피를 불러 물었다.

"장군은 아직도 과인에게 찬동하지 않겠는가?"

"찬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대왕을 위하여 계책을 세울 뿐입니다.

저로서는 굳이 오자서처럼 주살됨을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원컨대 대왕께서는 오왕처럼 간언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오피는 옛 고사와 역대의 사건을 예로 들며 회남왕의 모반이 부당한 일이고

명분도 없는 일이기때문에 성공할수도 없는일임을 간언했다.

 

회남왕은 노기와 원망이 가슴속에서 서로 얽히어 회한의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답답해 졌다.

그래서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떨구었다.

오피는 천천히 일어나 조용히 섬돌을 딛고 당 아래로 내려서 돌아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회남왕 유안에게는 불해 라는 서자가 있었는데 자식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왕은 유불해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왕후나 태자도 불해를 형제의 숫자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불해에게는 재주가 많고 기백이 있는 건 이라는 아들이 잇었다.

건은 태자가 자기 아버지를 무시해 형제로 취급도 하지 않는데 앙심을 품고 있었다.

 

당시의 제후들은 자기의 아들들에게 분봉하여 후로 삼고 영지를 떼어 줄수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남왕은 단 둘밖에 없는 아들중에서

하나는 태자로 삼으면서 다른 하나는 멀찌기 내쳐버린데대해 유건은 원한을 품을수밖에 없었다.

유건은 은밀히 무리를 지어 당을 만들고 태자를 참소하고 고발하여

자기 아버지가 태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 낌새를 태자가 알아차려 버렸다.

태자는 유건을 잡아다가 결박하고 매질을 했다.

 

유건은 입술을 깨물며 태자에대해 복수를 할 생각을 가졌다.

예전에 태자가 한실의 사자를 죽이려 계책을 세운것을 알고있는 유건은

수춘사람 장지를 시켜 황제에게 글을 올려 이러한 사실을 고발했다.

 

이 고발장을 보게된 황제는 정위를 시켜 이 일을 자세히 규명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정위는 다시 하남의 관리에게 명해 이 사건을 파헤치도록 했다.

 

이무렵.

죽은 벽양후 심이기의 손자 심경이 승상 공손홍과 친밀하게 지냈다.

심경은 회남여왕이 자기의 조부 벽양후 심이기를 죽인 사실을 두고

아직도 원망하여 회남왕의 음모에대해 있는사실 없는사실을 꿰어 조작해

한창 공손홍에게 고해바치고 있던 중이었다.

마침 이때에 그런 상서문이 올라왔던 것이다.

 

공손홍은 심경의 부탁을 받고 회남왕의 모반사실을 철저히 규명하도록 하남의 관리에게 특별히 하명했다.

 

하남의 관리가 유건을 불러 심문했다.

그러자 유건은 회남왕의 태자 유천과 그 일당의 음모사실을 부풀려서 불어 버렸다.

 

한편 회남왕은 신변에 화가 미쳐오고 있음을 우려해 미리 거사를 하려고 오피를 불러 다짐하듯 물었다.

"지금 한나라 조정은 잘 다스려지고 있는가?

아니면 어지러운 상태인가?"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회남왕은 오피의 대답이 불쾌했다.

"그대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오피가 대답했다.

"한나라 조정은 군신간의 의리가 잘 지켜지고 있으며

부자간에 친밀감이 넘치고 부부간에는 유별하며 장유간에도 질서가 있어

모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천자는 옛 도를 잘 따르고 있으며 풍속과 기강도 잘못됨이 없습니다.

남월은 복종하고 있으며 강.북 은 조공을 바치고 있고

동구는 스스로 찾아와 항복하고 장유의 요새는 확장 되었으며

흉노의 날개는 꺾였습니다.

아직까지 옛 태평성대에는 못미친다 하더라도 그런대로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회남왕은 오랜 시간동안 오피와 토론했다.

그러나 오피는 끝내 회남왕의 모반을 반대했다.

아무리 타일러도 회남왕이 고집을 꺾지 않자

오피는 반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반어법적 비유를 들어 설득했다.

"정 모반을 할 계획이라면 한나라와 천하 백성들을 이간질 해야 합니다.

우선 승상과 어사의 서신을 위조해서 각 군현과 제후국의 호걸들에게 격문을 띄우고

죄인을 사면하여 그들을 삭방군으로 이주 시키십시오.

또한 가산이 50만전 이상인 부자들의 일가권속들을 모두 삭방으로 강제이주 시키되

무장병으로 위협하여 기일내에 도착하도록 하십시오.

또한 옥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문서를 위조해 각제후들의 태자와 총애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체포하십시오.

 

그리하면 백성들은 원망 할것이고 제후들은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이때에 달변의 변사들을 파견해 한나라의 폭정을 설득하게 한다면

혹시 요행으로 성공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계책은 너무도 무리한 방법으로서 그 위험성이 너무 크기에

실제로 실행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계책이었다.

오피는 이런식으로 과장하여 회남왕을 포기시키려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회남왕은 이 계책을 듣고 반색했다.

"좋은 계략이다.

그러나 과인은 그보다 더 심한 계략을 쓸 작정이다.

그대는 그대가 내 뱉은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것이다."

 

오피는 아차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회남왕 유안은 사람을 풀어 한나라 궁정으로 들어가게 하여

황제의 옥새와 승상.어사대부.대장군.군리.중이천석.영.승 의 인장과

회남 주변 군현의 태수.도위의 인장과 한나라 사신들의 절부등을 모조리 위조해 오도록 했다.

이는 오피의 계책을 따른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자객들을 풀어 장안으로 숨어들게하여 대장군이나 승상을 섬기는척 하다가

일단 반란이 일어나면 측근에서 그들을 척살 하도록 하고

승상을 협박해 항복을 권유하도록 배치해 놓았다.

 

또 안으로는 회남에서 군사를 일으켜야 했는데

한나라에서 파견한 재상이나 2천석 이상의 고관들이 말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여

오피와 상의하여 모두 죽여버리기로 계책을 세웠다.

 

이들은 궁에 불을 질러 화재를 위장하여 그들이 불을 끄러 궁중으로 들어올때 모조리 죽여버리기로 했다.

또한 거병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남월이 국경을 침입했다는 소문을 퍼뜨리자는 계책까지 마련했다.

 

회남왕이 다시 오피에게 물었다.

"내가 거병하여 서쪽으로 진군하면 제후들은 호응할 것 같소?

아니면 응하지 않을 것 같소?

그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오?"

"남쪽의 형산을 접수하여 그 병력으로 여강을 치고 심양의 배를 차지하여 하치의 성을 지키십시오.

구강의 포구를 연결하고 예장의 입구를 끊고

강노를 배치하여 장강을 지켜 남군에서 내려오는 군사들을 막으십시오.

동쪽의 강도.회계를 거두어 남쪽의 굳센 남월과 통하여

강수와 회수 사이를 굳게 지키면 얼마간의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좋다.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을것이다.

어차피 위급해지면 월나라로 도망가면 그뿐이니까."

 

한편 한나라 정위는 회남왕의 손자 유건의 자백에 따라 회남왕의 태자 유천이 모반에 연루된것을 알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상주했다.

이에 황제는 회남사건을 담당하도록 정위를 회남의 중위로 임명해 서둘러 보냈다.

 

회남의 정위가 도착하자 회남왕은 태자를 불러 논의 했다.

 

"별수 없습니다.

애초에 계획한대로 재상과 2천석 이상의 고관들을 모두 불러 주살한뒤 거사해야 합니다."

 

회남왕도 그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뒤 재상과 내사와 중위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내사는 외출중이어서 오지 못했고

중위는 왕의 부름에 불응했다.

"저는 황제의 조칙을 받고 온 사람으로써 왕을 만나야 할 이유가 없소이다."

 

결국 재상만 아무것도 모르고 궁으로 들어왔다.

회남왕은 재상 하나만 죽여서는 아무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회남왕의 계략은 아무것도 이루어진것이 없었고

또 어찌해야 할지 결론도 못내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태자가 나서며 말했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 쓸만한 자는 모두 죄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이제는 함께 할만 자가 없습니다.

부왕께서 때가 아님에도 군사를 일으켰다가 아무런 공적도 없게 될 것이 걱정되니

원컨대 제가 체포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회남왕은 태자의 생각을 옳게 여기고 그가 체포됨을 허락했다.

그런데 태자는 자신만 입을 다물면 왕의 처지는 무사할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찔렀는데

남에게 발각되어 죽지는 않았다.

 

일이 이처럼 돌아가자 오피가 한나라관리에게 자수해 버렸다.

오피의 말을 들은 한나라관리는 즉시 태자와 왕후를 체포한뒤 왕궁을 포위했다.

뿐만 아니라 모반에 참여한 모든자들까지 체포해 놓고 그 증거를 수집해 황제에게 상주했다.

황제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번에는 공경들에게 사실을 규명하도록 했다.

역시 회남왕의 모반이 드러났다.

그에 연루된 제후와 2천석 이상의 고관및 호걸들이 수천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 되었다.

 

황제는 조왕 팽조와 열후 조양등 43명의 대신들에게 명해 회남왕을 논죄하게 하고

승상 공손홍.정위 장탕 등의 결의를 받아 회남왕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회남왕은 황제의 사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왕후 도 와 태자 유천과 모한 모반에 관여했던 다른자들도 모조리 주멸 되었다.

 

천자는 오피의 문사가 공손하고 여러번 한나라의 훌륭함을 칭송했다고 생각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정위 장탕이 말했다. 

"오피는 회남왕을 위해 모반을 계획한 사람으로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피도 처형되었다.

회남국은 폐지되고 구강군으로 강등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형산왕 유사의 왕후는 승서다.

자식 셋을 낳았는데 장남은 태자 유상 이고 차남은 유효 이며 딸은 무채 였다.

또 왕에게는 서래 라는 희첩이 있었는데 네명의 자녀를 낳았고

미인 궐희는 두명의 아들을 두었다.

 

형산왕 유사와 회남왕 유안은 서로 예의가 부족하다고 나무라면서 싸웠기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차에 형산왕은 회남왕이 모반하기 위해 무기를 제작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빈객들과 결탁했다.

회남왕의 모반을 반대한다기 보다는 자칫 회남에게 나라가 병탄되는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원광6년.

형산왕이 입조했다.

그때 형산왕을 따라갔던 알자 위경은 방술을 잘 했으므로 차제에 상서하여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려 했다.

 

형산왕은 크게 노해 위경에게 죄를 씌워 그를 고문하고 자백하도록 했다.

그러나 옥사를 맡은 형산국의 내사는 왕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소송을 각하 해버렸다.

 

더욱 노한 형산왕은 사람을 시켜 내사마저 고발 하도록 했다.

내사는 모진 심문을 받으면서 형산왕의 부정까지 불어버리고 말았다.

ㅡ형산왕은 백성의 전지를 침탈했고 남의 무덤까지 갈아 자기의 땅으로 소속 시켰습니다.ㅡ

 

한나라 관리는 황제에게 형산왕을 체포해 죄를 규명할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신 형산의 2백석 이상 관리를 한나라에서 임명하도록 했다.

 

형산왕은 이를 분하게 생각하고 해자.장광창 등과 의논하여 병법.점성.망기 등에 능한자를 구하는등

은밀히 모반을 꾀하기 시작했다.

 

한편왕후인 승서가 죽었다.

그래서 서래가 왕후로 세워졌다.

희첩 궐희 역시 왕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두 여인은 서로 질투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

 

궐희는 태자 유상에게 새 왕후 서래를 헐뜯었다.

"태자의 모친인 선왕후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바로 새 왕후 서래가 비 를 시켜 선왕후를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태자는 속으로 크게 분노하고 원망하면서 서래를 해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서래의 오라비가 형산국으로 왔는데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말다툼이 벌어져

태자가 칼로 서래의 오라비에게 상처를 입혔다.

왕후는 크게 노했다.

그는 태자를 원망하면서 왕에게 태자를 자주 헐뜯었다.

 

태자의 누이동생 무채는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쫓겨나 친정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쫓겨와서도 노예든 빈객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간통했다.

태자가 그 소문을 듣고 누이를 나무랫다.

"네 행실이 어찌 그모양이냐?"

"오라버니가 무어길래 내 사생활까지 간섭한답니까?"

무채는 무채대로 화를 내며 태자와의 왕래를 끊어버렸다.

왕후가 이 소식을 듣고 좋은 기회라 판단하여 무채에게 접근해 잘 대우하며 그녀를 편 들었다.

사실 무채와 무채의 작은오라비 유효 는 어려서 모친을 잃었기 때문에

왕후 서래의 그늘에서 양육 되었다.

왕후는 철저한 계략에 의해 이들을 사랑하는척 하며 태자를 헐뜯었다.

왕은 모든 사람들이 태자를 비난했으므로 그로인해 태자를 불러다가 자주 매질을 했다.

 

원삭4년.

누군가가 왕후의 모친에게 칼로 부상을 입혔다.

왕은 태자를 의심하고 불러다가 매질했다.

태자는 분하고 억울했다.

그후 왕이 병들어 누웠는데도 태자는 자신도 병들었다 핑계대고 왕의 병상에 나타나지도 았았다.

무채는 다시 태자를 헐뜯었다.

"태자는 병이난게 아닙니다.

아버님이 병들었다고 하는데도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더이다."

왕은 크게 노했다.

태자 상을 폐하고 차자 효 를 태자로 세울 작정을 했다.

왕후 서래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생각했다.

"기왕에 태자를 바꿀바에야 차자 효 가 아니라 내아들 광이 태자가 되는것이 좋지않은가?"

 

왕후에게는 심복인 시녀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운데다가 춤을 기막히게 잘 추었다.

그래서 형산왕도 그녀를 매우 총애했다.

왕후는 그녀를 조용히 불러 말했다.

"너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효 와 사통해라.

그에게 오명을 씌워야 두 형제 모두 태자가 되지 못하고 내아들 광이 태자가 될 것이다.

일만 잘 되면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한편 태자 유상은 이러한 낌새를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태자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위해서는 왕후와 밀통하여 입을 막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태자는 왕후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후의 궁으로 갔다.

태자는 술잔을 들어 일단 축수한뒤에 왕후의 허벅지에 기대어 동침하자고 유혹했다.

그러나 왕후가 그런 유혹에 넘어갈리 없었다.

난행을 모면한 왕후는 이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대로한 왕은 태자를 불렀다.

이번에는 결박한채로 태형을 가할 참이었다.

그러나 태자는 반항하며 결박당하지 않았다.

"나를 폐하고 효를 태자로 세우려 하십니까?

효는 대왕의 시녀와 간통했고 무채는 노비와 간통했습니다.

왕께서는 식사나 많이 드시면서 즐겁게 살 생각이나 하십시오.

저는 이나라의 황음무도함을 천자께 낱낱이 상서하겠습니다.

 

태자는 이처럼 말하고는 어전을 벗어나왔다.

"저놈을 붙잡아라"

왕이 고함을 쳤지만 아무도 태자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분노한 왕은 몸소 수레를 몰아 태자를 뒤쫓아 갔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태자는 결국 결박 되었다.

태자가 함부로 막말을 쏟아내자 간신히 형구를 씌워 궁중 깊숙히 가두었다.

 

차남 유효는 날이 갈수록 왕의 사랑을 받았다.

효의 재능을 기특하게 생각한 왕은 효에게 왕의 인장을 차게하고 장군이라고 부르게 했으며

궁 밖에 기거하게 하면서 많은 금전을 주어 빈객들과 사귀게 했다.

 

빈객들은 유효가 의도하는 바를 잘 알았다.

형산국이 회남과 연계되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걸 눈치챈 빈객들은

밤낮으로 아부하며 반역을 부추겼다.

 

왕은 왕대로 효의 빈객들중에 강도사람 구혁 과 진희 를 시켜 전차와 화살촉을 만들게 하고

황제의 옥새와 장군.재상.군리의 인장을 위조하게 했다.

 

그러나 형산왕의 의도는 회남왕처럼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데 있지는 않았다.

오로지 회남국이 병사를 일으켜 형산을 병탄하지나 않을까 하는것만이 걱정이었다.

 

만일 회남이 서진하여 장안을 공격하러 가서 본국을 비우면

그 틈을 이용해 양자강과 회수 사이를 급습해 그 땅을 차지하려는 작정 이었다.

 

원삭5년.

형산왕은 한에 입조해야 했으므로 장안으로 가는길에 회남에 들렀다.

회남왕은 형제끼리 정담을 나누며 형산왕에게 전날의 불화를 잊고 합심하여 함께 모반하자고 제의했다.

 

형산왕은 회남왕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러기로 약속한뒤

신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못하는 사과문을 상서했다.

황제는 글을 내려 입조하지 않아도 좋다고 허락 했다

 

형산왕은 다시 상서하여 태자를 폐하고 차자 효를 태자로 삼게 해달라고 청했다.

태자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친구 백영을 장안으로 급파하여

유효가 전차와 화살을 만들고 왕의 시녀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상주케 함으로서

유효가 태자가 되는일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형산왕이 먼저 손을 써서 백영은 장안에 당도하자 마자 상서도 하기전에 체포되고 말았다.

형산왕은 선수를 쳐서 태자 유상을 황제에게 고발했다.

"태자 유상은 소행이 무도하므로 그 죄가 기시에 해당합니다."

한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패군의 도위에게 맡겨 규명하도록 했다.

 

원삭7년.

 

한나라 공경들은 패군에 지령을 내려 회남왕의 모반에 관련된 자들을 체포하게 했다.

패군도위는 한참동안 관련자들을 잡지 못하다가 유효의 집에서 진희를 체포했다.

패군도위는 유효가 주동이 되어 진희를 은닉했다고 탄핵했다.

유효는 평소에 여러 번 형산왕과 반역을 모의했던 진희가 그 일을 발설할까봐 걱정했다.

또 법에 먼저 자수하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효는

태자가 백영을 시켜 모반의 계획을 폭로할 것이라고 걱정하여

곧바로 출두하여 자수하면서 구혁과 진희 등의 모반에 참여한 자들을 고발했다.

 

정위가 심문한 결과 그 일에 대한 증거가 확실했음으로

공경대신들은 형산왕을 당장 체포하여 모반죄로 다스릴 것을 황제에게 주청했다.

황제는 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중위 사마안과 대행 이식 을 보내 형산왕을 심문하도록 했다.

왕은 별수없이 자초지종을 모두 자백하고 말았다.

 

관리들은 일단 왕궁을 포위하여 형산왕을 구금하고 귀환하여 황제에게 상주했다.

형산왕은 자신의 죄를 모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유효는 자수했기때문에 그 죄가 면제되길 기대했으나

왕의 시녀와 간통한 죄 때문에 역시 기시되고 말았다.

왕후 서래도 역시 전의 왕후 승서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이유로 처형 되었고

태자 유상 역시 부친인 왕을 고발했다는 불효죄에 걸려 기시 되었다.

형산국은 폐지되고 형산군으로 강등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 하였다.

ㅡ<시경>에 이르기를 융적을 응징하고 형서를 징계해야 한다ㅡ 고 했는데

이 말은 믿을만 하다.

회남.형산왕은 한나라의 골육으로 사방천리의 제후의 반열에 있었다.

번병의 신하로서 의무를 다하고 천자의 뜻을 받들어 보좌하는데 힘쓰지 않고

오로지 간사한 계략으로 부자가 두번씩이나 나라를 잃고

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함으로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왕 만의 책임이라기 보다 그 지방의 풍습이 천박했기때문에

신하들이 점차로 악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형.초 의 백성들은 용감하고 사나워서

반란을 곧잘 일으킨다는 사실이 옛부터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상으로 회남.형산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보았다.

 

회남과 형산은 항상 모반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마천의 말대로 반드시 풍속이 천박했기때문이라고 보기엔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의 황제라 하면 천하의 주인이니

천하의 주인된자가 자기의 영토에 사는 백성을 다스림에

풍습이 천박하면 교화하고 어루만져서 천자의 덕을 입고 모두 돈후한 백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가 백성을 다스림에 그 백성이 천박하면 세금을 적게 물리고 부역을 감해준 일이 있는것도 아닌바에

소위'그들은 천박하므로 중히 쓸 인재가 못된다'는 명분으로 지역을 차별하지는 않았는지

되묻고 반성하는것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돼먹지 않은 명분으로 천박하다는 오명을 씌운채 책임을 방기하는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수 없다.

 

ㅡ옛 주문왕과 주무왕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림에 사이팔만이 스스로 주실을 섬기고

천하가 교화되어 모두 주나라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다ㅡ

라는 고사에서도 볼수 있듯이

백성들의풍습이나 성정은 그들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고

집권자의 능력과 품성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것이라 생각할수밖에 없다.

 

회남과 형산을 다스린 사람들은 모두 황제의 매우 가까운 친척들이었는데

그들이 왜 오만방자해지고 모반을 일으켰는지,

그들이 황족으로서 그 혈맥속에 모두 반역의 유전자가 들어 있었던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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