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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왜인전에 등장하는 왜국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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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SowHat
추천 : 11
조회수 : 96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02 22:58:11

다음 글은 네이버 캐스트에 한국사를 포스팅하시기도 하셨던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님께서 꽤 오래 전에 적으셨던 게시글 입니다.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되어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자 가져왔습니다.






수서 왜인전에 등장하는 왜국에 대해서 

왜국은 백제의 속국이었다. 이것은 우리 학계의 공식적 견해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믿고 있는 견해입니다. 왜국은 백제로부터 많은 문물을 배운 제자나라다. 이 정도의 견해라면 우리 학계에서 음 그렇지하고 말합니다. 일본학계에서도 좀 표현을 바꾸어서 왜국이 백제로부터 많은 문물을 배운 것은 사실이다고 말합니다. 

그런 선입견에 빠져있다가 백제, 신라가 왜국을 대국으로 여겼다는 수서의 문장을 보면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해석을 잘못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왜국이 진기한 물건도 많고 대국이었다는 문장은 쉽게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이 문장은 일본측의 사서가 아닌, 제 3자인 중국측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관점을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왜국을 보아왔는지를 살피고, 또 중원의 나라들과 왜국의 교섭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 이를 검토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한 접근은 이런 검토가 이루어진 이후에 해보아야 할 것이며,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일본서기는 비록 8세기초에 나온 서적이지만, 매우 분식되어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중국측 자료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수서에서는 분명 왜국을 아주 대단한 나라로 취급을 했습니다. 수서에 보면 왜국에 대한 분량이 신라, 백제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수서를 전후한 사서들에서 비춘 왜국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국에 대한 25사의 사료로는 후한서, 삼국지, 진서, 송서, 남제서, 양서, 수서, 남사, 북사, 구당서, 신당서 등입니다. 

이 가운데 후한서, 삼국지, 진서는 단순히 일본 열도에 위치한 왜국의 지리와 풍습, 그리고 특이한 지배자였던 비미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 또한 서기 3세기 경 한명의 중원인이 왜국을 방문하여 전해 들은 것을 기반으로 썼기 때문에 왜국이란 말이 아닌 왜인전으로 표시가 되어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왜국의 실상을 전해주는 사서로는 송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송서는 5세기 왜국의 상황을 전해주는 자료로 가치가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자료에 보면 왜국은 주변의 작은 소국을 무려 216개나 평정하고 나라를 넓혔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군제군사로 삼아달라는 요청을 하고 그래서 그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478년 왜국의 사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제는 길이 멀어서 배를 만들어 침략해 올 준비를 하고, 고구려는 무도하여 왜국을 삼키려 하여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아 송나라와 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고, 송나라가 도와준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는 왜국은 백제보다 강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이 될 것입니다. 또한 216국을 정벌했다는 것도 실상은 국이 아닌 촌락을 차지한 것이거나, 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남제서 인데, 남제서는 잘 알려져 있듯이 백제의 강성함이 부각시켜준 책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제서에는 왜국에 대한 기록이 겨우 세줄 69자에 불과할 정도로 적고 그 내용도 다른 책의 것을 베낀 수준입니다. 왜국은 479년 딱 한번 남제(479-502)와 교류했을 뿐, 활동이 미비했습니다. 

또 양나라(502-557) 때도 마찬가지여서 양서 왜국전은 앞선 기록들의 베낌이며, 왜국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왜국은 진(陳)나라(557-588) 시기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북조의 나라들인 북위, 동위, 북제 등과도 전혀 교류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긴 고구려와 백제에 막혀 쉽게 이들 나라와 교역할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자, 이제 남사와 북사가 있는데, 이것은 남북조의 역사를 다시금 당나라에 와서 정리한 책이지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앞선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는 정도 외에는 특별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수나라 기록인 수서에 드디어 왜국이 제대로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수서 왜국전에 보면 600년에 왜국의 사신이 수나라를 방문합니다. 이때 수나라에 온 왜국의 사신을 통해 수나라를 왜국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입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왕의 이름, 태자 이름, 관리의 등급, 외모, 옷, 풍습, 음악, 오락, 혼인, 제례, 산 등등 전반적인 새 정보가 파악됩니다. 

이때 왜국의 사신을 통해 얻은 정보가 바로 수서 왜국전에 기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 백제가 모두 왜국을 대국으로 여긴다는 표현도 실은 수나라의 입장이 아닌 왜국의 입장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오랫동안 왜국에 대한 정보가 없던 중원의 국가들로서는 왜국이 멀리 있는 나라인 만큼 무엇인가 새롭다는 인식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보를 다 기재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국은 이때 수나라에게 “해가 나는 곳의 천자가 해가 떨어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는데 아무 탈도 없는가” 라는 국서를 씁니다. 그래서 수나라를 몹시 화나게 합니다. 수나라는 이 국서를 받은 배청이란 자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어 정보를 파악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배청이 사신을 간 것으로 수와 왜의 교섭은 끝나고 맙니다. 

수서의 기록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신당서 일본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앞서서 구당서 일본전을 보지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이게 뭐냐구하겠지만,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는 아주 단순한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이 또 있지 않습니까.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대조영은 본래 고려별종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가. 일본국과 왜국이 같은 것이라면, 별종이란 말은 후예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대조영이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별종이란 말로 발해를 그렇게 씹었던 인간들의 상당수가 일본인들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자국의 역사와 왜국이 전혀 무관하다고 보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구당서 일본전에는 왜국과 일본을 별개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는데, 실은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 왜국이 일본으로 국명이 바꾸었다는 것을 기록해두었으니까요. 그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고, 703년 이후 왜국이 당에 사신 보내는 정보 등이 나올 뿐, 분량도 적습니다. 

문제는 신당서 일본전입니다. 여기에 보면 일본서기가 완성되었던지 역대 왜국의 계보가 줄줄이 나옵니다. 일본인들이 당나라에 자국이 역사를 좀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용명왕 시기를 설명하면서 그를 수나라와 교섭한 목다리사비고(수서의 다리사북고)라고 설명하고, 이때 비로소 중국과 상통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수서의 기록이 실질적으로 왜국이 중원의 나라들과 최초로 접촉한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또 신당서 왜국전에는 그 나라의 국토는 넓이가 수천리가 된다 망언으로 과장한다고 기록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왜국을 직접 방문한 경험이 있고 정보도 축적된 당나라에서는 수나라와 달리 왜국의 실상을 제대로 본 것이지요. 

결국 수서 왜국전은 왜국의 과장이라는 것이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볼 때 분명해집니다. 


자. 하지만 요즘 학계에서 새롭게 제시되는 주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백제가 우월한 관계만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는 주장이입니다. 즉 백제는 왜국에 문물을 전파해주고, 반대급부로 왜국의 군대를 빌려오는 그와 같은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주장입니다. 475년 이전에는 대체로 백제가 우위에 있었고, 그 이후에는 상황에 따라 왜국이 우위에 있었던 적도 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문헌에 대한 자세한 분석, 그리고 국제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나온 설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 더 검토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백제가 일본에 대해서 우위였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5세기에는 백제가 왜국을 공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600년경에 왜국은 자체의 힘으로 수나라에 교섭하고, 나름의 자부심을 내비추어 보이는 것이 결코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무렵에 왜국의 힘은 꽤나 발전하여 많은 문물이 축적되고 있습니다. 

아직 논란이 되기는 하겠지만, 600년경에 왜국에 구주와 사국, 그리고 동경보다 서쪽의 본주섬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 면적은 대략 20만평방미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의 영토 대략 6-7만 평방미터보다 큰 나라가 됩니다. 또 그 면적에 사는 인구 또한 신라보다는 많았음에 분명합니다. 만약 동경보다 서쪽의 본주섬 지역까지 통일국가 왜국이 건설되었다면 충분히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칠만한 나라가 등장할 수도 있었음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문제는 현재 일본학계에서도 구주중심설과 기내중심설 등으로 나누어 싸우고 있고 언제 왜국이 그 지역을 통일했는지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백제가 왜국에 대해 국력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조금씩 학계에서는 바뀌어 가고 있고, 나 역시 그러한 생각에 대해 열린 눈으로 주목을 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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