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만의 꿀맛 같은 휴일, 얼마 전에 면허를 딴 딸이 친구들에게 으스대고 싶어 내 차를 강탈해 가다시피 끌고 갔다. 어제 미리 보험도 들어뒀다고 해맑게 웃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키를 내주고 말았다.
그 참에 망중한을 즐기는데, 단잠을 깨우는 전화가 왔다. 딸 세아였다.
"응, 왜?"
나는 눈을 감은 채 왼쪽으로 몸을 굴려 오른쪽 귀에 폰을 올렸다.
"아빠! 아빠! 차가 이상해. 갑자기 브레이크가 안 들어!"
헉! 나는 브레이크라는 말에 전광석화와 같이 벌떡 일어나 앉아 물었다.
"뭐! 어딘데??"
딸의 다급한 목소리는 20년간 키우면서 처음 들어보는 아주 급한 톤이었다. 장난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머리를 때리고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서늘해졌다. 세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빠! 모래재 내리막길이야. 어떡해?"
모래재?? 그곳은 전주와 진안을 잇는 도로로 급경사에 심하게 구불구불한 도로다. 나는 급격히 긴장했고 땀을 비 오듯 쏟아내고 있었다. 모래재는 브레이크 파열로 사고도 많은 데다 거의 대부분이 대형 사망사고로 이어지는 마의 구간이기 때문이다. 눈앞이 까마득했지만, 세아가 닥친 위기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야! 침착해. 핸들 두 손으로 꼭 잡고 , 다시방 가운데 거, 거, 빨간색 있잖아. 삼각형. 그거! 그거! 비상등 키고 쌍라이트도 켜!"
나는 숨죽여 기다렸다.
"응, 다했어."
역시 내 딸이다. 똑똑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아악! 어떻게 해. 우리 이대로 죽는 거야. 엄마! 엄마!"
뒤에 앉은 친구들의 비명 소리가 찢어지게 들렸다. 나는 소리쳤다.
"야! 조용해! 안 죽으니까 걱정 말고 창문 열고 손수건이나 옷 같은 거 휘둘러 뒤차들 추월 못허게. 그리고 세아는 기어를 D에서 오른쪽 +-있지? 그쪽으로 제끼고 -쪽으로 한 번 내려. 웅~하면서 속도 줄지?"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 조금 주는 거 같아. 지금 5단이야."
나는 기뻤다. 초보인 어린 딸이 내 주문을 당황하지 않고 잘 따라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세아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하고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오로지 나의 노하우와 정확한 판단만이 오롯이 세아에게 전달되어야만 한다. 운전 연수에 앞서 점검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 잘 했어. 그게 엔진 브레이크라는 거여. 그런 식으로 1단까지 내려야 해. 알겠지? 한꺼번에 다 안 내려가니까. 사이드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줘. 쎄게 밟으면 안 돼! 속도 좀 더 줄었지?"
"응, 지금 72킬로야."
"그래, 그럼 사이드 한 칸 더 밟고, 기어를 한 번 더 내려. 그런 식으로 반복하는 거야."
"아빠, 이번엔 꼬부라지는데야."
아뿔사! 나는 크게 돌다 안쪽으로 파고드는 코너링을 떠올렸다.
"야! 눈 크게 뜨고 핸들은 과감하게 돌려. 회전할 때 크게 도는 거 알지? 바깥쪽으로 크게 돌다가 안쪽으로 파고들듯이 꺾어. 두 개 차로를 다 쓰는 거야. 알겠지?"
나는 온 신경을 전화기 넘어 소리에 집중했다.
"어어어어...... 엄마야!"
세아의 외마디 비명이 들린 후, 쿵! 쿵! 하고 듣기 싫은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돌았어. 근데,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어. 다시 속도가 높아져."
나는 이내 주문을 이어갔다.
"그래, 그래, 괜찮아. 아까 엔진 브레이크 쓰면서 사이드 조금씩 더 밟아. 기어 1단까지 내려야 해."
이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한 듯했다. 지금부터는 세아의 몫이었다. 미친 듯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그 안에 이제 갓 스무 살짜리 여자아이들 넷.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식은땀이 이마를 흘러 온몸을 이미 적시고 있었다. 뜨거웠다.
그때, 세아가 소리쳤다.
"아빠, 탄 내가 나. 바퀴에 불붙은 거 같아."
아! 사이드 걸어둔 게 과열된 거였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그래, 이젠 더이상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세아야? 아빠 말 잘 들어. 이젠 이 방법 밖에 없어 사이드는 끝까지 다 밟고 오른쪽 가드레일에 차를 밀어붙여. 완전히 멈출 때까지 핸들 꼭 잡고 밀어붙여야 해. 어서 당장 해! 안 그럼 불 날 거야. 서둘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아이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쇠가 부딪히는 굉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세아의 성장과정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빠, 차 섰어! 근데, 불붙었어.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마! 멈췄으면 빨리 탈출해야지. 차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어서! 고! 고! 고!"
나는 아이들을 대피하라고 한 뒤, 지역 경찰과 소방대에 연락을 취했다.
내 차는 전소되어 폐차장으로 향했으나, 다행히 네 명의 아가씨들은 병원에서 웃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많이 놀랐을 아이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었으리라. 이런 아이들에게 나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