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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 도올의 동아시아 30년 전쟁
게시물ID : sisa_9780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ainMaker™
추천 : 9
조회수 : 115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8/24 23:53:38
야밤에 잠이 안오므로 음슴체.

광주 MBC에서 강의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강의를 글로 옮겼음.
40여분의 강의를 직접 시청하는게 좋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으시면 한번 읽어 보면 좋음.
실제 이역사를 고교 교과서에 어떻게 기록했나 살펴보니 대강은 다 나와있으나 연결이 안됨. 
이 녹취는 강의 내용을 옮긴거라 쏙쏙 박힘.
수험생 필독권함 ^^


모든 역사는 현대사(All history is contemporary.)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적은 사관은 객관적으로 적었다고 하겠지만 그 사람 시대에는 그게 현대사겠죠? 
모든 역사는 당대의 가치관에 의하여 해석된 것이며, 따라서 현대사의 연속일 뿐입니다.
 
오늘 여기 '나' 없이 역사가 있습니까? 
내가 단군의 역사를 쓴다고 해도, 도올 김용옥이 기술하고 쓴 단군의 역사이지 그게 단군의 진짜 역사인지 사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건 고대사니까 그렇다 치고, 현대사는 명백하게 우리가 다 아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가까운 현대사로 들어오면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사는 소설이 더 심합니다. 
단군의 역사보다 현대사가 ‘구라’가 더 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사는 거짓말이 더 심합니다. 
독립운동사 역시 남북정권의 지배자의 구미에 안 맞는 99%의 역사가 은폐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1950년 6월 25 일 새벽 4 시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것에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닌가요? 
이것이 사실일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1950 년 6월 25일 새벽 4 시에 전쟁이 시작되었다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것은 역사술어로서 검증을 요하는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전쟁이 일어 났으면 어떻게 일어났냐? 이것을 기술해야 하는데, 북침이냐 남침이냐 이걸 나눠야 하는데, 김일성이 내려온 겁니까 이승만이 올라간 겁니까?

단순히 남침이냐? 북침이냐?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전쟁을 말한다면 한국전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한국전쟁은 최소한 6.25, 즉 1950년 6월 25 일이라는 한시적 시점의 문제가 아니고, 광복 후 우리 민족의 대치상황에서 놓인 비극적인 역사의 연장선상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소련이나 중국 등의 비밀문서 등이 공개가 안됐는데 요즘은 일부가 다 공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몰랐던 어마어마한 사실들이 지금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 말고 사실, 어마어마한 비밀들이 우리 민중에게 아직 전달이 되어 있질 않습니다.


나는 한국 전쟁은 1945 년 8월 15일 사실상 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1945 년 8월 15일 일왕이 항복하면서 일본 놈들은 역사에서 싹 빠졌습니다. 
명치유신 이후 1세기간 지속되어온 일본의 제국주의가 망하면서 일본이 지배하거나 간섭했던 모든 나라에 그들은 전쟁의 불씨를 뿌렸습니다. 
친일파 문제(중국, 러시아, 한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본은 1945 년 항복선언과 동시에 미국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의 역사로부터 도피를 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뜻있는 사람들은 만주로 다 나갔습니다. 
중국의 상황은 어땠느냐면, 1931 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2 년 일본이 부의라는 놈을 내세워 중국 북쪽에 위만주국을 세운 후 본격적으로 대륙을 침략하려고 하는데, 이 상황이 임진왜란 때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과정과 똑같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왜 한국에 왔습니까? 
이 놈이 중국에 가서 천자가 되겠으니까 길을 비켜달라고 해서 우리나라를 침략했습니다. 일본의 명치제국주의라는 것도 역시 ‘탈아론’에 근거하여 동아시아 전제를 삼키려는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깡패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일본의 중국 침략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것은, 중국 놈들은 일본 놈들이 그렇게 쳐들어와도 민족개념이 희박해서 우리랑 달랐습니다. 
이놈들은 매년 마적들이 와서 괴롭히는게 이골이 나서 그런지.…일본 놈이 와도 또 다른 마적 놈들인가보다...해서 우리처럼 무슨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희박한 겁니다. 
그래서 모택동이가 싸우기가 너무 힘든겁니다. 
'중국민들이여 일본놈들이 우리를 다 지배하려고 한다. 싸우자.' 해도 사람들이 뭐 또 마적 새끼들이 왔나 본데 그냥 땅 조금 떼어주자... 그렇게 되는겁니다.

그래서 이런 중국민들을 계몽시켜야겠는데, 이걸 하려면 민족의식이 일단 투철해야  하고 일본말을 잘하고 일본을 잘 알고, 그러면서도 중국말도 잘하고 중국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중국인 중에 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보니까 민족 의식 투철하고, 일본놈들이라면 이를 갈고 다 죽일라 하고, 거기다 일본말 잘하지, 한국말 잘하지, 중국말 잘하지...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그 밑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중국의 혁명은 모택동이 일으킨게 아닙니다. 
한국사람들이 만들어줬습니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모릅니다. 
중국이 왜 6.25때, 1.4후퇴 때... 중국인들도 미쳤다고 1백만명의 자녀들을 한국으로 보냈겠습니까? 
우리는… 중국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와서 싸웠다고 하지만 거기서 죽어간 중국인들은...중국 입장에서 불쌍하지 않냐고?
그런도 수양제가 고구려에 파견한 군인보다 중국이 보낸 군인 수가 많잖아요.
왜 그랬겠어요?
의리를 지켜야 하니까. 
중국혁명을 한국사람들이 만들어 줬다는걸 모택동이가 아는 겁니다.
그렇기때문에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북한이 6.25를 일으켰을 때...보내는 겁니다.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얘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숨은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러시아 혁명을 레닌이 일으켰습니까?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일으킨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코뮤니스트이자, 저 우랄산맥부터 연해주까지 연설을 해가면서 운동한 사람이 바로 한국 여성(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1885~1918, 함경도 경흥, 김두서의 딸,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 지도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인사회당 결성(1918))입니다.
 러시아혁명, 중국혁명은 한국인들의 역할이 없었다면 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는 한국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일본 놈들의 수탈과 탄압이 역설적으로 한민족의 깨인 의식을 가져왔고, 그것이 세계 혁명사를 리드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혁명정신을 가지고 대륙을 휩쓰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는데, 이게 또 가능했던 것은 100 만에 가까운 중국에 있던 한국 인민들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놈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이름 중 하나가 홍범도(1868~1943, 평양감영의 군인 출신, 삼수갑산에서 포수독립군을 조직하여 맹위를 떨침.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주역.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 한 한국인)였는데, 이 사람은 평양 사람입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자본이 없었습니다. 독립군이 만주벌판에서 100 명이 100 일을 움직인다. 이거 어떻게 움직입니까? 어떻게 싸웁니까? 
이건 만주벌판 산간지대 곳곳에서 한국사람들이 개간을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는 사실 독립군의 역사가 아니라 그 독립군을 먹여 살린 기층 민중의 보이지 않는 희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싸우고 나면 우리 민중은 처참히 당했습니다. 
전쟁에서 독립군이 이겼다. 이게 이긴 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 놈들을 괴멸시키고 나면 그 인근 수천, 수만의 조선 민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유명한 사건이 경신참변(1920, 삼일운동 이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후 간도지역 조선민중을 처참하게 살해한 사건. 일본군은 모든 조선인 부락민들을 이유 없이 도살하였다.)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북쪽 만주지역으로 동북항일연군 주1) (1930년대 만주에 팔로군이 항일 빨치산들을 연합하여 만든 군대. 이 군대의 주역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1로군 2군 6사장이 김일성이라는 청년이었다.) 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이루어 지고 있었고, 중국 중부 화북지역중심으로는 중국군 공산당인 팔로군이 있었는데, 이들과 연합해서 싸운 조선의용군주2)(밀양사람 약산 김원봉이 만든 조직에서 출발한 독립군. 연안에서 팔로군과 합세하여 의용군으로 발전)이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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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동북항일연군
1935년 제7차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에 따라 설립된 만주지역 항일무장운동 단체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정권 수립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를 강화하였고, 북한 국가 설립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북항일연군 [東北抗日連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 조선의용군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金元鳳)]·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金星淑)]·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柳子明)]·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崔昌益)] 등 중국본토에서 활약하던 좌파 4당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용군 [朝鮮義勇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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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독립운동사를 보면 중국 남부의 외교투쟁노선, 화북의 의용투쟁노선, 만주의 유격투쟁노선 이렇게 흘러가게 됩니다.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1945 년 8월 16일 날 일본 놈들이 패망하고 보니까 우리 독립군은 
화북지방에서는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 공산당인 팔로군을 위해서도 싸웠고, 
남쪽에서는 국민당인 장개석을 위해서도 싸웠습니다. 
남쪽 임시정부가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보니까 장개석의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그 시발이 된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1932년 4월 29일, 김구 한인애국단의 이 의거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는 비로서 활성화 되기 시작함.)입니다. 
이게 1932 년인데 이후 임시정부가 활성화가 많이 됩니다.


1945 년 8.15 가 되고나서 여기서부터가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인데, 중국이 만약 그때 공산당이나 국민당 한쪽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다면, 만약 장개석이나 모택동 누구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조선반도는 분열이 되었겠습니까? 안됐겠습니까? 
8.15 이후의 상황이 바로 중국이 국공분열 해서 내전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8.15 해방을 계기로 국공합작이 깨지게 되고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조선반도에도 필연적으로 내전상황이 시작이 됩니다. 

사실상 한국전쟁은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6.25 는 동아시아 내전상황의 한 고리일 뿐입니다.
중국이 내전상황에 들어가면서 모택동의 팔로군과 국민당의 장개석이 붙는데, 장개석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이 엄청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죠? 모택동이 이기게 됩니다. 
1945 년 8월 15 일부터 1949년 10월 1 일, 천안문에서 모택동이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까지, 그 국공내전의 처절한 시기가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가장 비극적 시기가 된 것입니다.
 
중국이 내전인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됐느냐? 
사실 한국전쟁은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가장 핵심적 고리가 되는 사건입니다. 
동아시아 30년 전쟁(중국국공내전 → 한국내전 →  중미전쟁 →  미소전쟁 → 인도차이나 월남전쟁 →  닉슨 독트린 → 미국의 패배) 중에서 한국전쟁은 한국내전, 중미전쟁, 미소전쟁의 모든 요소를 함축하는 세계사적 대사건으로서 미소 냉전체제의 출발이 된 것입니다.
 
1949 년 4월 23 일 모택동이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양자강을 건넙니다. 
그 때 김일성이도 한강을 건널 생각을 합니다. 
왜냐? 중국이나 한국이나 같은 내전 상황인데, 이걸 또 설명하려면 좀 긴데... 그래도 설명하자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8월 16일 날 온 나라 관공서나 경찰서에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싹 도망갔습니다. 일제시대 앞잡이 하던 놈들이 일본이 망했는데, 그날 다 있겠어요? 다 빕니다. 싹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 지역에 자치위원회가 만들어집니다. 
1945 년 8월 16 일부터 실제적으로 자치에 들어갑니다.
조선 전 국토가 자체적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이 됩니다. 우리가 요즘은 인민이라고 하면 공산당 생각이 나서 좀 꺼려지기도 하는 단어인데, 사실 인민위원회라는 것이 본래 공산당과는 상관없이 주민 자치조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걸 통합한 것이 여운형의 건준조직(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에 증부히여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 인민위원회가 건준의 산하기관은 아님. 상호협조했을 뿐이다.)입니다.
 
광주도 인민위원회가 8월 30일 날 조직이 됩니다. 
근데 미국이 1945 년 9월 8 일인가 들어오게 되는데, 미국은 본래 한국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에치슨 라인과 같이 방위선에서도 뺐고, 한국에 대해 무지하고 공부가 부족했는데, 반면 소련은 한국에 대해서 이전부터 치밀하게 전문적인 스터디를 해왔고, 보낸 사람도 스티코프라고 해서 아주 전문가가 옵니다. 
근데 미국은 제일 가까운 놈이 누구야? 해서 당시 오끼나와에 있던 하지한테 한국을 담당시켰습니다. 이 하지를 시켜서 한국에 보냈는데, 한국에 와 보니 일본이 물러난 후의 공백기를 사람들이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자치 기구를 만들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 무지한 이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다 숙청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제시절 경찰했던 놈들, 도지사 했던 놈들, 돈 줘가며, 총알 줘가며 다시 다 불렀습니다. 
니들이 와라. 이 인민위원회인지 원지 이놈들 못 믿겠다. 무식한 놈들 같은데 니들이 와서 해라.그대신 우리말 잘 들어라…

이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전국적으로 숙청된 사람들 - 일제시대 친일로 악랄했던 놈들이나 앞잡이들 -이 70여 명 정도 됐다고 합니다. 
사실 프랑스나 중국 이런 곳과 비교해 보면 아주 순했다고 할 수 있죠. 아무튼 이 조직을 빨갱이로 다 몰고 미군정에서 일제시대 일본 앞잡이 했던 놈들을 불러서 다시 통치를 시켜려니까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나요? 
내놓을 수 없다 하니까 죽기도 하고 내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타협한 사람들도 있고 타협하지 못하고 그 내몰린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빨치산이 많이 됐습니다. 

이 남한의 빨치산 조직을 묶은 것이 훗날 이현상 이라는 남부군 총사령관입니다. 
아무튼 이게, 역사가 좀 복합한테, 이렇게 되다 보니까 결국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부터 미군정과 더불어 실질적인 내전 상황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내전 상태에서 김일성의 판단에는 남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인민들을 조금 도와야 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겁니다. 
우리 형님 모택동이도 미군의 지원을 그렇게 받던 장개석을 밀어 붙여서 그렇게 성공했는데, 나도 한강 건너서 조선인민공화국 통일국가를 선포해야겠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만 합니까? 안 합니까?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서... 
중국 대륙의 팔로군에서 모택동과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부대는 이 팔로군 내에서도 아주 중요한 부대였습니다. 
전위 부대이자 선전 부대였고, 끝까지 살아남았는데, 해방 이후에도 국공투쟁에서 계속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땅에서 1947 년에 김일성이 국공합작 때 상당한 조선군대를 만주로 이동시킵니다. 이것이 만주 중국공산당 병력의 15~20% 정도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이 병력들은 중국 내에서 계속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그 후 1950 년 4월 10일 김일성,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납니다. 
이런 게 사실 다 예전에는 알수도 없던 것들인데 이제 이런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니 우리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아무튼 이놈들이 스탈린한테 가서 '형님 제가 남쪽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서 총대를 메야겠습니다. 밀어 붙여야겠습니다~했겠죠? 
그러니까 스탈린이... 좋긴 좋은데 우리 소련은 직접 지원하기 좀 그렇다. 니네들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건 모택동이니까 내가 쪽지를 보낼 터이니 그쪽으로 일단 가봐라.  
암튼 그래서 김일성이와 박헌영이가 1950년 5월 13일 저녁에 모택동에 한데 다시 갑니다.

그 때 이미 스탈린한테 쪽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땐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국도 러시아 눈치를 볼 때인데, 김일성,박헌영이 5월 13일날 모택동 만나서 지원에 대한 확답을 받습니다.
그 후, 5월 1일 날 귀국해서 바로 조선인민군을 7 사단으로 개편합니다. 
근데 또 아셔야 할 것이, 1948 년 2월부터 1950 년 3 월까지... 아까 제가 말한 중국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이 차례로 조선(지금의 북한)으로 들어옵니다. 
이 수가 자그마치 10만명 입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사람들, 6.25 발발 후, 서울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온 사람은 사실 북한 인민군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사실 항일운동과 중국내전을 통해 그 역량을 갈고 닦았던 조선의용군 10만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침은 확실하죠. 
그러나 남침이라는 말 하나로 6.25를 다 설명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남침을 유도한 남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고 원흉은 일본 놈들이고 그 다음은 미국 놈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남침, 북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와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이 조선반도에서 행해진 악랄한 죄악입니다. 
이러한 비극 속에, 북한 남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게 정말 피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본토도 아닌 저 중국 대륙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같이 싸우던 우리 독립혁명동지들이, 중국 남부에서 활약하던 광복군들은 우리 남한으로 들어와 국군이 되고, 화북에서 팔로군과 같이 일본과 싸우던 조선의용군들은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이 되어서, 
중국이 아닌 우리 해방된 본토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운 이 처참한 역사가 바로 이 빌어먹을 6.25 입니다. 
이 처참한 역사를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20 세기 우리의 찬란한 독립운동의 결말이 이 6.25 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모든 성과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6.25 이전의 역사를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독립운동에서 누가 어떠한 희생과 노력과 공을 세웠던 간에 그 역사의 도덕성이 우리에게 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다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도 참 못된 놈이고, 김일성도 오판을 해도 한참했고... 


여수, 순천 사건이 뭔가요? 
아까 말한 인민위원회가 다 궤멸이 됐는데, 이쪽 태백산부터 지리산 일대로는 전부 빨치산이 남아있었습니다. 
근데 가장 오래 버틴 곳이 어딘가요? 
제주도입니다. 
제주 4.3항쟁이 1948 년에 있었는데, 잘 이해가 안되시죠? 
이 당시 제주도에 있던 사람들이 사실 일제시대 때 일본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해방이 되니까 다 돌아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장 깨어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본에서 일하고 노동하고 교육받고 해서 그런지, 당시 제주도가 가장 깨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미군정의 지배가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인민위원회가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래서 4. 3항쟁 때 서북청년단을 보내서 사람들을 죽이고 6만 여명의 사람들을 육지로 보냈습니다. 
그 때 제주도에서 약 4만명의 사람들이 큐우슈우나 오오사카 등지로 도망도 갔는데, 이들이 지금도 재일동포 사회를 이루는 한 축 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제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14 연대한테 가라고 하니까 당시 좌익세력이었던 지창수, 김지회 등의 군인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동족상잔이냐 반란이냐? 
결국 이들은 반란을 택하죠. 
그래서 여수지역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때 부터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경찰들을 다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무튼 그러면서 결국 진압되고, 그 사건 이후 어마어마한 좌익세력들이 군대 내에 있다는 것을 이승만 정권이 알게되고  숙청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근데 군대 내의 좌익세력에 대한 정보 그걸 누가 불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당시 우리나라 군대 내에서 남로당의 중요한 지위를 가진 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1963 년 윤보선이랑 박정희가 붙을 때도 동아일보 호외(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 호외)에 여순사건 관련해서 무기징역 받는 것이 나갔죠. 
그래서 다음 날 박정희가 떨어 질 줄 알았는데, 이 역사가 또 웃긴 게 사람들이 오히려 박정희를 뽑아줍니다.
 
아무튼 박정희는 이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자기 신념을 팔아서 살아남습니다.
박정희에 대해 좀 이야기 하자면, 
일제시대 그 사람이 어딜 다녔죠? 대구 사범학교를 다녔습니다. 
사범학교에서 황국신민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박정희는 최소한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만, 조선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만주로 갔으면 장지락 저럼 독립군으로 간 것도 아니고, 일제의 만주 군관학교를 찾아간 놈이라면 좀 이상한 놈 아닙니까? 
또, 해방 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남로당에 들어왔으면 여순사건 책임지고 뒤지던가 해야지 자기 신념을 버리고 다 불어서 군 남로당 조직을 다 궤멸시기고, 그래 가지고 살아 남았고, 또 나중에 군사혁명을 일으켰죠. 

5.16 당시 미국은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또, 실제 북에서 김일성이 박상희(박정희의 형. 코뮤니스트) 동생이 박정희니까 친구 동생이니 내려가보자 해서 보낸 간첩이 누굽니까? 바로 황태성입니다. 
또 이 박상희의 딸이 누군가요? 바로 김종필씨의 아내입니다.
  
아무튼 끊임없이 자기배반을 하고 일본 군관학교 출신으로 말할 때 마다 일본군가가 튀어 나오고, 황국신민의 위대한 덕성을 찬양했던 사람. 이 사람을 아버지라고 받들고 국보위를 만들기 위해 광주 인민을 학살했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또 전두환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민족의 비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동학으로부터 광주 민중항쟁까지... 우리 역사가 근대사를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습니까? 
나는 말하기가 싫습니다. 
내가 여기서 정의를 말할 입장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역사에 대해 죄인이고 우리는 너무 뼈아픈 이런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민족은 너무도 뼈저리게 잘못된 역사를 살아왔고, 너무도 수탈당하는 역사를 살아왔고, 너무도 극한까지 짓밟혀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당할 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21 세기 우리 민중들에게는 희망만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끊임없이 바른 역사를 전함으로서 우리의 미래가 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를 전제적으로 포괄적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역사적 비전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 것으로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올 김용옥

출처 https://youtu.be/R8z4CUFT2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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