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유럽의 빈국이었으나 금융 산업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했던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의 은행들은 고금리 금융상품을 개발하여 해외 자금을 유치하고, 이를 다시 미국의 고금리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아이슬란드 은행들 역시 덩달아 파산 위기에 내몰린다. 당시 아이슬란드의 3대 은행이 진 부채는 무려 230조 원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명백한 국가 위기 상황. 아이슬란드 총리는 위기 극복 방안으로 국민들이 은행 채무를 분담해서 갚자는 주장을 펼친다. 은행(기업)을 살려야 나라가 살고 나라가 살아야 국민이 산다는 논리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고방식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미 IMF 외환위기 때 소위 ‘나라사랑 금모으기’라는 명목으로 국가와 기업의 잘못을 온 국민이 대신 수습하느라 분주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수긍은 커녕 총리의 이런 주장에 크게 분노한다. 은행이 진 빚을 왜 국민이 대신해서 갚아야 하냐는 게 분노의 주된 이유였다. 수많은 국민들이 의회를 향해 프라이팬과 냄비를 두드리고 헌 신발을 집어 던지며 시위에 나선다.
시위대와 정부의 극한 대치 속에서 시위대의 주장에 동조를 해 준 이는 다름 아닌 대통령. 대통령은 은행의 잘못을 국민이 대신 수습하는 것은 결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며 국민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 준다.
경영이 잘못되면 파산하는 게 기업인데 은행만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은행에 수익이 생기면 은행의 것이면서 잘못될 경우
왜 국민이 짐을 짊어져야 하는가?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 아이슬란드 대통령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
나아가 은행 빚을 갚으라는 주변 국가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이 사안을 국민투표에 부친다.
세금으로 은행의 빚을 갚아야 할까?
아니면,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투자를 할 것인가?
투표 결과 국민의 93퍼센트가 은행 빚을 갚는 방식이 아닌,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투자를 선택한다. 이때의 투자란 정확하게 말해 ‘국민에 대한 투자’로 의료복지 확대, 실업 수당 지급 기간 확대, 가계 부채 탕감 등의 ‘복지 확대 정책’. 금융위기 전보다 오히려 더 많은 예산을 복지에 쏟아 붓는다. 그러면서도 복지 확대를 위해 추가로 필요한 세금은 대부분 고소득층과 기업의 법인세로 충당하여 최대한 평범한 국민들이 은행을 비롯한 금융 산업의 주요 수혜자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 결과 국민들은 다시 소비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고, 그로 인해 기업들도 자연스레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는 다시 고용 확대로 이어져 복지가 국민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통념을 깨고 오히려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게 된다.
2013년 아이슬란드의 실업률은 유럽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4.9퍼센트, 마이너스였던 경제성장률은 2.8퍼센트. 흔히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긴축 재정, 속칭 ‘허리띠 졸라매기’와 정 반대 방식이라 할 수 있는 ‘복지 확대’가 경제 위기의 진정한 해법임을 아이슬란드는 결과로 증명을 해낸다.
그러자 ‘이단의 위기관리 프로그램’이라며 아이슬란드의 복지확대 정책을 비난하던 신용평가기관 ‘피치 레이팅스’는 2012년 아이슬란드에 대해 ‘투자하기 안전한 곳’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아이슬란드의 복지 예산 삭감을 강력하게 요구하던 IMF는 기존의 자신의 주장을 뒤엎는 매우 이례적인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놓는다.
견실한 재정은 정부 지출을 삭감하되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복지지출은 예외로 하며,고소득층에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하여 세수를 증대하는 식으로 이룰 수 있다.
한편 금융 위기 발생 및 관리 소홀의 혐의가 있던 은행가와 정치가 등 90여 명은 법원에 의해 기소되고, 은행의 빚을 국민이 분담해서 갚자고 주장하던 총리는 2012년 4월 같은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