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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농업정책
게시물ID : history_96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람바람
추천 : 6
조회수 : 54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6/01 14:30:11

일제때 대표적인 농업 정책으론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을 들수있죠.


우선 토지 조사사업을 살펴보면 1910년에서 1918년까지 10여년에 걸쳐 산지와 임야를 제외한 경지와 시가지에 대한 조사였죠. 그 이전에 숙종과 광무년간 양전사업이 있었으나 근대적 측량기술이 없었으며 근대법적 소유권인 등기제가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확립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토지소유권조사와 토지가격, 면적과 지목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소유권조사는 토지에 대한 하나의 소유권만을 인정하였으며 배타적인 자본주의적 사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죠. 


 하지만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부분소유권으로서의 도지권은 아무 보상 없이 토지소유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궁장토·역둔토·목장토등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등이 총독부 소유화했죠.


 일본이 왜 토지조사사업을 했냐고 하면 민지정책 수행에 필요한 기본 인프라작업을 위한 국토조사였으며 지세수입을 증가시키고 안정적으로 거두기 위한 것이죠. 1910년 600여만엔이었던 지세수입이 1918년 1157여만엔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죠. 이처럼 총독부의 수입은 늘어났지만 일반 농민의 세부담은 그만큼 가중되었죠. 또한 토지조사 사업을 계기로 소유권이 안정되면서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이는 일본자본에 의한 조선농업의 지배화를 가져왔죠. 또한 토지의 상품화가 진행되어 방대한 토지가 조선총독부 및 동양척식회사, 일본인 개인지주에게 넘어갔고 이에 지주의 수는 유지되는 반면 자작농과 자소작농 수가 줄고 소작농의 수가 늘게되며 이것은 지주와 소작의 양극화가 일어나 지주에게 토지가 집중이 되며 자작농 및 자소작농의 소작농화를 가져온 정책이었죠.


이어서 산미증식계획은 192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식민지 농업정책을 실시했죠. 이는 독점자본주의로 인한 일본의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 본토의 쌀 공급기지로 만드는 것이었죠. 당시 일본은 독점자본주의 성장을 위해서는 저임금정책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위해서는 저미가가 유지되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식략확보가 우선되어야 했죠. 이를 해결하기위해 조선에서 쌀 증산을 강행하여 안정된 공급로를 확보하여 일본에서의 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죠.


 산미증산 계획은 전체 계획기간을 30년으로 하여 관개를 개선하고 개관 및 밭을 논으로 바꾸어 총 80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하는것이었으나 계획의 절반정도 개량하는 선에서 그쳤죠. 이유는 공황기의 미가 하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 악화, 정부 알선자금의 급격한 감소였가 원인이었죠. 또한 농업공황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여 조선 쌀의 수출이 일본의 농촌경제를 악화시키자 일본 농민의 반발에 부딪혀 계속 진행되지 못했죠. 


 본질적인 원인은 토지개량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지만 이 자금조달이 쉽지 않았으며 지주입장에서도 토지개량·개간보다 토지매입으로 인한 이익이 안정적이었죠. 또 하나의 원인은 수리사업 중심의 대규모 사업에 치중되어 농민 자신에 의한 소규모 토지개량에 대한 지원은 없었으며 수리조합은 일부 대지주에게 이익을 줬으며 일반 농민 및 소작농에게는 조합비와 조합비로 인한 소작료의 증가로 인해 손해를 입혀 수리조합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1934년에 산미증식계획은 중지되었죠.


 분명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증산이 이루어진것은 부정할수없는 사실이죠. 1920년 1270만섬이었던 쌀생산량이 1928년 1730만섬으로 증가했으니 말이죠. 하지만 쌀 생산량 증가비율 보다 수출비율이 급격히 늘어남으로써 일본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 반면 조선농민들의 쌀 소비량은 감소되어 절대식량부족 상태에서 수출한 기아수출 형태가 되었죠. 1920년 175만섬이 수출되었으나 1928년 740만섬이 수출되었죠. 또한 당시 1인당 쌀 소비량을 보면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1920년 1인당 0.63섬에서 1930년 0.45섬이 되었죠. 또한 수리조합을 통해 일본인의 토지겸병이 촉진되어 지주의 수가 늘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가 급증이 있었고 이에 반해 조선인 토지 소유자 및 소유지는 줄어들어 일본지주의 토지집중현상이 극심하게 진행되었죠. 조선의 농업이 쌀농사에 특화된 미단작 농업화 되어 조선 농업의 기형화를 가져오게 되었죠.


 이처럼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이어지는 식민 농업정책으로 조선의 농업은 몰락하게 되었죠. 당시 1926년 세궁민(생계불가)은 총인구의 11%인 215만명, 걸인은 1만명 정도였으나 1931년 520만명으로 총인구의 25%가 세궁민이 되었고 걸인의 수는 16만명이 되었죠.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일본, 만주, 시베리아등지에서 위험한 광산이나 철도공사등으로 흘러들어갔죠. 




1줄요약

일본이 조선인들의 입에 풀칠을 하게 해줬다는 개소리는(모대통령 경제발전이랑 이상하게 비슷하네;;) 혼자 변기통 보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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