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건 비전문인이 쓸 글이라서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발견될 경우 댓글로 피드백을 바랍니다.
2. 바둑 재미있어요. 첫 관문만 넘으면 이것보다 재미있는 게임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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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현대 바둑의 시초
오청원
<오청원. 우칭위엔이라고도 한다. 왼쪽의 근엄한 노인.>
문학이든 역사든 과학이든 어느 시점이 현대라고 콕 찝어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듯이 바둑에도 어느 시점을 현대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현대 바둑의 시발점이 된 것은 오청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청원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10번기입니다.
<구리 (왼) VS 이세돌 (오른)의 10번기 사진>
가장 최근에 일어난 10번기입니다. 세계 바둑인들의 관심을 집중 시켰죠. 보통 결승전은 3번기 또는 5번기. 전통 바둑을 고수하고 있는 일본에 가서야 8번기를 가끔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10번기는 한 마디로 말하면 "내 전력을 다 할테니 누가 위인지 붙어보자.' 입니다.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의 보상은 승자 상금 독식제입니다. 즉 이기면 한국돈 9억 정도를 받고, 지면 경비 정도인 3000만원 입니다. 그러나 오청원 시대의 10번기는 다릅니다. 지는 순간 상대를 상수로 인정하고 진만큼 칫수를 고칩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당시 바둑계에선 이것보다 치욕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오청원과 첫 10번기를 둔 기타니 미노루는 10번기의 압박감을 버티지 못 하고, 코피를 흘리고 말았고, 결국 오청원에게 지고 맙니다.
그 후 오청원은 여러 강호들을 10번기로 누르면서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피부에 와닿지 않은 분들은 쉽게 말해서 당시 오청원의 포스는 이창호보다 더한 포스가 느껴진다고 생각하세요.
사실 오청원이 남긴 업적은 10번기의 승리뿐 만이 아닙니다. 바로 기타니 미노루랑 같이 구상한 신포석입니다.
오청원 전까지의 포석은 소목을 중시하는 실리 위주의 포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청원과 기타니는 삼삼, 화점 등 소목에서 벗어나려는 포석을 연구 했으며 이 중에서 중앙과 세력을 중시하는 발상은 현대 바둑의 초석이 됐습니다.
<슈사쿠류>
위의 기보는 바둑 두는 사람이라면 한번 즈음을 볼 법한 슈사쿠류입니다. 7번 수는 고스트바둑왕을 보신 분이라면 초반에 봤을 법한 수인데요. 후지와라노 사이가 초반에 즐겨두던 수입니다. 아키라와 사이의 첫 대국도 7번 수를 보고 오래된 정석에 놀라는게 보이죠. 하지만 7번의 마늘모는 현대에선 조금 느슨한 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키라와 사이의 두번째 대국도 ' 마늘모는 느긋하겠지. 각박하게 협공으로 둘까?' 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덤이 없던 당시엔 무척이나 강력한 수였습니다. 지금도 못 둘 이유는 없고요.
1,3,5 번 수처럼 소목에 연달아 두는 수는 오청원 이전의 바둑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진 수입니다. 안 둔다고 규칙 위반은 아니지만 현재 '첫 수는 우상귀에 착수해야한다' 처럼 일종의 예의처럼 굳어졌죠.
오청원은 이런 포석에서 탈피하고자, 그 시작을 알리듯이 혼인보 슈사이와의 대국에서 첫 수를 천원에 두는 (정가운데에) 패기를 보여줍니다. 참고로 혼인보는 지금은 일본의 타이틀 명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엔 바둑 가문이었습니다. 바둑계에선 황실이라고 할 수 있죠. ]
기타니 미노루
<기타니 미노루>
오청원을 이야기 할 때 간간히 나온 분인데요. 이 분은 오청원과의 10번기에서 패배를 한 후, 제자 육성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길러내신 제자가, 들으면 억소리 납니다.
조치훈: 일본 바둑 대삼관을 이뤄낸 일본 바둑의 전설
고바야시 고이치: 조치훈의 라이벌. 그리고 현재에도 많이 쓰이는 고바야시류의 창시자
가토 마사오: 대마 킬러로 유명한 기사
오오다케 히데오: 바둑을 아름답게 두는 것으로 유명한 기사
다케미야 마사키: 우주류. 조훈현에게 상대 전적으로 앞선 몇 안 되는 기사.
기타 등등...
그야말로 일본 바둑을 휩쓴 기사들이었습니다. 조훈현도 사실 기타니 문하로 들어가려다, 세고에가 지도기를 뒀더니 조훈현의 재능이 너무 맘에 들어 낚았습니다.
조남철
<한국 현대 바둑의 아버지 조남철>
한국은 바둑의 불모지였습니다. 척박한 땅에 아무리 씨앗을 뿌려봤자 씨앗이 자라날리 없죠. 그래서 조금이라도 땅을 갈아줘야 합니다. 그 땅을 간 역활을 해준 분이 조남철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바둑인 순장바둑>
우리나라의 바둑은 일본, 중국과 달리 미리 포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조남철은 기타니 미노루에게 일본 바둑을 배워와, 한국에 중국, 일본 바둑을 전파했습니다. 순장 바둑이 아닌 우리나라의 첫 기보는 바로 조남철의 기보입니다.
이 분의 바둑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6.25가 터졌을 때, 생필품 대신 바둑 기보를 들고 피난을 했습니다.
후에 바둑 황제가 되는 조훈현을 일본으로 유학시켜준 것도 이 분이며, 조카인 조훈현을 일본에서 유학시켜준 것도 이 분입니다. 여러번 강조하지만 이 분은 한국에 현대 바둑의 초석을 세운 분입니다.
2세대: 바둑 삼국지
조훈현
<바둑황제 조훈현>
솔직히 이름만으로 설명 다 했네요.
9살에 프로 입단을 했습니다. 이 기록은 세계 바둑계에서 최연소입니다. (그 이창호도 12살에 입단). 후에 조남철 눈에 띄어서 일본으로 갔습니다. 처음엔 기타니 미노루 문하로 들어가려 했으나, 세고에가 조훈현이 탐나 꿍쳐갔습니다. 기타니가 오래 살아서 조훈현의 활약을 봤으면 벌쩍 뛰었을 겁니다.
세고에의 조훈현 사랑은 엄청나, 조훈현이 군대에 가게 됐을 때 자살을 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조금 논란이 있습니다) 어쨌든 조훈현은 군대를 다녀왔고, 거기에서 기른 체력을 바탕으로 전관왕을 달성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뺐은게 서봉수의 명인 타이틀이라서 서봉수와 조훈현의 라이벌 구도는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한국 바둑은 조훈현 이전에는 완전 불모지였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선 완전히 개무시를 당합니다. 특히 일본에 가서 활동하게 됐을 땐, 일본은 "한국 9단은 솔까 쓸모 없다. 우리나라 라이센스를 다시 받아라" 해서 결국 2단으로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개무시는 응씨배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응씨배의 창시자, 응창기>
원래 응씨배가 최초의 세계 바둑 대회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일본이 그 꼴을 못 보고, 후지쯔배를 먼저 만들었죠. 하지만 대회의 완성도는 당연 응씨배가 앞섰습니다. 결국 응씨배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릴만큼 위상있는 대회가 됐습니다. (4년마다 열림)
사실 응씨배는 후술할 녜웨이핑을 위한 대회입니다. 응창기는 엄청난 녜웨이핑 빠돌이였고, 그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해 응씨배를 계획하게 된거죠. 그렇기에 응씨배의 일부 일정은 녜웨이핑 사정에 따라 바뀌기도 했습니다.
응씨배는 각 국가마다 시드를 줍니다. 일본 6명, 중국 4명을 줬는데 한국은 단 하나의 시드를 받았습니다. 그 하나의 시드마저 조치훈을 위한 시드였습니다. 한국이 반발하자 예비 시드를 받았는데 솔까 누가 이 큰 대회에 기권하겠습니까. 예비 시드를 서봉수가 받긴 했지만 결국 한국 대표로 참가한 것은 조훈현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당시 세계 바둑이 얼마나 한국 바둑을 무시 했는지 알려주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불모지 한국에서 온 조훈현이 일본, 중국 기사를 차례차례 꺾더니 녜웨이핑과 만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5국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승자는 조훈현이 됐습니다. 즉 녜웨이핑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가 결국 조훈현의 위대함을 알린 대회가 됐습니다. 5국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미생'의 기보가 됐습니다.
조훈현은 후에 국가로 돌아와서 카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바둑인으로써 카퍼레이드를 한건 조훈현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녜웨이핑은 조훈현에 배알이 꼴렸는지 "나에겐 무서운 제자"가 있다며 말했는데. 이 둘은 마샤오춘하고 창하오 입니다. 문제는 조훈현에게도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창호.
조훈현의 주무기는 빠른 행마였습니다. 가볍게 행마를 하면서 바둑판을 누볐습니다.
조치훈
<조치훈. 개그맨 아니다>
조훈현이 한국 바둑을 휩쓸었다면 조치훈은 일본 바둑을 휩쓸었습니다. 조훈현이 먼저 조남철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가자, 조치훈도 6살이란 나이에 조남철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갑니다. 그리고 기타니 미노루의 문하로 들어갑니다.
이세돌이 한 때 엄청난 입담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린 적 있지만 사실 옛날 사람들 중에 입담 강한 사람 많았습니다. 조치훈도 그 중 한 명이었죠. 문제는 이 분 대국 중에도 시끄럽습니다.
<후지사와 슈코>
일례로 후지사와 슈코와의 대국이 있습니다. 슈코는 다른 대국은 성적이 저조했지만 기성전에서만은 절대적으로 타이틀을 사수해서, 명예 기성이라는 수식어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온 기사가 바로 조치훈이었습니다.
조치훈이 인터뷰에서 "슈코 선생님의 기성이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슈코는 조치훈과의 대국을 앞두고 늘 그랬듯이 "4번만 알려주겠다." 라고 했습니다. 즉 4전 전승을 하겠다이죠. 그런데 패기의 조치훈은 "3판만 배우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첫 3국은 슈코의 승리였습니다. 이대로 조치훈이 힘없이 무너지는가 했더니, 조치훈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4판을 연달아 조치훈이 이겼습니다. 이건 훗날 이창호의 농심배 5연승과 같은 충격의 대역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치훈은 슈코한테 승리함으로서 최초의 대삼관을 이루게 됩니다.
조치훈의 대단함점은 실력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바둑을 목숨 걸고 둔다 라는 말은 그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휠체어 대국. 왼쪽은 고바야시 고이치. 오른쪽은 조치훈.>
바둑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사건입니다.
훗날 기성전에 고바야시 고이치가 도전해옵니다. 고바야시는 조치훈의 라이벌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사였기에 세간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조치훈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오른손과 머리만 무사한 대사고였습니다. 전치 3개월이었죠. 일본 타이틀전은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타이틀에 참가 안 하면 그대로 패배였기 때문에 조치훈이 참가를 안 하면 조치훈의 패배가 되게 됩니다.
참가 의사를 밝히는 조치훈에게 의사는 말렸습니다. 그러나 조치훈의 발언은 너무나도 확고했죠. "저의 오른손과 머리가 무사하면 된겁니다."
그렇게 조치훈은 대국장에 휠체어를 타고 왔습니다. 결국 7번기 승부에서 조치훈은 2번 이겼고, 고바야시가 4번 이김으로서, 기성 타이틀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들 관심은 고바야시에게 없었고, 휠체어를 끌어와 대국한 조치훈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기풍을 말하자면 위의 일례와 일맥상통하듯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얼마만큼 시간이나 노력이 들어도 결국엔 최선의 수를 찾아냈죠. 특히 상대의 세력에 깊게 침투해서 살 수 없을 거 같은 돌도 결국 살려내는게 매우 인상 깊어서 '폭파전문가'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녜웨이핑
<녜웨이핑. 한국에선 섭위평이라고도 한다>
이 사람이 중국 바둑계에서 갖는 위상은 한마디로 마오쩌둥
기풍은 매우 중국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텁게 그리고 호방하게 두죠.
지금의 위상과는 반대로 젊었을 적엔 매우 처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놈의 문화대혁명 때문이었죠. 바둑을 한낱 잡기로 밖에 치부하지 않았던 중국 정부는 녜웨이핑을 돼지 도살장에 가두어 강제로 일을 시킵니다. 그 생활은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같이 끝났습니다.
상술했듯이 당시 한국 바둑은 그야말로 3류 취급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실질적 세계 대회 취급 받던 것은 한 일 대항전이었습니다. 녜웨이핑은 마지막 주자로 나가 전승을 해, 중국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자존심 강한 일본 중 세 명이 남아 녜웨이핑에게 한 명이라도 못 이기면 삭발을 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녜웨이핑이 전부 이기고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고바야시 고이치였고, 고바야시는 바로 조치훈과의 휠체어 대국을 치루게 됩니다. 그래서 위의 휠체어 대국 사진을 보면 고바야시가 머리를 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녜웨이핑은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감명깊게 본 응창기는 녜웨이핑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응씨배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녜웨이핑을 참가시키죠. 하지만 그 대회의 우승자는 조훈현이었고, 녜웨이핑은 점점 하향세를 걷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조훈현에게 진 건 배알이 꼴렸는지 자신에게 엄청난 제자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샤오춘과 창하오입니다. 물론 둘 다 엄청난 정상급 기사인 건 확실합니다. 다만 시대를 잘못 만났을 뿐... 이창호 시대...
다케미야 마사키
<다케미야 마사키. 자라나라 머리머리!>
바둑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실 분입니다. 뭔 대회를 많이 우승해서 유명하다기 보다는 그 특유의 기풍으로 유명합니다.
<흑: 다케미야 마사키, 백: 창하오>
우주류
대세력작전으로서 위의 기보에서 검은 동그라미 친 곳이 큰 집으로 나게 이끄는 바둑입니다. 다만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바둑이기에 저 곳에 침투한 돌은 쉽게 살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공격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은 당연합니다. 다케미야 마사키는 그 어려운 우주류를 구사하는데에도 승률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 조훈현에게 상대전적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는 몇 안되는 기사입니다.
<정석>
위의 저 두 정석은 린하이펑 VS 다케미야에서 공식적으로는 처음 나온 정석입니다. 19번 수는 지금도 잘 안 쓰이지만 우상의 정석은 지금도 많이 쓰이는 정석입니다.
그리고 첫 세계대회 우승자입니다. 원래 응씨배가 처음 세계 대회로 열릴 예정이었지만 일본이 부랴부랴 후지쯔배를 만들고 다케미야도 참가하게 됩니다. 이때 다케미야 왈: 첫 세계대회에선 내가 우승하는게 자연스러움ㅋ
3세대: 절대강자
이창호
<최택. 최강의 기사>
뻥이고요...
<이창호. 최강의 기사>
이름 하나만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솔직히 3세대는 이창호 외에 할 말 있는지?
우승 경력을 여기에 적기엔 스크롤이 엄청나게 길어지기에 안 적겠습니다.
돌부처, 신산. 그를 지칭하는 별명들은 그의 뛰어난 계산능력과 절대 바뀌지 않는 표정을 두고 붙혀진 별명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연구들은 초반, 중반에 관한 연구가 주였습니다. 끝내기는 거의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창호는 이러한 연구 방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최강의 형세판단과 끝내기로 세계를 재패했습니다.
이창호 이전에는 반집 차이이면 운을 탓했습니다. 하지만 이창호 이후엔 반집 차이이면 그것도 실력입니다. 이창호는 미세한 차이라도 결국엔 숨겨진 반집을 찾아내 결국 반집을 이기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덕분에 기사들은 이창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고 그와 더불어 끝내기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현대 포석을 연 자가 오청원이라면 현재 끝내기를 연 자는 이창호입니다.
초보분들이 처음 이창호의 기보를 볼 때엔 생각보다 약해보인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왜인지 느려보이고 비효율적으로 중복돼 보이거든요. 대마를 잡는 대국도 별로 없고요. 하지만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창호가 초반을 느리게 행마를 하는 이유는 굳이 초반에 우세를 잡지 않아도 끝내기에서 따라잡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라고 보는게 옳습니다. 즉 초반에 잡은 두터움으로 계속해서 한집씩 이득을 보면서 어느 순간 반집 차이로 승리하는 거죠.
이러한 생각은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조훈현: 창호야, 왜 다 잡은 대마도 안 잡냐.
이창호: 대마를 잡기 위해 준동했는데 운이 나빠 실패하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마를 잡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한집씩 대가를 치르게 하면 대마를 잡지 않더라도 결국엔 반집이라도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창호는 매우 어린 나이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대마를 잡는 걸 매우 좋아하죠.
그렇지만 세월을 못 이겨서 슬슬 하락세를 걷던 중에 바둑계에서 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상하이 대첩>
그냥 동영상을 보는게 더 빠르겠군요. 귀찮아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상하이 대첩은 역시 이창호는 이창호다 라는 말이 나오게한 대 사건이었습니다.
루이나이웨이
<루이나이웨이. 반상 위의 철녀>
3세대의 바둑 최강자가 이창호였다면 여류 바둑 최강자는 루이나이웨이였습니다. 그의 남편은 장주주였는데 장주주가 천안문 사태에 휩쓸려, 부부는 한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 과정 전엔 녜웨이핑의 꼬장이 좀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망명한 그녀는 첫 프로대국을 제 2회 응씨배에서 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중국 기사들이 참가를 불사했는데 한가지 대이변이 일어납니다. 바로 루이나이웨이가 이창호 9단을 꺾은 거죠. 비록 4강에서 루이는 졌지만 이창호를 이겼다 하나만으로 충분히 루이에 대한 관심은 많아졌습니다.
참고로 2회 응씨배에서 우승한 사람은 한국의 서봉수 9단입니다.
그 후 미국 등을 망명하다가, 한국 기원이 그녀를 거뒀습니다. 당시에도 여류기사 사이에선 루이나이웨이는 독보적이었기 혹여나 여류기사들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까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루이나이웨이는 여자 기사로서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웁니다.
바로 국수전에서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창호를 꺾고, 타이틀 전에서 조훈현을 이겨서 국수가 됩니다.
이 이후에 루이나이웨이는 여류 기사로서는 독보적인 위치로 올라서게 됩니다. 아직까지 여류 기사 중에선 그녀만큼의 위상을 가진 기사는 없습니다.
이후에 중국 기원으로 다시 가기 하는데 솔까 중국 기원이 얼굴에 철판 깔았죠.
그녀의 기풍은 끝까지 공격하는 기풍입니다. 끝까지 공격하다라는 개념은 최철한과 비슷한데, 최철한은 계속 후드려 패는 느낌이라면 루이는 물고 늘어지는 느낌입니다. 당시엔 이런 기풍은 드물어서, 이창호와 조훈현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했죠. 덕분에 마녀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본인은 이걸 싫어해서 철녀라는 별명으로 바뀌었습니다.
4세대: 포스트 이창호
이세돌
<이세돌. 이창호 이후의 최고의 기사>
포스트 이창호에 가장 목숨건 기사입니다. 가장 이창호에게 근접한 기사이고요.
95년에 입단한 이세돌은 2000년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2000년 제8회 배달왕전에서 세계 최강의 공격수 유창혁을 꺾음으로서 첫 타이틀을 땄습니다. 또한 재미있게도 그의 세계 대회 첫 우승도 제 15회 후지쯔배에서 유창혁을 꺾어서 얻은 거였죠.
그는 행동 하나하나가 파격적이었습니다. 거친 언동은 많은 안티를 낳았고, 특유의 공격적인 바둑은 많은 팬을 사로 잡았습니다. 한마디로 싫어하는 사람인 엄청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엄청 좋아합니다.
거친 언동과 똑같이 그의 기풍은 매우 공격적입니다. 선실리 후타개형 기풍인데 이창호랑 정반대의 선실리 후타개의 기풍입니다. 이창호의 타개는 두터움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세돌의 타개는 옅어진 돌을 방어를 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돌을 엮어 공격을 해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스타일입니다. 즉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라는 말이 어울리죠. 이 과정에서 상대가 당황을 하고 실수가 생기기 때문에 프로들 사이에서 "이세돌은 마법을 부린다" 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거기에 묘수가 엄청나게 터트린 기사였기 때문에 그의 바둑은 아마추어를 매료시키기엔 충분했습니다.
그의 행보도 파격적이었습니다. 2000년에 32연승을 하며 엄청난 기록을 세웠지만 2003년까지 그는 3단이었습니다. 3단 신분으로 그전까지 딴 타이틀이 8개였죠. 그 전까지 승단 시험은 엄청나게 힘든 과정이어서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이세돌처럼 배째라 무시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결국 한국 기원은 한가지 규칙을 걸게 됩니다. 세계 대회 우승은 3단 승단, 준우승은 1단 승단.
이세돌은 우승 2번, 준우승 1번을 해서 5개월만에 9단을 달아버립니다. 첫번째 우승은 이창호와의 대국이었고요. (제 7회 LG배 세계기왕전)
이세돌은 이창호 타도에 엄청 열심히였습니다. 때는 일찍 왔습니다. 바로 세계 대회인 제 5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둘이 만났습니다. 꽤 흥미진진한 대국이었지만 모두 이창호의 우승을 점쳤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세돌의 2연승이었습니다.
마지막 대국이 될 수 있는 3국은 한 달 후에 벌어졌습니다. 이세돌 본인의 말로는 '이때 무조건 이길 수 있을 줄 알고 너무 방심했다' 라고 회고했습니다. 결국 3국에서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한 뒤에 마음을 추수리지도 못 하고, 이세돌은 이창호에게 3:2로 지고 맙니다.
이세돌은 이 때를 회고하며 "뼈 아팠지만 앞으로 내가 방심을 하지 않게 되는데엔 좋은 약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기회는 찾아왔습니다.
제 7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에서 이세돌과 이창호가 만났습니다. 더 강해져서 돌아온 이세돌 대 최강 기사 이창호. 이목을 집중 시키는데엔 더할 나위 없었죠. 그리고 이세돌은 3:1로 이창호를 이겼습니다.
그 후 이세돌은 이견이 없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기사로 도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세돌과 한국 기원 사이엔 여러 앙금이 있었습니다. 가장 크게 불거진 것은 기보저작권 사태였습니다. 한마디로 기보 저작권과 그 수익을 한국 기원이 가지겠다고 하자, 이세돌이 선두로 나서서 반발한 사태였습니다. 결국 이 앙금이 계속 쌓여서 결국 이세돌은 휴직했습니다. 말이 휴직이지 까닥하다간 대 기사가 은퇴할 수도 있는 대사건이었습니다.
후에 이세돌은 자신의 명국선 작업을 하면서 은퇴를 진심으로 고심하다가 아내의 설득으로 한국 기원과의 앙금을 청산하고 복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첫 세계 대회에서 (제 2회 BC 카드배) 구리와의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 합니다.
이후엔 세월을 이길 수 없어서 조금 주춤하지만 아직도 한국 랭킹 2위 근처에서 노는 모습을 보여, 여전히 한국 최강 기사입니다. 제 개인적 감상으로는 아직도 실력이 늘고 있는 거 같네요.
이세돌하면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기사가 있습니다.
<구리. Cu 아님. 이세돌의 라이벌>
이세돌의 라이벌로 손꼽히는 중국기사입니다. 중국 기사치고는 성격도 매우 좋아서 이세돌은 싫어도 구리는 좋다라고 하는 한국 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말하길 어렷을 대엔 꽤 양아치 같은 성격이었는데 아버지가 죽고나니 열심히 하게 됐다더군요. 아버지 생전에 타이틀 하나 못 딴게 너무 한이 되서, 세계 대회 첫 우승 했을 때, 아버지 무덤에 가서 그 기보를 태웠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더 열심히 해서 타이틀을 딴 건 이세돌도 비슷합니다)
이세돌과는 태어날 때부터 상극이었습니다. 둘 다 1983년 생에 구리의 생일은 2월 3일. 이세돌의 생일은 3월 2일. 태생부터 라이벌이 될 운명이었던 거죠.
기풍마저 닮았습니다. 둘 다 전투형 기사죠. 다만 이세돌은 포석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포석에서 밀린 걸 중, 후반에서 역전 시키는 기사라면 구리는 끝내기에 약하지만 세계 최강의 포석을 자랑했습니다.
둘의 첫 대국은 2004 중국갑조리그 9라운드 였습니다. 당시 이세돌은 이기면 돈 많이 받고, 지면 0원이라는 패기의 계약을 했지만 연패하는 상황이었고, 구리는 승승장구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이세돌은 9단, 구리는 7단) 이세돌은 라이벌이라는 걸 직감했는지, 아니면 갑조리그 연패한게 부담스러웠는지 구리와의 첫 대국부터 무리수를 남발했지만 결국 결과는 구리의 압승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자신이 본 수가 안된다는 걸 깨닫자, 머리를 두들기며 "아!" 라고 소리친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후 둘이 다시 만나게 된건 5개월 후였습니다. 제 9회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 결승에 올라온 건 왕시였지만 구리보다는 아래라고 평가됐습니다. 실질적인 결승전은 구리 VS 이세돌이었던 거죠. 거기에 당시 준결승에 올라온 기사 중 3명은 중국기사. 오직 이세돌만이 한국 기사였습니다. 당연히 구리가 이겨서 중국의 우승을 확정지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겠죠.
1국은 이세돌의 승리. 이세돌이 안전한 길보단 최강의 길을 선택함으로서 이긴 명국이었습니다.
2국은 구리의 승리. 무력하게 졌죠.
3국은 결국 이세돌의 불계승이었습니다.
그 후 둘은 많은 대국을 벌였는데 그러다가 구리의 슬럼프가 온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위에 언급한 이세돌이 휴직한 시기 구리 왈: 이세돌이 없으니 내 목표도 없어진 거 같더라.
그 후 이세돌이 복귀하자, 구리의 성적도 같이 올라갑니다. 복귀 후 처음 맞붙은 BC 카드배 결승에선 이세돌의 승리, LG배 결승에선 구리의 승리. 2012 삼성화재배 32강에선 세계최초 3패빅으로 무승부가 났다가, 재대결에선 구리가 승리합니다. 그러다가 끈질긴 인연으로 그 대회 결승에서 또 만나게 되죠. (더블 일루미네이션 형식이라서, 이세돌은 32강전에서 장쉬를 꺾고 본선에 올라갑니다)
1국은 이세돌의 역전 반집승.
2국은 구리의 불계승
3국은 이세돌의 역전 반집승.
즉 두번의 대국이 역전, 그것도 반 집승으로 갈리게 된 거죠. 이걸 본 몽백합배 스폰서인 니장건 회장이 '비록 결과는 이세돌이 이겼지만 내용면에서는 구리가 앞섰다.' 라고 말하면서 10번기의 스폰서를 자처했습니다.
이로서 세기의 대결이 성사됩니다.
<세기의 대결, 이세돌 VS 구리 10번기>
바로 50년만에 부활한 10번기입니다. 상급도 어마어마하죠. 이긴 자에겐 9억원. 진 자에겐 3000만원. 승자 독식제였습니다.
1,2국은 이세돌의 연승이었습니다. 그러나 4,5국에서 구리가 연승하더니 결국엔 5,6,7,8 국을 이세돌이 연달아 승리하면서 결국 10번기는 이세돌의 우승으로 끝납니다.
마지막 대국인 8국에서 이미 이세돌이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끝내기에서 주춤한게 보여지는데 이세돌이 말하길 "10번기가 이걸로 끝난다고 생각하니 허무했다" 라고 했습니다.
5세대: 또 다른 춘추전국시대
박정환
<박정환. 현 한국 랭킹 1위. 둥글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장신이다>
쎄긴 쎈데... 진짜 강한데 뭔가 2%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 기사입니다. 물론 현재엔 기사들의 기량이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도 있지만 정작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매번 죽쉈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수읽기를 매우 정확하게 하는 기사입니다. 딱히 강점도 없지만 약점도 없어서 올라운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제
<커제. 정성룡이 축구를 때려치우고 바둑 뒀더니 세계 최강이 됐다카더라>
얼마 전 이목을 끈 제 2회 몽백합배 결승전에서 이세돌을 3:2로 꺾은 기사입니다. 현 중국 랭킹 1위로서 2015년 세계 대회 3관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기풍은 두터운 이세돌
특히 백번으로는 너무 잘 둬서 2015년 동안 백번으로 한번도 안 지다가 12월 30일에 제 2회 몽백합배 결승전 1국에서 이세돌에게 백번으로 졌습니다. (사실 덤 6.5집에선 신진서에게 백번으로 진 적 있지만 중국에서 공식기전 아니라서 우겼습니다. 그래도 덤 7.5집의 백번 커제에게 이긴건 이세돌이 유일) (2015년 세계 대회에서 유일하게 탈락한 대회가 LG배. 8강전에서 강동윤을 만나서 떨어졌다. 그 후 강동윤은 4강전 중국랭킹 2위 스웨와의 대역전승을 거둔 후에, 박영훈과의 결승전에서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그 전까지 도저히 약점이 안 보였다가 이세돌과의 결승전에서 드러난 약점이 있습니다. 의외로 복잡하게 이끌면 약하다는 약점이죠. 이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가 향후 그의 성적이 달라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