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학이 지성을 위한 장소에서 회사원들을 양성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머리가 확 깨이는 느낌에 학습 욕구를 가득 불러일으키는 글이라 끝까지 읽는 걸 추천합니다.
요약하자면
정답이 없는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정답만 외워 시험을 패스하는 주입식 교육으로는 지성인으로서 길러질 수 없다.
대학은 대학생들이 교양을 고루 익히는 장소여야 한다.
원래 직접교육은 지금 우리가 대학원이라 부르는 곳에서 실시해왔다.
그것이 로스쿨, 메디컬스쿨 같이 대학원에 스쿨이 붙는 이유.
대학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지식의 몇 배나 되는 양을 스스로 학습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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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hin Young Jun님의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youngjun.shin.121/posts/868317193206467?fref=nf&pnref=story
책벌레 그룹에 발췌록을 올렸습니다. 그냥 필요한 분 몇 분 읽을 줄 알았는데 엄청난 반응이네요. 비공개 그룹이다보니 공유가 안되서 다시 포스팅 해드립니다. 다시 읽어도 휼륭하네요~
*다음 발췌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입니다 ^^
학습법을 연구했으니 인생사는 법을 배워봐야 겠죠?^^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다치바나 다카시-
여기에서의 ‘바보’라는 표현은 기본적인 지적 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콩도르세가 교육의 목적에 관해 설명한 대로,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라는 관점에서(그런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볼 때의 바보이다.
지금 일본은, 경제 정책 실패에 의해 제 2의 패전이라고 불리는 국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이 패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고, 그것을 초래한 국가 시스템의 결함을 시정하지 않으면 현재의 패전 상태에서 부활하기는커녕 제 3의 패전, 제 4의 패전을 맛보게 될 것이다. 패전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교육 시스템의 결함이 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선두 그룹을 따라잡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시대에는 일본도 나름대로 건투했지만, 선두주자로서의 자리를 경합하는 선두 그룹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일본은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고 뒤로 처지는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기본적으로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또 그런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노우 자신은 문과계열의 교양과 이과계열의 교양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문과계열 지식인 집단의 초대를 받아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과학과 과학자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 데 화가 나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중에 열역학 제 2법칙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그러자 강연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물론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노우는 방금 질문한 내용이 문과계열 사람들에게,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것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비슷할 정도로 이과계열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과계열 사람들에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비슷한 정도로 당연한 내용을 문과계열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현명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해 석기 시대 사람들 정도의 통찰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대학이, 학생들이 입학하면 1,2학년 동안 교양학부에서 폭 넓은 학문을 공부한 다음에 각 전문 과정으로 진학하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대학에서 입학시험 자체가 처음부터 전문학과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거처럼 전기와 후기가 처음부터 전문학과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거처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교육을 시키는 방식은 도쿄대학 이외에는 채택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커다란 제도의 개악이다. 고등학생에게 전문 과정을 선택해서 입학시험을 치르라고 해도 어떤 과정이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직접 공부해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선택이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한 과정을 선택하지 않으면 시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 빈약한 지식을 바탕으로 독단적인 이미지를 그려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학부나 학과의 이름에 이끌려 무작정 선택을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현재 학문의 최전선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있는지 지식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에 관한 조감도를 가져야 한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기는 어떤 능력과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지 성숙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그런 조감도나 자기 인식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 과거 교양학부에서의 2년은 그런 조감도와 자기 인식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그런 소중한 기회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리버럴 아트란 이른바 일반 교양 과목이다. 일본에서는 전문 교육 쪽이 격이 높은 진정한 학문이 일반 교양 과목은 격이 낮은 것으로 취급하여 학문이라고 부르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대학의 역사에서는 러버럴 아트야말로 대학의 본령이고 전문교육은 일종의 직업교육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미국 등에서는 대학의 학부 4년 동안은 리버럴 아트만 가르친다. 즉 일본에 있던 교양학부가 4년 동안 존재하는 것이다. 전문 교육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각각의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배운다. 이른바 그래주에이트 스쿨 (graduate school)이다. 일본에서는 그래주에이트 스쿨이 일반적으로 ‘대학원’으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들어가는 직업 전문학교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 스쿨(법학교), 메디칼 스쿨(의학교)처럼 ‘스쿨’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이다.
한때, 지금이야말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고 하여 모두 스페셜리스트를 동경하면서 ‘제너럴리스트는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는 있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 대중적인 지적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 이라는 견해가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그것은 낮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다. 스페셜리스트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도 존재하며,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결국 제너럴리스트가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거대 조직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사람, 정책을 기획하는 사람,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 집행 부문의 상층부에서 존재하는 기업의 운영자 등은 모두 제너럴리스트이다. 기술 부분 출신의 대기업 사장이나 관청의 수장인 기술관료들도 있지만 그들은 결코 스페셜리스트로서 최고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다. 기술자이지만 경영에 대해서, 영업을 전개하는 전략에 대해서, 정치나 사회의 동향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조직의 최고 자리에는 앉을 수 없다. 반대로, 사무 부분 출신이라도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업이든 반대로, 사무 부분 출신이라도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업이든 관청이든 최고 수준에는 오를 수 없다. 기술은 몰라도 된다는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낮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의 사고방식이며,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는 당연히 기술에 대한 이해력도 갖추어야 한다.
그런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육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수준의 리버럴 아트(교양) 교육이다.
일본에서도 대학 진학률은 45%를 넘고 있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의 교육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총체적 지적 능력은 뚝 떨어진다. 미국과는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차이는 서점에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지적 수준이 꽤 높은 책이 베스트 셀러에 포함되어 있지만,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은 대부분 지적 수준이 낮은 것들뿐이다. 텔레비전은 모두 오락 프로그램 일색이고, 압도적으로 잘 팔리는 것은 만화 잡지이다. 일본의 지적 국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가 특히 심각한 것은 과학기술에 관한 사회의 일반의 지식 수준이 엄청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과학과 관련이 있는 책 치고 베스트 셀러에 포함된 책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 잡지는 거의 괴멸상태에 놓여 있다.
그 대신 일본에서는 과학적 상식이 약간만 있다면 절대로 손을 대지 않을 어이없는 책들이 잘 팔이거나 그런 내용이 담긴 잡지 기사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인기가 몰려,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잡지나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것이 대학 진학률이 45%나 되는 국가의 모습인가? 대학에서 리버럴 아트 교육이 확실하게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그 3분의 1을 자연과학계열이 차지하고 있었다면, 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 수준이 이 정도로 심각하게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원이 없는 국가인 일본이 이렇게까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초 과학은 물론이고 산업이용 면에서 과학기술진흥이 상당히 바람직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고등학교의 과학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리버럴 아트(교양) 교육은 실질적으로 고등학교 교육이 담당해왔다. 대학입시의 높은 수준 때문에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외국의 단과대학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육성된 질 높은 중급 기술자들이 두터운 층을 이루어졌고, 그렇게 육성된 질 높은 중급 기술자들이 두터운 층을 이루어 일본의 기술입국을 지탱해왔다. 문과계열의 학생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강제로 과학을 세 과목 이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기초 지식은 나름대로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기술입국을 사무와 영업 면에서 지탱했다.
이런 일본 경제의 기반을 지탱해온 교육 면에서의 바람직한 조건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고등학교 교육의 수준 저하, 대학입시의 수준 저하, 대학 리버럴 아트 교육의 붕괴, 이 세가지 원인이 뒤섞여 일본의 총체적 지적 능력은 대폭 저하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식 수준은 사회적으로 현저한 저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유명무실한 고학력 국가가 된다. 현재의 대학 진학률 47%라는 수치는 미국, 유럽의 대학 진학률에 가까운, 또는 그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문부성의 조사에 의하면 66.2%, 영국 56.4% 프랑스 38.0%, 독일 32.7%라고 한다.)
그러나 대학 진학률과 졸업률은 다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능력이 없는 학생은 사정없이 낙제시킨다. 미국 등의 경우에는 졸업하는 학생이 입학생의 20% 정도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국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역시 인정사정없이 낙제시킨다. 독일에서는 약 30%가 졸업을 못하고, 이탈리아에서는 64%가 졸업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졸업장을 딴다. 학력을 충분히 테스트한 다음에 졸업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정에 얽매여 입학생들 대부분을 졸업시키고 있다. 이런 국가는 전세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OECD의 자료에 일본의 대학 졸업 탈락률은 ‘세계 최저’로 특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랑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 능력 없는 학생을 인정상 졸업을 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수치일 뿐, 그런 조치에 의해 발생하는 졸업생의 학력의 질적 저하를 생각하면 오히려 수치스러운 내용에 해당된다.
입학생의 수준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지금, 이런 인정주의를 계속 밀고나간다면 일본의 대학은 틀림없이 세계 최하 수준의 대학이 될 것이다.
격심한 경쟁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세계경제 사회에서 일본 기업이 나름대로의 지위를 확보해온 이유는 품질 관리(퀄리티 컨트롤)를 통해 제품에 대한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품질 관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검사다. 불량품을 모두 제가하고 품질이 뛰어난 제품만을 출하한다는 엄격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본의 기업에서는 이런 엄격한 자세가 정착되어 있는데, 일본의 대학에서는 이것이 전혀 정착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일본의 학생은 입학 시험을 치를 때까지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시험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노는 데만 정신을 파는 경우가 많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그런 학생을 학교에서 매몰차게 제거함으로써 대학교육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대학도 수준을 유지하고 싶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대학에 입학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낙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상식을 확립해야 한다. 그런 상식이 확립되면 입시지옥도 완화된다. 현재의 치열한 입시경쟁은 어떻게든 입학시험에서 합격만하면 그 다음에는 천국이 열린다는 생각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모두 몰려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자신의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대학에 들어갈 경우, 매학기마다 낙제의 공포에 쫓겨야 한다면 무리하게 시험을 치르지 않을 것이다.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인 “공부성 공학료[공부성 공학료]”를 살펴보면)
첫 교수진은 모두 영국에서 고용된 젊고(평균 연령이 30세 이하였다) 유능한 기술자였다. 급료는 600엔 정도였는데, 요즘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수백만 엔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교사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고,, 예과에서는 철저하게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일반인들은 외국 서적을 입수하기 어려웠지만 공학료의 도서실에는 영어로 쓰여진 기술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또한 학비는 물론이고 식비와 생활비, 학용품, 의복까지 모두 지급되었다. 여름방학 두 달 동안에는 한 달에 약 4엔의 하숙료가 지급될 정도였다. 세 끼의 식사는 모두 서양 식기를 사용한 영국식 요리였다.
그러나 수업은 매우 엄해서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이 있었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대식당에 모여 외국인 조교의 감시 아래에서 자습을 해야 했다.
<중간생략>
외국인 교사들도 꽤 우수한 편이었다. 이 시기에는 유럽에서도 공과대학이 만들어져 그때까지 기술자들의 기술에 지나지 않았던 공학이 대학 수준의 고등교육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온 젊은 기술자들은 그 선두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전신학과를 개설한 에어튼(William Edward Ayrton)의 연구실은 ‘응용전기학을 연구하는 세계 최초의 연구실’로 불렸고, 그가 발표하는 논문을 잇달아 런던의 학회지에 실렸다. 또 전자기학의 대가인 맥스웰은 ‘전기학의 중심이 이제 영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라는 평가를 할 정도였다. 『네아처(Nature)』나 『엔지니어(Engineer』등 대표적인 과학잡지와 기술잡지에서 공부대학교를 최신 공업교육기관의 실례로서 몇 번씩 다룰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았다.
일본의 엘리트는 관료든 민간이든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생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대체적으로 교양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일본의 엘리트들이 해외로 나가 그쪽의 엘리트들과 여러 방면에서 교섭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비즈니스적 교섭 상황에서는 일본의 엘리트들도 나름대로 활약을 하지만, 문제는 비지니 교섭이 끝난 이후다. 어떤 교섭이든 교섭이 끝나 이후에는 비지니스를 떠나 담소를 나누는 형식으로 회식이나 파티를 벌이는데, 그런 경우에 일본의 엘리트들은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대화할 소재가 거의 없디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든 교양이 없다는 사실이 즉시 드러나서 말을 하면 할수록 한심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그 사람이 한심한 사람인지 아닌지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세계 어느 곳에든 문화적 교양인데, 일본의 엘리트들에게 가장 결여 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문화적 교양이다.
법학부의 경우 전문 과정에서는 교양을 익히기 위해 준비된 코스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유일한 기회는 교양학부 시절이다. 하지만 교양학부의 리버럴 아트 교육이 전체적으로 붕괴되어 있는 데다가 특히 법학부 진학 지망자는 교양을 익히는 데 관심이 없다.
제2차 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일본은 패전에 의한 비참한 상황을 딛고 제기하여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풍족한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고, 최근에는 국가 전체가 자신감 상실, 기력 상실 상태에 빠져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도쿄대학이라는 창을 통하여 그 원인을 분석해보고 싶었다. 좋든 싫든 일본을 이끌어온 주요 견인차는 도쿄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런데 그 엘리트들이 지금은 한결같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중심을 잃게 되었는지, 도쿄대학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간생략>
처음에는 나는 이 『도쿄제국대학 50년사』를 항공연구소의 연혁이나, 일찍이 항공연구소가 있었고 지금은 첨단연구소가 있는 고마바 제2캠퍼스의 역사등을 조사하는데 이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도쿠가와 시대 이후 대학의 전반기 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기 시작하자 깊은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대학의 성립 과정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 성립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대학이 지닌 모든 결함은 근대 국가인 일본이 지닌 모든 문제와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은 교수가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은 그것을 외우는 곳이 아니다. 대학생이 반드시 몸에 갖추어야 하는 것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다. 교수가 가르친다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는 지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학생들은 그 몇 배나 되는 지식을 스스로 습득해야 한다. 그런 능력만 갖춘다면 교수의 수업을 빼놓지 않고 들을 필요는 없다.
첫째로 지적해야 할 점은 시험 방식이 단순히 교재를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을 장려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학생들은 독일 학생과는 달리 처음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날부터 늘 시험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 그들은 학년 말에 실시하게 되는, 그때까지 들은 강의에 대한 시험에 합격하는 일에만 매달려 먼 장래를 걱정하고 전문적인 수양을 쌓는 것보다는 학년시험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는 것을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교사의 말이나 그들이 추천하는 교과서 본문에 의지하는 것을 시험에 합격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원래, 도쿄대학과 교토대학은 교육 방식이 전혀 다르다. 교토대학이 자유탐구주의를 채택한 데 비하여, 도쿄대학은 강제주입주의였다. (중략)교토대학에서는 수업 이외의 시간이 더욱 귀중했다. 그 시간에 대학 안팎의 참고서를 섭렵하며 자유롭게 음미하고 탐구하여 새로운 지식을 보충했던 것이다.
도쿄대학 학생들의 경우 참고서적을 읽는 학생은 100중에 두 세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밖에는 모두 강의 내용을 그대로 외우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교토대학 학생들은 한 과목에 대해 적어도 두 권 이상의 원서를 읽었다.
교퇘학은 독창성이 요구되는 연구 부문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데 비해, 도쿄대학은 그런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도 교토대학이 법학부를 포함한 전체 재학 차원에서 이런 자유로운 탐구가 중심이 되는 교육 방식을 채택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나 자신의 학창 시절 경험과 교사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는 대학교육의 핵심이 토론 형식을 통한 개인적인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 방식의 교육을 경험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학생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도쿄대학 법학부에서 토론 형식의 강의가 매우 적어서 많은 학생들이 주입식 교육만 받다가 학창 시절을 끝낸다. 즉 대다수의 학생들은 대형 강의실에 배열된 ‘찾잔’인 상태로 학창 시절을 마감하는 것이다.
내가 젊은이들에게 하는 ‘교양을 갖추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논의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되라는 뜻이다. 즉 실용적인 이익은 전혀 없지만,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에 정신을 집중시켜 논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교양을 갖춘다는 것은 하나의 세트처럼 완벽한 형태의 지식 체계를 머리 속에 입력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머리를 사용하는 방법의 문제, 또는 마인드의 문제인 것이다.
일본인은 잘 모르고 있지만 유럽의 언어에서는 교양은 곧 문화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도 교양은 Culture다. 그리고 양쪽 모두 동사로서 경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평소에 일본의 중,고등학교에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철학교육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사실상 제로 상태이다. 대학을 보면 고마바의 경우 문과계열 학생에 대해 선택 필수인 방법론의 기초를 익히는 일환으로 철학 개론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2학점 정도에 불과하고 기본적으로 교단에서의 강의가 중심이다. 그곳에서 배우는 것은 지식으로서의 철학일 뿐, ‘철학 하는 것’ 그 자체는 아니다. 그밖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종합 과목으로서 몇 개의 철학 강좌가 열리고 있지만, 모두 특사한 강의이며, 철학을 하기 위한 실천적 훈련은 아니다.
거기에 비하여 프랑스에서는 리세의 최종 학년에서 리세 교육의 완결체로서 철학을 다루고 있다. 문과계열에서 1주일에 8시간, 이과계열에서는 1주일에 3시간이다. 그 철학교육을 위한 교과서가 지금 소개하는 것인데, 일본의 일반 독자는 이것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일본의 고등학생용 교과서와는 격이 다르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지적 수준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 철학강의 교과서는 일본에서 네 권으로 번역되었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대학이 교양 과정에서 이 중 한 권을 떼려면 한 학기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철학강의가 철학과 관련된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철학적 사색을 하기 위한 훈련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사색이란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론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에만 매달려 그것을 머리 속에 입력한 우등생이 승자 취급 받는 일본의 중•고등교육과는 근본적으로 교육방침 자체가 다르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은 파리대학 등의 대학이 아니라 그랑제콜이라고 불리는 고등전문학교다. 그랑제콜의 입학시험은 대학 3학년 이상이 응시할 수 있는데, 그 경쟁률은 파리대학의 수십 배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는 그랑제콜의 졸업생이 진정한 엘리트이며, 그랑제콜에는 문과계열이라면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라고 불리는 고등사범학교, 이과계열이라면 에콜 폴리테크니크라고 불리는 공과학교, 정치계열이라면 에나라고 불리는 행정관료를 육성하는 학교가 있다.
이 중에서 에콜 노르말은 문자 그래도 사범학교로 구 주요 임무는 리세의 교사를 육성하는 것이다. 졸업생들은 우선 지방의 리세로 가서 철학 교사가 된다. 이 때문에, 프랑스 문과계열의 최고 지식인들 대부분이 리세 철학 교사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베르그송, 알랭, 사트르트, 보부아르, 메를로•퐁티 교사들 중에서 대학 교수는 물론이고, 톱 랭크의 문인들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 수준의 교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교육부는 문부성처럼 권위주의적인 강요를 못하는 것이다.
미셀 푸코는 철학 교사였을 때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문제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그리고 교양도 역시 지식이 아니다. 교양은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교양이 없는 사람이란 두뇌가 전혀 경작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두뇌가 경작되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경작된 토지에 뿌린 씨앗처럼 넓은 교양을 갖춘 정신이 끌어안고 있는 사상은 쉽게 싹이 나고 성장한다. 교양은 지식의 획들을 순조롭게 만들며, 새로운 모든 조건에 적용하게 만든다.”
“교양(문화)이란 각 시대가 소유하고 있는 살아 있는 모든 이념의 체계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을 통해 시대가 만드는 모든 이념 체계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모든 이념 체계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과학이라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 교양의 특징은 그 내용 대부분이 과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리학과 그 사유양식은 위대한 인간 정신의 내면적 관성조절 바퀴 중 하나이다. 이 과학에는 4세기 동안의 지적 훈련의 결과가 스며 들어 있다.”
“기말시험에 출제하는 내 문제는 앞으로 결정될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논제를 설정하고 자유롭게 논하라’는 것이 내 문제다. 논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주제와 관계가 있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무엇을 논하든 여러분들의 자유다. 채점은 논제 설정 능력과 논술 전개 능력으로 평가하겠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사회에 진출할 것이다. 사회에 진출하면 지금처럼 교사가 문제를 내고 그 문제에 대한 답안을 제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능력을 평가 받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를 받게 된다. 이것은 그 가장 중요한 능력을 갖추는 훈련도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여 논하라.”
OJT를 끝내고 각자 사회의 어느 영역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무도 정리된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매일 자기 학습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안 된다.
대학 시절에 몸에 익혀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이 자기 학습 능력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적인 자기 학습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고차원 수전으로 끌어올려 연마해야 할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 지식 사회의 전선에서 살아갈 생각이라면 끊임없이 자기 학습을 해야 한다. 자기 학습 능력을 익히지 못하여 ‘주어진 과제만 잘 처리하는’ 도쿄대 우등생 타입의 사람이라면, 과제를 부여해주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즉시 의욕과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자기 학습 능력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발견하여 스스로 그것을 도식화하며, 자신에게 과제로 부여하여 해결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전체를 포함한다.
입시 공부에 완전히 지쳐버려 대학에 입학한 후 놀기만 하는 학생이라면 앞으로의 지식 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없다.
앞으로 학생들의 앞길에는 입시 공부의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되는 지적 에너지 투입이 필요한 학습이 기다리고 있다. 진정한 공부는 지금부터인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라고 생각한 것은 마라톤을 앞두고 몸을 푸는 조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교양 과정에서는 우선 이과계열과 문과계열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학습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 그것이 기본이지. 사실 교양학부라는 것은, 영어로 표현하면 아트 & 사이언시스야.
사이언스든 아트든, 그 큰 틀의 내용을 가르치면 되는 거야. 여러 분야의 큰 틀의 내용을 배우는 것을 통해 지적 세계의 설계도를 만들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선형대수나 미적분의 난해한 연습 문제를 가르치기 전에 선형과 비선형이란 무엇인지, 미적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현실 세계와 선현성, 미적분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그런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야. 뉴턴 역학 이후의 과학은 기본적으로 미적분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보는 시야가 전혀 달라 지거든.
일단 추상적으로나마 표현을 해보지. 교양을 갖춘 사람을 육성한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인류 사회의 유산을 대상으로 말해본다면, 가르치는 쪽에서는 ‘상속인’을 육성하는 것이고 배우는 쪽에서는 그 ‘상속인’의 한 사람이 될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그 시대의 인류 사회 전체가, 시대를 초월하여 전달되어가는 ‘지식의 총체’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것이 교양이라고 말할 수 있어. 기본적으로 그것은 폭 넓은 상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유산의 전체적인 상을 이해한 상태에서 자신이 그 상속인 중의 한 명으로서 어느 부분을 지탱하는 인간이 되려 했을 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초적인 능력 또한 교양이지, 폭 넓은 상식과 기초적 능력 두 가지가 바로 교양이다.
삶은 누구에게도 완성된 것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상황에 대응하여 시시때때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우리는 항상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현재 이 순간, 다음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 존재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사람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무엇인가 계획을 세우게 되지.
그런 계획을 세우는 능력, 즉 계획 능력을 부여해주는 지식과 이념의 체계가 교양(문화)이라는 거야(문화[교양]는 삶의 계획이고, 생존이라는 밀림에서의 이정표이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의 능력이란 면에서 가장 중요한 교양이 무엇인지 전반적인 정의를 내려볼까?
우선 첫째로 ‘논리를 세우는 능력’이야. 그리고 그 계열로서 ‘잘못된 논리로 간파하는 능력’ 그리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을 들 수 있어. 논리를 세우는 능력 안에는 ‘논리력과 표현력’이 포함되지. 잘못된 논리를 간파하는 능력은 동시에 ‘잘못된 논리를 반박하는 능력’ 이기도 해. 지금 대학에서는 이런 능력을 양성하는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과거에는 학생운동 등이 그런 장으로서 기능을 했지만, 지금은 토론 서클이나 사회과학계열의 서클 등이 그런 장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둘째로,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는 능력’,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조직하는 능력’이지. 현 사회는 어느 분야에서든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어. 목적을 달성하려면 여러 사람을 모아 팀을 구성해야 하니까 ‘팀을 구성하는 능력’, ‘팀을 움직이는 능력’이 중요하지.
세 번째는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 ‘정보를 평가하는 능력’, ‘정보를 이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넓은 의미에서는 이론 능력과 두 번째의 계획 능력, 세 번째의 정보 능력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지적 능력이 되는 거야.
대학이 인류가 공유하는 지식 세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역할을 중심적으로 담당하게 된 것은 겨우 지난 20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의 미래 사회에서도 대학이 그런 역할을 중심적으로 담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100년 단위 생각하면, 그렇게 간단히 예측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한다면 대학 그 자체는 12세기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볼로냐대학, 파리대학, 옥스포드대학 등이 만들어진 것이 모두 12세기경이다. 그로부터 200년 동안 유럽 각지에 유명 대학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단 이 시대의 대학이 가지고 있던 기능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 이 시대의 대학은 기본적으로 신학, 법학, 의학의 프로페셔널 스쿨의 연합체였으며, 동시에 프로페셔널 스쿨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위한 예과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어쨌든 그것은 극히 일부의 고등 직업인을 육성하기 위한 직업 전문학교 같은 존재로 사회와의 관련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대학은 기본적으로 이 프로페셔날 스쿨에 들어가기 위한 예과부분이 확대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 프로페셔날 스쿨이 로 스쿨, 메티컬 스쿨등의 그래주에이트 스쿨에 해당하며, 그레주에이트 스쿨은 예과로서의 대학 졸업생만을 받아 들이는 학교가 되어 있다. 요컨대 이른바 대학은 예과이며, 예과 다음에 본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주에이트 스쿨에 진학하지 않은 학생의 본과는 현실 사회가 된다.
칼리지(대학) 교육은 어디까지나 예과에 속하며, 그곳에서는 학생이 장래에 대하여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일반성을 지닌, 즉 일반적인 지적 능력을 높이기 위한 교육을 했다. 그것이 리버럴 아트 교육이며, 일반 교양교육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졸업생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반드시 프로페셔널 스쿨에 진학하지 않고 사회 각층의 엘리트 후보생으로서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대학은 프로페셔널스쿨(특별직 고등전문학교)의 예과이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다양한 고등 직업인을 양성하는 예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이윽고 그런 졸업생이 점차 증가하여 대학의 주된 기능이 프로페셔널 스쿨 입학 희망자를 위한 예과 교육에서 일반 고등 직업인의 예과 교육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것이 대학에 관한 대략적인 역사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대학의 성격이 그렇게 변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고등 직업인을 위한 예과로서의 기능이며, 그것을 위한 일반 교양교육이 대학교육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교양교육이야말로 대학교의 본체다. 그것이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이나 유럽 일류 대학에서 실시하는 교육의 기본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학에서는 왜곡된 대학교육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 본래의 기능이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본래의 대학교육의 정체성에 대해 전문학부 교육이 더 중요한 교육에 속하며 일반 교양교육 따위는 하찮은 교육이라는 식의 근본적인 오해가 발생했다. 그 결과는 지금 교양교육이 대학교육의 주류에서 지류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붕괴 위기에 놓여 있다. 바로 여기에 일본 대학 문제의 핵심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일반 교양교육의 중요한 포인트는 그 일반성에 있다. 특정 영역의 지적 능력을 높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 능력을 전반적으로 향상 시키려는 것이 제너럴 에듀케이션의 본래의 의의다. 즉 폭이 넓은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제너럴이 ‘일반’이라고 번역되는 순간, ‘일반 대중’, ‘일반적’등 수준이 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불행한 오해가 발생하지만, 제너럴은 ‘대장’, ‘장군’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하급 지휘관은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만을 바라보면 되지만, 장군이 되면, 군 전체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에 제너럴인 것이다. 장군은 제너럴에 해당하는 군사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등 직업인으로서 이 사회의 다음 세대를 담당하게 될 젊은이에게는 이 세계, 이 사회에서의 폭 넓은(제너럴)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지식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제너럴 에듀케이션이다. 그것은 특수한 전문 분야의 지식보다 당연히 상위에 놓여야 한다.
교양의 본질, 즉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 일본어의 세계에서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따라서 우선 그 문제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교양’이라는 일본어는 독특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데 유럽어로는 culture가 ‘교양’, 즉 ‘문화’다. 독일어로는 Bildung(빌둥)이 ‘교양’에 해당하는데, 이 말에는 ‘형성’, ‘육성’이라는 측면이 있다. 인간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모든 내용을 교양으로 본다는 뜻이다.
큐르츄르 또는 컬쳐라는 것은 큘티베cultivar, 컬티베이트cultivate(경작하다)가 어원이다. 그것은 머리를 경작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머리 속에 잠재적인 능력을 발견하는 것 그 자체가 교양이라는 뜻이다.
교양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몸에 익히는 것이라면, 그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교육, 즉 실천적인 교육이 교양교육이 되어야 한다.
실천적 교육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연습이고,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실험 또는 현장학습이며, 여러 가지 사물을 만드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면 학생은 반드시 실패를 맛본다. 학생에게 여러 가지 실패를 맛보게 하여, 실패를 통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실천적인 교양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조사, 문서 작성’을 타이틀로 삼은 이유는 대부분의 학생에게 조사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앞으로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질 지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조사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이제 나 같은 저널리스트에게만 필요한 능력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지적 직업에서 일생 동안 필요한 능력이다. 저널리스트든 관료든 비즈니스맨이든 연구직, 법률직, 교육직 등의 지적 노동자든, 대학을 나온 이후에 활동하게 되는 대부분의 직업생활에서 상당한 부분이 조사하는 것과 글을 쓰는 데 할애될 것이다. 근대 사회는 모든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문서화시키는 것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재를 동원하고 조직을 활용하고 사회를 움직일 생각이라면 좋은 문장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좋은 문장이란 명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멋진 글이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전달하는 사람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한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전달하려는 내용이 그 문장을 읽는 사람에게 분명하게 전달 되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문장은 우선 이론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에는 내용이 수반 되어야 한다. 이론보다 증거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론을 세우는 쪽은 머리 속의 작업으로 끝낼 수 있지만, 콘텐츠 쪽은 어디에선가 자료를 조사하여 가져와야 한다. 좋은 콘텐츠에 필요한 것은 자료가 되는 정보다. 따라서 조사를 하는 직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사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기술이지만, 그것을 대학교육 안에서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장면은 보기 힘들다. 이것은 대학교육의 거대한 결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단 조사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추상적으로 강의하는 것만으로는 가르칠 수 없으며, OJT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실천 교육에서 중요한 점은 구체적인 아웃풋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 그리고 교재를 통해서 배우는 것과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몸소 배우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구체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한 순간, 표면만 보고 머리를 상상했던 것과 주체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깨닫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한 장애가 잇달아 발생하여 의지가 무너지기 쉽니다. 따라서 쉽게 좌절하지 않도록 적당한 격려와 적당한 조언을 통해서 무엇인가 하나의 아웃풋을 완성할 때까지 강한 의지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일단 그런 구체적인 아웃풋이 나오면, 이번에는 더욱 훌륭한 아웃풋을 완성하기 위해 인풋 단계에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학생은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즉 실천 교육을 통하여 자기 학습 능력, 자기 발견 능력, 자기 조직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 갖추면 대학교육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사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며, 대학은 역시 본질적으로 학생이 스스로 공부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교양학부를 아트 앤드 사이언시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 원래 그리스 어에서 유래된 테크네techne와 에피스테메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에피스테메는 라틴 어의 스키앤티아scientia에 해당하며 이것이 영어 사이언스의 어원으로, 요컨대지식을 가리킨다. 거기에 대하여 테크네는 기술로 테크놀러지의 어원이다. 그러나 앞으로 테크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들은 이른바 테크놀로지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일본어로는 오히려 기능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이 머리로 습득하는 것인 데 비하여, 테크네는 몸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지식은 강단의 강의로 가르칠 수 있지만, 테크네는 강의만으로는 가르칠 수 없다. 실습이 필요하다. 실습을 되풀이하여 몸으로 습득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몸으로 습득한 것은 머리로 습득하는 지식과 달리 뇌의 기억 시스템을 사용하여 뇌의 다른 장소에 수렴된다. 머리로 습득하는 지식은 진술기억으로서 내용을 언어화할 수 있는 기억이다. 거기에 비하여 몸으로 습득하는 테크네는 비진술기억으로 그 에센스 부분은 언어화할 수 없다. 이른바 수속기억이라고 말 할 수 있으며, 신체 각 부분을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원하는 성과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신체 각부의 프로그램 같은 형태로 몸이 습득한다. (실제로는 몸 그 자체가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체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소뇌 컴퓨터에 수렴된다고 여겨진다.) 일단 몸이 습득하게 되면, 세부적인 동작 따위는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의 자동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동작 예를 들면 자전거를 타는 방법, 자동차를 운전하는 방법, 피아노 연주, 스포츠 동작, 요리 등 무엇이든 몸으로 습득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알려진 모든 내용이 여기 포함된다. (중간생략)
테크네의 본체 부분은 언어화할 수 없으며, 그 기술의 전승도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해 보인다’, ‘하게 해본다’, ‘해본다’라는 실질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그 에센스를 전할 수 있다. 그것이 언어화된 정보를 이용하여 에센세를 전달할 수 있는 에피스테메와의 본질적인 차이다. 그런 전승 과정에서 언어 정보가 해설이라는 보조적으로 이용된다거나 힌트나 요령이라는 형태로 전달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승의 보조적인 역할로 이용된다. 따라서 실천적으로 전달되는 에센스 부분을 대신 할 수는 없다. 테크네에 해당하는 기술을 설명하는 해설 서적이 모두 거기에 해당된다.
지식 세계라고 하면 에스테메의 세계라고 받아들이기 쉽지만, 사실은 지식 세계에서도 에피스테메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테크네이거나 테크네 그자체에 해당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외국어 습득은 거의 테크네에 해당한다. 지금도 일본에서 영어 교육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에피스테메로 교육하려 하고, 테크네로서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절한 교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르칠 없었다.) 요컨태 읽고 쓰는 영어로서의 언어 정보 형태로만 가르쳤을 뿐,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청각과 발성 기관을 총동원시키는)음성 커뮤니케이션용 영어로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테크네의 기억과 에피스테메의 기억의 가장 큰 차이점은 습득한 내용을 사용할 때 나타난다. 테크네로서 몸으로 습득한 사람은 문장은 생각할 필요가 없이 쉽게 대화할 수 있지만, 에피스테메로 습득한 사람은 대화를 하려고 할 때도 처음(또는 다음) 문장을 생각한 다음에 말로 표한기 때문에 부드럽게 표현할 수 없다.
집단이나 조직에 대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학교든 기업이든 군대는 한 명의 통솔자가 모든 집단 구성원의 동태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어느 정도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면서 집단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관리의 한계(span of control)가 20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대량의 지식을 적절히 처리하는 기술에 관한 연구는 인류의 입장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다. 만약 이런 지식의 엄청난 팽창을 통제할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다면 인간은 그 안에서 질식하게 될 것이다.
(지식의 대팽창을 통제하려면 그것을 단순화하는 수밖에 없다.)
지식의 증대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식의 단순화를 향하여 실제와 특징을 간파하는 일 없이 진수만을 종합하는 방법을 지향하는 지적 작업을 촉진시키지 않으면 과학 그 자체의 장래가 불행해질 것이다.
(단순화하더라도 그 실질적인 내용을 간과하지 않고 에센스 부분을 추출하여 종합화하라는 말이다.)
교양’학부’교수의 입장에서는 지식의 효과적인 종합화, 조직화, 체계화의 창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종래에 우발적으로만 표출되었던 일종의 과학적 재능, 즉 통합할 수 있는 재능이 요망된다.
(요컨대 교양교육이라는 것은 전문화, 개별화 단편화된 현대 사회의 지식을 재통합하고 결합하는 것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교양교육이야말로 고등교육의 핵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부분에 대학 사명의 역사적 중대성이 존재한다. 인간을 계발하는 것, 그 시대의 모든 문화를 전달하는 것, 삶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하여 여기 올바른 삶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현대 사회라는 세계를 명료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대학은 바로 그 중심 과제를 되찾아야 한다. 나는 대학 및 고등교육의 핵심을 교양”학부”에 두고 싶다.
(즉 대학이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양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세계를 명료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시대의 교양을 만들어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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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학습할 줄 모르고, 중간, 기말고사 때만 반짝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것으로
이번 학기도 잘했다고 좋아했던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니 더 이상 대학으로 돌아갈 일은 없지만 스스로 학습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