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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의 패망을 알리는 yh 사건
게시물ID : history_96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ss989
추천 : 10
조회수 : 97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01 01:47:34

 

 

 

 

1979년 8월9일 오전 9시30분 무렵 여성 노동자 187명이 공덕동 로터리에 있는 신민당 당사로 몰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그들의 절박한 행동이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격동의 드라마를 촉발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유신독재 타도나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직될 대로 경직된 유신체제는 “이 나라의 배고프고 예쁜 아가씨들”(양성우 시인의 표현)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야당과 교회와 노동자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새벽 2시, 아수라장 속에 사지가 들려 끌려간 여성 노동자들도, 그들을 끌어낸 ‘사복’들도 딱 두 달 반 후에 박정희가 머리에 총 맞고 죽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970년대는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으로 끝났다. 와이에이치(YH)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시인 고은은 1970년대에는 시작과 끝을 이렇게 노래했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고졸 관리직 상여금 100%, 생산직 사원 0%
96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수출 팽창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발이었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은 이에 대한 제재로 중국산 제품 및 원료의 수입을 금지했다. 당시 뉴욕의 한국무역관 부관장으로 있던 장용호는 한국산 가발이 유망할 것이라 생각하여 무역공사를 사임하고 발빠르게 왕십리에 종업원 10명의 소규모 가발 공장을 차렸다. 장용호는 회사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와이에이치(YH)무역이라 지었고, 부사장에는 동서인 진동희를 앉혔다. 가발은 불티나게 팔려 와이에이치무역은 창사 4년 만인 1970년에는 종업원 수가 무려 4000명을 넘어섰다. 1970년 11월30일 수출의 날에 장용호는 수출 1000만달러를 달성하여 대우의 김우중과 함께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2년의 고액 개인소득자 순위를 보면 장용호는 8위, 진동희는 9위를 차지했고, 장용호는 1973년엔 7위로 한 단계 뛰어올랐다. 한마디로 갈퀴로 돈을 긁어모은 것이다. 1968년 1월 뉴욕에 와이에이치 가발제품 판매를 목적으로 용 인터내쇼날 상사를 설립한 장용호는 1970년에는 진동희에게 사장 자리를 맡기고 자신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에서의 활동에 주력했다

 

 

. 한창때는 고액 소득자 상위 10명 중 7명이 가발업자일 정도로 잘나갔던 가발산업의 최대의 걸림돌은 한국 업자들끼리의 과당경쟁이었다. 개당 12달러 하던 상품이 4달러에 투매되면서 가발산업은 급격히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와이에이치 노동자들에 따르면 눈치 빠른 장용호는 해외로 빼돌린 재산으로 미국에 백화점, 방송국, 호텔 등을 차렸고, 진동희는 1970년 사원들에게 상여금으로 10억여원을 주었다고 꾸미고 그 돈으로 와이에이치해운을 설립했다고 한다.

 

 

 

 

 

가발산업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산업으로 장용호 등은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을 토대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와이에이치 노조 위원장이었던 최순영이 1970년 입사했을 때 노동자들의 초봉은 월 2000에서 2500원 정도였는데 기숙사비가 1500원 정도로 월급의 절반이 넘었다.

 

 

종업원의 대다수는 농촌에서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갓 마치고 서울로 온 여성들이었고, 기업은 이런 어린 여성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려 하지 않았다. 와이에이치 노동자들 사이에도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그래도 노조를 결성하려면 “남자가 있어야 일을 박력 있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현장에서 한마디 할 만한 사람을 노조 준비모임에 끌어들였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하필이면 그는 공장장의 처남이라 노조 결성 움직임을 매부에게 고자질했다. 주동자 4명이 해고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와이에이치무역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1975년 5월24일이었다.

 

 

 

1975년 12월24일 회사는 관리직 사원들에게는 100퍼센트의 상여금을 지급했지만, 생산직 사원들에게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이 상여금 차별에 대해 항의하자 총무이사는 “억울하면 여러분도 관리직으로 취직하세요. … 여러분은 국민학교밖에 안 나와서 키우는 데 돈이 적게 들어갔지만, 관리직은 적어도 고졸 이상입니다

 

 

. 그런데 함께 대우해 달라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대답했다. ‘못 배운 쪼깐이’들은 원통해서 눈물바다를 이뤘다. 그래도 노조가 있어서 싸운 덕에 회사 창립 이래 최초로 50퍼센트의 상여금을 쟁취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열 개도 채 안 되는 민주노조의 위엄이었다. 노조가 생긴 뒤 와이에이치의 근로조건은 겨우 근로기준법 따라가기에 허덕이는 수준이었지만 “노동조합 없던 데서 있던 애들이 와이에이치에 오면, ‘아 노동자의 천국이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5일의 휴가를 요청하면 회사는 “여자들이 장례에 그렇게 오래 있어 뭘 하냐”고 타박하는 것이 1970년대 노동자들의 소박한 천국이었다.

 

 

 

 

 

 

“우리를 윤락가로 내몰지 말라”
이 소박한 천국도 늘 불안했다. 회사는 삐꺽하면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라느니 일감이 없다느니 하면서 휴업을 하고 도급 단가도 후려쳤다. 1977년에는 회사가 “정부당국의 시책에 따라 가발과를 충북 (옥천군) 청산 두메산골로 이전”한다는 공고를 내붙였다. 당장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로 가야 한다는 소리에 가발과 종업원 중 500명 이상이 사표를 쓰고 말았다. 사실 청산은 공장이 이전할 수 있는 전기나 수도도 없이 낡은 창고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회사는 ‘정부시책’ 때문에 회사를 옮겨야 한다면서 500여명의 종업원을 해고수당도 주지 않은 채 쫓아낸 것이다. 와이에이치 노동자들의 호소문 ‘정부와 은행은 근대화의 역군을 윤락가로 내몰지 말라’에 따르면 이렇게 떠나간 사람들은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차가운 거리로, 보다 열악한 하청공장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여자의 마지막 밥벌이로 나갔던 것”이다. 회사는 사양산업이 된 가발부를 이렇게 해서 자동으로 폐쇄시켜 버렸다. 1970년 4000명, 1976년 2000명이던 종업원 수는 1978년 5월이 되자 550명으로 줄어들었다.

 

 

 

 

 

 신기한 것은 1977년 와이에이치무역의 수출액은 가발과 봉재, 장갑 등을 합쳐 약 1600만달러에 수출순위는 86위로 여전히 100대 기업 안에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공장이 휴업을 거듭하고 종업원이 줄어들면서도 이런 수출 실적을 올릴 수 있던 마법은 “회사가 본공장은 휴업하면서 근로조건이 나쁜 하청공장으로 작업물량을 빼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회사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74년 6억3000만원이던 것이 1979년 3월에는 40억5000만원이나 되었다. 이렇게 빚이 늘어난 것은 정부로부터 은행 이자의 절반밖에 안 되는 수출 특혜금융을 받아 오리온전자를 인수하고 새한칼라 주식 40퍼센트를 인수하는 등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경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79년 3월30일 회사는 “경영 부실로 인하여 사업을 계속할 수 없어 1979년 4월30일자로 폐업”한다는 공고문을 회사 정문에 내붙였다. 장용호는 와이에이치로부터 15억 상당의 물품을 미국에서 외상으로 수입한 뒤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300만달러의 막대한 외화가 해외로 빼돌려진 것이다. 악덕기업주의 외화도피의 부담은 고스란히 저임금에 시달려온 여성 노동자들의 몫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남진의 ‘님과 함께’(저 푸른 초원 위에~)의 가사를 바꿔 “임금은 최저임금 생산량은 초과달성 연근야근 다 해줘도 폐업이란 웬 말이냐”고 노래를 불렀다. 노조는 회사를 정상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래도 노동자의 편일 줄 알고 찾아간 북부노동청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자가 하기 싫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폐업 철회를 외치며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농성을 시작하자 경찰은 곧바로 현장을 덮쳤다. 노동자들은 ‘축구공’처럼 얻어차이고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무더기로 끌려갔다. 악에 받쳐서인지 그때는 내동댕이쳐져도 아픈 줄도 몰랐지만 150명이나 부상을 입고 보니 노조가 치른 약값만 해도 그때 돈으로 18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다음날 다시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당시의 유행가 가사를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부르거나 ‘와이에(이)치’의 첫 글자를 갖고 “와: 와싸 건물도 크고만/ 이: 이렇게 큰 건물에 취직을 하고 보니/ 에: 에그머니나/ 치: 치사 방구스럽구나” 등등의 문장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모습에 정부와 회사도 한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4월17일 현장에 나타난 사장은 폐업 철회를 선언했고 노동청 차장 박창규는 자신의 전화번호까지 적어주며 노동청이 꼭 책임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농성을 해제시키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5월25일 정부는 수출금융을 받고도 수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와이에이치무역 등 29곳에 대한 수출 지원을 중단했다. “은행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노동청에 속고 경찰서에 속고 회사의 무책임으로 거리로 쫓겨날 지경에 이른 조합원들”은 7월30일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8월6일 회사는 다시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노조 사무장 박태연은 조합원들 앞에서 열변을 토한 뒤 분신하려 했으나 동료들이 간신히 뜯어말리고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다짐했다.

 

 

 

회사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회사 쪽은 8월8일 아침부터 전기도 끊고 물도 끊고 식사 제공도 중지한다고 통지했고, 8월9일부터 기숙사를 폐쇄하며 8월10일까지 퇴직금과 해고수당을 수령하지 않을 때에는 법원에 공탁한다고 통고했다.

 

 똥물 사건으로 동일방직 노조가 깨진 뒤 노동계에는 경찰과 자본과 섬유본조가 한편이 되어 그다음으로 와이에이치 노조를 깰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기숙사 폐쇄와 퇴직금 공탁은 ‘구사대’ 투입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은 시인이 “순하기는 식은 숭늉 같고 맹렬하기는 대장간에서 당장 꺼낸 뜨거운 호미나 괭이” 같았다고 한 노조위원장 최순영은 “우리가 이왕 깨질 거 왕창 깨지자. 소리를 크게 내자.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자.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을 보호하자. 민주노조 깨는데 피해를 줘야지만 쟤네들도 겁을 먹을 거 아니냐”고 마음먹었다.

 

 

 임신 6개월의 몸이었기에 쉬운 결단은 결코 아니었다. 농성을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걸어나가지는 않겠다고 결의했지만, 구사대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나가고 신문에는 한 줄도 실리지 않는 그런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싸움을 계속하려면 농성장을 옮겨야 했다. 노동자들은 밤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장용호가 미국 시민권자이고 미국으로 돈을 빼돌렸으니 미국대사관에 가서 농성하자

, 회사의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에 가서 농성하자, 정부 여당의 책임이 크니 여당인 공화당 당사에 가서 농성하자,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 가서 농성하자 등등의 주장을 두고 검토했다. 미국대사관이나 공화당사는 경비가 삼엄하여 뚫고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고, 조흥은행은 바로 경찰이 투입될 것이 뻔했다. 신민당이 노동문제에 꼭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감’의 정치인 김영삼 최고의 직감
노동자들은 새벽이 되자 마치 목욕이라도 가는 듯 작은 대야를 들고 네댓명씩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도중에 발각되더라도 농성 장소가 노출되지 않도록 팀원들에게는 명동성당으로 간다고 말해두었다. 노조 지도부는 경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이 어린 50여명은 기숙사에 남아 농성 때 부르던 노래 등을 녹음한 것을 크게 틀어놓게 하였다

 

 

. 노동자들이 몰래 면목동의 와이에이치 공장에서 마포의 신민당사로 옮겨가는 사이 문동환, 고은, 이문영 등 재야 인사들은 상도동의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집을 찾아갔다. 와이에이치 여공들이 기숙사에서 쫓겨나 마지막 호소를 하러 신민당사로 가니 총재께서 이들의 호소를 듣고 해결책을 찾아 달라는 말에 김영삼은 선뜻 야당 당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니 그들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듣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이야기했다. 면담시간은 딱 5분,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감’의 정치인 김영삼의 최고의 직감이었다.

신민당사 주변에 흩어져 있던 노동자들이 8월9일 오전 9시30분 신민당사로 들어가려 하자 처음에는 당원들이 놀라서 막아섰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상도동에서 연락이 와서 노동자들은 4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새벽에 삼삼오오 기숙사를 빠져나온 187명이 모두 다 모인 것이다. 불과 몇 시간 만이었지만 그들은 무사히 다시 만난 감격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곧 “회사 정상화가 안 되면 죽음이다”는 머리띠를 두르고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란 펼침막을 내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신민당에서 급하게 빵과 우유를 가져다주었지만 노동자들은 면목동에 두고 온 어린 동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며 손을 대지 않았다. 당원들이 그쪽에도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겠다고 한 다음에야 겨우 먹기 시작했다.

 

 

 

당사에 나온 김영삼은 먼저 노동자 대표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4층 강당으로 올라와 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여러분들이야말로 산업발전의 역군이며 애국자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서야 되겠느냐”며 보사부 장관과 노동청장을 오게 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유명 정치인들이 직접 찾아오고, 라디오에서도 와이에이치의 농성 사실이 보도되고, 때마침 배달된 석간신문에도 농성장면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린 것을 보자 이들은 힘을 얻었다. 와이에이치무역 사장 박정원은 신민당사로 와 당 간부 및 노동자 대표들과 만났다. 그는 “회사가 폐업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들 여공들은 작업 성적이 극히 나쁘기 때문에 더이상 고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가, 생산성이 떨어진 것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가 제때에 부품을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 아니냐는 반박을 받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와이에이치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정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유신체제의 억압에 대한 불만은 널리 퍼져 있었지만 1979년 상반기에는 그 불만이 저항으로 표출되지는 못했다. 사복들이 캠퍼스에 쫙 깔려 있고, 로마병정 같은 복장을 한 전경들이 여러 대의 닭장차에 타고 앉아 있던 대학가에서 1979년 1학기에는 이렇다 할 학생데모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 볼 때는 태평성대였다. 학생들도, 야당 정치인들도, 재야 인사들도, 민주투사들도 깨지 못한 그 위장된 태평성대를 제일 먼저 깨고 나온 것은 “이 나라의 배고프고 예쁜 아가씨들”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야당 당사로 뛰어들어가면서 와이에이치(YH)무역사건은 한개 회사의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에는 유신체제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지 만 24시간이 된 8월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대책회의는 신속한 강제해산을 결정했다. 경찰 내에서는 여공 200명에 당원과 당직자까지 합치면 한끼 설렁탕 값만 해도 100만원이 되니 돈 없는 신민당이 자연히 내보낼 터인데 구태여 끌어낼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런 신중론은 곧 강경론에 묻혀버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강제진압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부각하’라 불리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더욱 강경한 입장이었다. 신민당 의원 일부는 당사 건너편 가든호텔에 방을 잡아두고 농성 현장의 움직임뿐 아니라 신민당 간부회의의 내용까지 차지철에게 열심히 보고했다고 한다.

 

 

 

 

 

 

 

경찰의 강제진압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여성노동자들은 8월10일 밤 10시40분 긴급 결사총회를 열고 경찰이 진입하면 모두 투신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흥분한 여성들은 창틀에 매달려 투신하겠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모두 8명이 실신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낭독했던 노조 조직부 차장 김경숙은 금방 깨어나 농성장에 남았다. 현장의 상황이 급박하다는 보고를 받은 김영삼은 급히 4층으로 올라와 “너희는 결코 두려워 말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이들을 달랬다. 김영삼은 여태껏 경찰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은 없다면서 자신과 30여명의 의원이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라며 흥분한 농성자들을 진정시켰다. 여성노동자들이 잠자리에 들자 김영삼은 당사 정문으로 내려가 “여공들이 흥분하니 모두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경찰들이 이에 응하지 않아 실랑이를 벌이던 김영삼은 “너희들이 정말 저 여공들을 뛰어내리도록 할 참이냐”며 마포서 정보과장의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김경숙은 정말 투신자살로 죽었는가

 

 

 

 

 

 

새벽 2시 자동차 경적소리가 세번 길게 울리는 것을 신호로 경찰 1천여명이 동원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사복조들이 재빨리 4층 강당의 창문 쪽을 봉쇄하여 여성노동자들의 투신을 막는 사이, 4인1조의 전경들은 농성중인 여성노동자들을 한명씩 끌어내 닭장차 15대에 태워 서울시내 경찰서 7곳에 분산 수용했다. 진압작전은 23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신민당 대변인인 박권흠 의원은 “나 대변인이야”라고 외치다가 사복들에게 “그래, 대변인 잘 만났다”며 자근자근 밟히는 폭행을 당했다. 그는 코뼈가 내려앉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한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신해 업혀가다 깨어나 농성장에 남은 22살 김경숙이었다. 김경숙은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남는 것은 병밖에 없다.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했건만 그 다짐을 지킬 수 없었다.

 경찰은 김경숙이 동맥을 끊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김경숙의 부검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근거로 손목에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손등에는 곤봉과 같은 둥근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김영삼에 따르면 와이에이치 여성노동자들에게 식사를 날라주던 인근 식당의 여종업원들이 끝내 밤중에 경찰에 의해 개처럼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고 한다.

경찰에 의해 집으로 끌려갔던 김영삼은 아침 일찍 당사로 돌아와 당사 정면에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여성노동자들이 끌려간 바로 그 자리에서 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과 함께 농성에 들어갔다.

 

 

 

 

 

 

 

 

 

신민당이 농성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던 8월13일 신민당의 원외지구당 위원장인 조일환·윤완중·유기준 세 사람이 총재단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이들에 따르면 신민당 성북지구당 위원장 조윤형과 전당대회 부의장 김한수, 조윤형이 임명한 성북지구당 대의원 5명 등 7명의 대의원 자격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1979년 5월30일 전당대회에서 과반수를 겨우 2표 넘겨 당선된 김영삼의 총재 선출이 무효라는 것이다.

 

 

 

 

 김영삼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비주류 내부에서도 이들의 가처분신청을 ‘정신 나간 짓’이라고 비난하는 입장도 있었지만, 막상 심리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전당대회 직후인 6월5일 조가연이라는 자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조윤형과 김한수 두 사람의 당원 자격에 대한 유권해석을 의뢰하여 그들이 당원 자격이 없다는 결정을 받아낸 바 있었다. 조가연은 과거 신민당 서대문지구당 부위원장을 지낸 바 있지만 당을 떠난 지 오랜 인물이었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된 전당대회에서 문제가 된 대의원들이 꼭 김영삼에게 투표했다고 볼 수도 없고, 과거 선거 또는 당선무효판결 등으로 의원직을 그만둔 사람들이 재직중에 행사한 표결이 유효하다는 판례에 비추어볼 때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은 참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의 사법부는 이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9월8일 서울민사지법 합의16부 조언 부장판사는 김영삼의 총재 직무를 정지시키고, 전당대회 의장 정운갑을 총재 직무권한대행으로 선임했다. 조윤형과 김한수는 8대 국회의원이었다가 유신 쿠데타로 투옥되어 실형을 산 사실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어 정당원의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이는 마치 노동조합에서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느냐와 같은 성격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들은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도 했고, 조윤형은 1976년 전당대회 때는 김영삼에 반대하여 이철승 편에 서서 투표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유신체제에 협조적인 이철승을 찍으면 유효하고, 선명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을 찍으면 무효라는 것은 법의 폭력이라고 비난했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정운갑은 총재 직무권한대행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여 신민당에는 정치적 총재와 법적 총재가 따로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 연출되었다.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성을 상실한 유신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마저 박탈해버렸다

 

 

김영삼의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항쟁에 철옹성같은  유신정권이 무너지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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